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컨트리 로드.-1-
"그래서, 새벽 다섯 시에 가락을 갔다 지금 출근한 거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거의 다섯 시간에 가까운 대장정 끝에 간신히 출근한 가게.
젊은 피의 끝없는 체력에도 한계라는 게 있다는 걸까.
나름 멀쩡한 척 가장하고 가게로 들어선 나를 잠시 살피던 사장님은 한눈에 뭔가 이상하단 걸 눈치채신 듯 '뭔 일 있냐?'며 질문을 던졌다.
"거, 두 번 만 어쩌면 해외도 다녀오겠다."
"안 그래도 조금 조짐이 있어요."
"얼씨구나."
그래, 차라리 네가 나가는 게 국위선양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띄워주는 건지. 아님 빙 돌려 핀잔하는 건지 잘 모를 말에 웃음으로만 답했다.
"아침부터 얼굴이 퀭해서 뭔가 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좀 말해두면 좋을 거 아니냐."
"어제 퇴근하고 밤 다 돼서 약속이 잡혔거든요. 늦게 전화하면 죄송하잖아요."
퉁명스럽게 말하는 사장님이지만, 그 속에 담긴 걱정스런 마음은 느껴진다.
딱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안 했을 뿐이지만, 역시 해두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이렇게 걱정하시는 거 보면 괜히 죄송하기도 하고.'
평소에 크게 사고를 치고 다닌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신지 모르겠다.
"아니, 기왕 가락까지 갔으면 우리 쓸 것도 좀 사 오지 그랬냐. 미리 간다고 얘기했음 뭐 사 올지 알려주기라도 했지."
"아니, 그쪽이었어요?"
"? 그럼 그쪽 말고 뭐가 있어."
아, 내 감동 어떡할 거야. 이 정도면 거의 건물 3층에서 창문 열고 콘크리트 바닥에 집어던진 수준인데.
"하아……."
그래, 괜히 감정선 탄 내 잘못이 크다.
한숨 사이에 한탄을 섞어 뱉은 뒤, 설렁설렁 주방에 들어가 유니폼으로 대충 갈아입었다.
"하이고, 걷는 것 봐라. 힘 다 빠져서 오늘 버틸지나 모르겠네."
"저를 뭘로 보고. 당연히 할 수 있죠."
요리사한테 겜알못 급의 모욕이나 다름없는 역린을 함부로 건들다니, 이 아저씨 오늘 어그로 잘 끄네.
"그래, 그만큼 씩씩하면 됐다."
"거기다 오늘 손님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요. 많아봤자 어제만큼은 아닐걸요?"
어차피 이번 연말 시즌은 오늘만 지나면 끝이다. 아마 내년 새해 연휴가 지난 다음에나 손님이 돌아오겠지.
'거기다 시즌 한정 메뉴 판매도 오늘로 끝이고…….'
솔직히 이 메뉴를 운영하며 안 그래도 힘든 일이 서너 배는 고되진 것 같아 슬슬 그만둘 타이밍을 잡고 싶었다. 뭐, 애당초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이니 오늘 끝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긴 하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사장님의 얼굴 위로 해오름을 본 해바라기 부럽지 않은 환하디 환한 미소가 올라온다.
뭐라고 해야 할까, 순간 영문 모를 소름이 온몸을 뒤덮는 기분에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무, 뭐예요. 왜 그래요?"
"찬혁아. 너 혹시 그거 아니?"
"뭘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사장님은 그 묘하게 기분 나쁜 웃는 낯을 내개로 향한 채 답했다.
"너 말이다. 전에도 그런 소리 했었지? 근데 그때마다 무슨 일이 있었게?"
그러고선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주방 뒤편 창고로 들어가시는 사장님.
창고에서 나온 사장님의 손에는, 내가 여태껏 창고를 뒤지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커다란 플랜카드 판때기가 들려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 메뉴 종료 기념 세일!> ?'
…… 농담이지?
농담이라면 우습지도 않을 내용이 적힌 플랜카드를 내게 내민 사장님의 입꼬리가 광대를 넘어 두 귀 아래까지 주욱 찢어졌다.
"네가 주방에서 그 말을 한 날마다 일일 최고 매출을 경신했단다."
"…… 아."
니미.
사장님이 들었다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았을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 플랜카드를 건물 바깥에 붙이러 향하는 사장님의 등을 나는 멍하니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
이후의 일정은 내 예상과 사장님의 예상이 적절히 섞인 것 같은 양상으로 전개됐다.
'설마 진짜 일일 최고 매출을 경신할 줄이야…….'
심지어 그날은 세일까지 했는데도 그랬다! 종업원 아주머니와 단기 설거지 알바생 한 사람을 추가로 구한 덕분일지도 모른다. 뭐, 단기 설거지 알바생은 일당 15만을 듣고 좋아서 왔다가 다음날 런해 버렸지만.
사장님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며 깔끔하게 주고 끝냈다고 한다. 쯧쯧, 요오즘 젊은 것들은……! 라떼는 말이야……!
…… 그래, 이 소리도 슬슬 그만하자. 뭐 어디 가서 나이를 가슴에 써 붙이고 다닐 것도 아니고.
그나마 크리스마스가 끝난 다음날부터는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가 대충 들어맞았다.
다들 연말 모임이나 여행 등을 떠나는 분위기여서 동네도 많이 한산해졌고, 우리 가게를 찾는 사람도 제법 있긴 했어도 이전만큼은 아니게 됐으니까.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우리 가게도 연말, 연초를 맞아 약 일주일 남짓한 장기휴무를 맞이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찍은 건 언제 TV에 나온다든?"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방우석 PD님 말로는 연말, 연초 특집 후에 첫 방영이라고 했으니, 아마 빠르면 다다음 주 정도 아닐까.
"그래?…… 아니, 잠깐만. 그쯤이면 너 슬슬 알바 끝내고 기숙사 돌아갔을 때 아니냐?"
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개학이 2월 초니까 학교에 다시 익숙해질 시간도 겸해서 1월 말 때쯤에는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다.
방송에서 우리가 촬영한 분량이 나올 때면 아마 난 이미 이 거리를 뜬 뒤겠지.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사고 치고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들린다.
"아니, 쳤잖아! 사고를!"
"제가 무슨 사고를 쳐요."
"너 가면 가게는 어떻게 하라고?!"
"또또 엄살 피우신다."
사장님이 좀 설렁설렁 하는 면이 있어서 그렇지 결코 나보다 기본적인 솜씨로 뒤지시는 분이 아니다. 최신 조리이론이나 양식 쪽은 내가 더 빠삭하겠지만, 적어도 이 가게에서 다루는 메뉴라면 내가 없어도 맛에 차이가 생길 일은 없으리라.
"맛이 떨어지는 거의 문제가 아니라 능률 문제 아니냐. 너 없으면 이제까지 하던 거 반도 못 할걸?"
그건…… 맞는 말이긴 하다.
사장님과 나의 연계 플레이는 1+1로 2가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산수로 치면 3+3으로 10이 나오는 수준 아닐까.
십자눈깔 우주괴수 둘이랑 듀오로 영혼의 맞다이를 뜰 것도 아니라 의미 없는 계측이긴 해도.
아무튼, 그런 내가 런을 타면 그야 더럽게 힘들어지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나도 내 인생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 경우엔 저한테 고맙다고 말씀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와, 업체에서 이 정도 해줬으면 홍보비 한 천 정도는 받았다."
천이 뭐야. 그보다 더 받을 수도 있겠는데. 공중파 3사 황금시간 출연? 이야. 돈으로 되는 게 아니지 이건.
사장님도 그 말에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는지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 뿐이다.
"뭐, 여기 찾는 손님이야 자정 작용이 되겠죠. 이 날씨에 줄 서 있고 싶은 사람 별로 없을 걸요?"
"그 논리면 우리 매출이 그만큼 나오기나 했겠냐."
"오……."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적을 하시네요. 9점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이놈아."
"쉽게 안 오는 기횐데."
"필요 없대도."
나름 10점 만점 중 9점이었는데. 아까운 기회를 날리시는구나.
뭐, 쉰소리는 이쯤 하고. 나도 그 부분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아마 내가 학교로 가버리면 아마 지금처럼 손님을 소화하지는 못하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내가 평생 이 가게에 붙어 있을 건 아니니까. 한 번 수로를 뚫었으니 그 이후는 사장님 혼자 너끈히 해내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거 참. 학교 가서 사람 비행기 태우는 기술만 늘었냐? 옛날엔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사람이야 바뀌는 거죠."
"너만큼 바뀌려면 아예 사람을 어디서 바꿔치기하는 게 빠를 거다."
이번에도 고득점. 정답에 아주 가까웠습니다. 9.5점 드리죠. 말은 안 하겠지만.
"그래서, 새해 연휴는 어떻게 보내게?"
"사장님은요?"
"나야 어디 갈 데가 있기나 하냐. 간만에 오래 쉬는 만큼 그냥 집에나 있으련다."
"운동도 좀 다니시는 게 어때요."
"안 그래도 요새 밥을 통 못 먹어서 5키로는 빠진 것 같다 이놈아. 필요 없어."
운동을 살만 빼려고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꾸준한 전신운동을 통해 건강을 관리하는 목적도 있는데.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싶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너도 집에만 있을 생각이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하는 건 어머니라."
회귀 전의 내가 요맘때 어떻게 지냈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연휴 때 어딜 가거나 하는 일은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 쪽 친가나 어머니 쪽 외가. 둘 다 머리가 좀 굵어진 이후라면 몰라도 어릴 때 간 기억은 별로 없으니까. 애당초 그다지 좋은 추억이 남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째, 올해에는 그게 좀 달라질 것 같은 기미가 조금씩 보이고 있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별건 아닌데……."
아무래도 이번 연말, 어머니가 정말 오랜만에 내 친가.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향에 들를 계획인 것 같다는 게 지금 내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라.
그게 왜 고민이냐는 듯 희한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사장님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나는, 이내 말을 얼버무리곤 작별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댁이라……."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반갑기만 한 이름은 아니었다.
***
20년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새벽. 어머니와 나, 그리고 주아 세 사람은 꼭 누구한테 쫓기는 사람마냥 황급히 집을 나섰다.
딱히 정말로 누구한테 쫓기는 건 당연히 아니었고, 그냥 기차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두를 뿐이다.
"차 있으면 편할 텐데."
"면허 가진 사람이 없잖니. 좀만 참으렴."
주아의 칭얼댐에 어머니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답하셨다.
오랜만에 주아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이 추운 날씨에 짐에 선물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걷는 건 고행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면허가 있어도 차가 없는 걸 어쩐단 말인가. 내가 번 돈으로 차를 살 수야 있겠다만 유지비가 만만치 않기도 하고.
'나야 운전은 할 수 있어도…….'
그것도 회귀 전에 면허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 고등학생 무면허 운전? 아주 잡혀가기 딱 좋은 소재다. 새해 특수를 노리는 경찰의 실적이 되는 건 사양이라서.
"좀 참아.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잖아."
"으으, 춥단 말야."
그렇게 말하는 주아 녀석의 품에는 내가 이전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사준 고가의 최신형 패드가 보란 듯이 안겨 있다. 나름 미술하는 녀석 선물이라고 어머니 몰래 비싼 걸로 사준 건데, 알아서 숨기고 다니겠지 싶더니 저렇게 대놓고 쓰고 다닌다.
아무튼, 말한 대로 할아버지 댁은 그렇게 멀지 않다. 기차 중에 제일 느린 무궁화호를 타도 두 시간 내외면 도착하는 곳이니까.
아마 차가 있으면 한 시간 반 정도로 줄이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마음먹으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지.
"……."
"엄마? 왜 그래?"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간단히 오갈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에 비해, 마음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표정을 보면 그런 거리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쪽 친척이 마냥 친절한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나 할머니 같은 경우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진 몰라도, 그 외의 친척들 입장에서 아버지라는 연결고리가 사라진 우리 가정은 거의 남에 가까운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굳이 친가로 향하는 이유는 하나.
오랜만에 우리 얼굴이 보고 싶다던, 할아버지의 부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 하아."
솔직히, 정말 가기 싫은데.
내 마음속, 아직 어린 류찬혁의 속내가 그렇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