200. 컨트리 로드.-4-
음식이 산처럼 쌓였다. 라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말로 음식을 산만큼 높게 쌓을 수 있을 리는 없다. 그저 관용구일 뿐이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또한 이제껏 살아오며 같은 말을 쓴 적은 있어도 그만한 양의 음식을 접한 경험은 없었다.
"우와……."
"이게 다 뭐야……."
하지만. 오늘 그들은 살면서 처음으로 '산처럼 쌓인 음식'이란 말의 사용처를 깨달을 것 같단 감상에 빠져 있었다.
길쭉한 접시에 삼각형 모양으로 쌓인 산적.
능선이 완만한 언덕마냥 불룩하게 모인 잡채.
물고기 비늘이 늘어선 것처럼 겹겹이 줄 선 한입 크기의 모듬전.
그 외에도 전골, 갈비찜, 떡갈비, 생선조림 등의 메인.
나물과 김치, 쌈채소 등의 사이드.
마지막으로 각자의 자리 앞에 놓인 하얀 쌀밥의 화룡점정.
심지어 아직 끝이 아니다. 아직도
총합 열여섯 명의 사람이 둘러앉아도 넉넉한 탁자 위에 빈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올라간 도합 수십 종류의 음식이 안 그래도 허기에 시달리던 그들의 시선을 간단히 앗아갔다.
열여섯은커녕 스무 명이 넘게 와도 다 해치우지 못할 것 같은 음식의 산.
상다리가 휘어지다 못해 부러질 것 같은 광경에 집안의 맏아들인 류상일은 감탄하다 못해 질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아니, 어머니. 이건 무슨…… 설마 혼자 다 준비하신 거예요?"
안 그래도 손주와 함께 찾아뵐 때마다 잘 먹여 보내겠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시는 분이라지만 오늘은 유독 더한 모습에 당황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랑의 표현이라지만 이 정도면 농담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사랑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
황당해하는 류상일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막내어멈이랑 손자가 도와줬지."
"예?"
그러고 보면 먼저 와 있었다고 했던가. 그는 부엌에서 아직도 뭔가를 나르기 바쁜 두 사람을 힐끗거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그럼 됐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 무릎 안 좋다고 병원도 다녀오셨으면서."
"네 아버지만 하겠니. 그이는 아직도 아침마다 산 타는 게 일관데."
아들의 서툰 배려에 작게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됐으니 얼른 앉으렴. 밥 다 식겠다."
"예."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 될 때쯤이 돼서야 찬혁도 마지막 쟁반을 챙겨 큰방에 들어섰다.
이어붙인 상에 주르륵 둘러앉는 일가.
류승길이 첫 수저를 뜨자 다른 이들도 뒤를 잇는다.
그리고 그 직후.
"음?"
"어라?"
"웁!"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는 탄성. 서로가 서로를 보며, '이게 지금 내 입에서 나온 소리인가?'라는 시선을 보내던 그때. 아무 말 없이 상황을 관조하던 류승길이 툭 말을 내뱉었다.
"할멈. 이거 당신이 만든 거 아니지?"
"어머, 알겠어요?"
"내가 50년 동안 당신이 만든 걸 먹고 살았는데 그걸 모를까."
류승길의 시선이 식탁 가장 끝자락에 앉은 찬혁 일가에게 향한다.
"어멈…… 은, 아닌 것 같고. 그래, 찬혁이 네가 만든 게냐?"
찬혁은 내심 놀란 얼굴을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만들긴 했는데 좀 도와드리기만 했어요."
"도와주기만 했다니, 거의 혼자 만든 거나 마찬가진데."
저 옛날 시어머니에게 요리 공부를 배우던 때가 생각났다며 그녀가 웃었다.
"그래. 요리라도 배우는 모양이구나."
"…… 예. 지금은 조리 특성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친척 앞에서 꺼내기에는 껄끄러운 화제였으나, 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맛있구나. 좋은 걸 잘 배우고 있어. 열심히 해라."
"아…… 넵."
찬혁은 숙인 고개를 살짝 들어 류승길을 바라봤다.
무뚝뚝한 말투에 짧은 대화.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 치곤 좀 쌀쌀 맞은 것이 아닌가 싶은 온도.
그러나 찬혁이 만든 요리를 천천히 씹으며 음미하는 류승길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말린 것을 일동은 확실히 목격했다.
"뭘 보고 있어. 너희도 얼른 먹어라."
"아, 예, 아버지. 자자, 먹자."
"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찬혁아."
"어…… 네. 맛있게 드세요."
그의 기억에 남은 친척의 모습과는 다른 생소한 분위기와 그에 더한 감사인사에, 찬혁은 당혹해하면서도 고개를 주억이며 얼떨떨한 인사를 돌려주었다.
***
식사는 내가 생각보다 순식간에, 그러면서도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서 끝을 맺었다.
'순식간'과 '긴 시간'이라는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긴 하지만, 내 계산 상 분명 스무 명은 거뜬히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많은 음식이 그보다 적은 수의 사람 뱃속으로 사라진 걸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조금은 남겨서 내일도 써먹겠거니 싶었는데.'
집밥의 맛이란 게 그런 것 아니던가. 설렁탕 한 달 치 끓여놓고 한 달 내내 그것만 먹고, 된장찌개는 사흘 치 정도 끓여두고 먹고, 카레도 잔뜩 만들어서 며칠 동안 그걸로 때우고 하는.
그런데 그게 싹 다 사라질 줄이야.
'요리사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가계의 식사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글쎄. 어떨까.
'점심, 저녁도 같이 잘 부탁해!' 라며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바라보시던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냥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되려나.'
예상하지 못한 할아버지의 응원으로 친척 사이에서 내 주가가 올라간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뭐, 지원해 주신 할아버지 당신께서 잘 하고 있다고 말해주셨으니 잡음이 어느 정도는 줄어드리라.
그게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을지는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아직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알 수 없겠네.
다들 과식한 탓에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가 될 것이다.
'마침 해야 할 일도 있고.'
요리라는 건 설거지까지 해야 비로소 끝나는 것.
16인분의 정찬을 뒷정리하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덕분에 할머니와 고모, 어머니까지 뒷정리하러 총출동했으니 나도 나가는 게 당연하지.
……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찬혁아, 여긴 왜 나왔어?"
"뒷정리 도와드리려고요."
"요리하느라 고생한 애가 뭘 또 돕겠다고 나오니. 들어가, 들어가."
"어……."
이건 또 무슨 일인지.
부엌으로 나가자마자 그대로 되밀려 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안 그래도 생전 처음 듣는 할아버지의 칭찬에 이어 고모들도 날 보며 극성을 떠시는 게, 이런 친척들의 모습 자체가 익숙하질 않아 살짝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래도 이대로 들어가면 고생하고 계신 어르신들 볼 낯이 있겠는가. 뭣보다 난 내 일은 내가 마무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다들 나와 계신데 어떻게 혼자 들어가요. 요리도 너무 많이 해서 치울 것도 잔뜩 있는데, 한 사람 더 일하면 금방 끝나잖아요."
"정말 괜찮은데."
"저야말로 괜찮아요. 거기다 제가 손이 제법 빠르거든요. 얼른 끝내고 들어가셔 쉬셔야죠."
"참, 말을 어쩜 이리 예쁘게 하니."
"그러니까. 우리 딸들은 밥 먹고 휙 들어가서 핸드폰만 하고 있는데."
"밥도 엄청 깨작대지?"
"언니네도 그래? 참, 남편이란 사람은 힘들게 만들어줘도 깨작깨작, 난 그이가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아니 근데 오늘 보니까 그렇지도 않아!"
"누가 아니래니! 난 우리 애들이 밥 세 공기씩 먹는 거 오늘 처음 봤다니까?"
…… 시끄러워.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더니, 이쪽은 고작 둘인데 집안 잡기가 아주 남아나질 않겠다. 내가 학교에서 자주 만나는 여자애들은 다들 엄청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물론 많은 녀석이 둘 정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할머니와 고모, 거기다 어머니까지 합친 어른 네 분의 틈바구니에 낀 나는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뒷정리를 빠르게 마칠 수 있었다.
평소보다 일이 힘들게 느껴졌다. 아니, 힘든 게 맞았다. 평소에 일할 때는 몇몇 상황 제외하고는 별로 움직일 필요가 없던 입이 고모들 질문에 대꾸한다고 유독 혹사했으니까.
"오늘 해준 요리 되게 맛있더라. 잡채가 어쩜 그리 맛있니? 언니 나 고기 좋아하는 거 알지? 근데 잡채가 너무 맛있어서 갈비찜에는 손도 잘 안 가더라니까?"
"나물은 또 어떻고! 밥에 쓱쓱 비벼 먹는데 어쩜 그렇게 간이 딱 좋게 뱄는지! 고추장도 좀 다른 것 같던데. 아, 생각난다. 이렇게 배부른데 침 고이는 것 봐."
"아, 아하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가 더 고맙지."
"얼마 전에 네 고모부랑 갔던 식당보다 맛있더라. 거긴 돈만 비싸지 엄청 맛있진 않았거든."
…… 괴로운 시간이었어. 주로 성대와 고막이.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소득이라곤 해도, 물질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소득이었지만 말이다.
"맛있게 드신 것 같은데, 혹시 저녁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재료 있는 대로 만들어드릴게요."
"어머, 정말로?"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그리고 만드는 법 궁금하시면 따로 적어서 드릴게요."
"진짜? 어머어머!"
"참 애가 착하다. 올케는 어쩜 이렇게 애를 잘 키웠을까. 우리 애가 반만 닮았으면 좋겠어."
"예? 그, 형이나 누나들도 다들 공부도 잘 하신다면서요. 저야 뭐 요리 말곤 재주가 없는데요."
"얘는, 공부도 공부지만 이렇게 잘 자란 만큼 좋은 게 또 어딨니."
"우리 애들한테 고마워, 사랑해 소리 들어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
"정말! 올케가 부럽다, 부러워."
듣는 사람이 부담스러워질 칭찬에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다.
할아버지의 칭찬이야 뭐, 회귀 전에는 할아버지를 직접 뵌 적이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그렇다 치지만 큰아버지나 고모들의 칭찬은 내가 마흔이 다 돼서도 간신히 한두 번 들어봤을 정도로 흔치 않았다.
그래서 나로선 이 두 분 사이에 껴서 이런 상황이 된 것 자체가 굉장히 생소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조금 사정이 다른 분이 계시다. 바로 주방 맞은편에서 다른 일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나와는 아직 친척에 대한 반감이 그렇게 크지 않으실 때다.
그런 와중에 몇 년 만에....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 친척 모임에 출석한 기억이 없으니까 대충 5년은 넘었나.
이번에 올 수 있게 된 것도 내가 이래저래 한 일 덕에 가정형편에 여유가 생겨서 시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 만에 일가가 모인 자리에서 내 칭찬이 오르내린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기쁜 것인지, 어머니는 집에 막 오셨을 때보다 훨씬 환한 미소를 짓고 할머니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
"후……."
그래. 내 일이 대수냐. 내 한 몸 희생해서 어머니가 웃었으면 그걸로 됐지.
적잖게 힘든 일이 많은 연말이지만, 그거 하나만으로도 내 일 년이 보상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
뒷정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도롱이 벌레가 되어 버린 주아를 걷어차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꺅꺅대며 덤벼들다 제풀에 지친 녀석을 말로 툭툭 건드리며 놀고 있을 때, 갑자기 할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셨다.
서둘러 주아를 데리고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니, 거실에는 이미 제일 끝방에 있던 우리보다 먼저 온 친척 어르신들과 그 가족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큰아버지 부부와 외동아들. 합쳐서 세 사람.
큰고모 부부와 두 형제. 합쳐서 네 사람.
둘째고모 부부와 두 자매. 이쪽도 합쳐서 네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 세 사람과 조부모님까지.
뒤늦게 도착한 우리가 황급히 자리에 앉자, 그걸 본 할아버지가 비로소 입을 여셨다.
"다들, 이번에 내가 왜 굳이 너희 전부를 불러 모았나 궁금했을 게다."
음, 분명 나도 궁금하긴 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누가 언제 오든 딱히 신경을 안 쓰시는 분이지만, 이렇게 먼저 가족을 불러 모으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오늘 같은 날이 기억에 없는 걸 보면 회귀 전에는 어머니가 일을 하시느라 참석을 못한 것 같은데…….
다른 친척들도 의아한 얼굴로 이어질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렸다.
"먼저 왜 너희를 불러 모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마."
그리고 직후, 할아버지의 입에서 내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다."
…… 유산이요?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