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주방의 귀인.-4-
다음날 새벽.
실로 며칠 만에 맞이하는 푹신하고도 따뜻한 잠자리와 눈물겨운 이별을 마친 우상구는 찬물 세안으로 간신히 수면욕을 떨쳐내고 나갈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찬물을 맞으며 겨울의 냉기에 시달릴 때도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실 줄 몰랐다. 이유는 단순하다. 찬혁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기뻤으니까.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길까.'
그 옛날 어릴 적에 보았던 만화 주제가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던 그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우상구가 시선을 돌렸다.
"뭘 벌써 일어나? 당분간 가게도 안 연다면서."
"아, 미안. 깼어?"
"옆에서 그렇게 부산스럽게 구는데 잘도 잠이 오겠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우상구가 준비하는 통에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불퉁한 얼굴로 잔소리를 꺼내자 우상구는 옷깃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곤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 탓에 고생하는 아내를 향한 미안함이 담긴 미소였다.
"말도 안 하고 집 안 들어오다가, 또 말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고. 거기다 자는 사람까지 깨우고 난리야. 하여튼 칠칠맞아. 옷은 또 그게 뭐야."
"옷이 왜?"
"옷깃 좀 정리해. 평소엔 자기가 잔소리면서. 이리 와."
거의 멱살을 잡아끌다시피 하는 아내의 억센 손길에 우상구의 몸이 딸려왔다.
당황하며 몸을 바로잡은 우상구가 놀란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봤지만, 이미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옷깃 정리만 안 된 줄 알았더니, 아예 단추를 잘못 끼웠네."
"…… 내가 할게."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단추 채우기 힘들어."
우상구는 목깃을 죄이는 아내의 얼굴을 살폈다.
한창 잘 나갈 때에 비하면 분명 수척한 안색.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차고 밝았던 그녀의 옛모습과 비교하면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게 그저 나이가 든 탓 뿐만은 아니라는 걸 우상구는 잘 안다.
'이것도 다 내가 못난 탓이지…….'
소싯적 했던 장인어른과의 약속은 다 뭐였는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자괴감이 주인을 닮아 이른 출근을 감행한다.
"됐다. 자, 이제 가도 돼."
"어, 그래."
"…… 왜 이렇게 일찍 나가는지는 몰라도, 다치지만 말고 조심히 다녀와."
"…… 알겠어."
침대로 돌아가는 아내의 등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정작 그 말이 입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맙지 않아서가 아니다.
머리는 몰라도 몸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직 그 말을 할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다녀올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게 된 뒤가 될 테니까.
아주 잠시나마 해이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우상구는 약속장소인 자신의 가게로 향했다.
***
"안녕하세요, 우상구 사장님."
"안녕! 좋은 아침이다!"
"아, 아. 예."
새벽 다섯 시. 어제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춰 나타난 우상구 사장님은 어째 오늘따라 굉장히 활기가 넘쳤다. 아니 이건 기백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어차피 직접 대면한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은, 시간으로 환산하면 24시간 미만인 사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달라져서야 못 알아볼 수가 없지.
'아니, 오히려 이쪽이 본모습인가?'
제작진 말에 따르면 며칠 동안이나 철야를 했다고 하니까, 저 나이에 그 정도 격무를 거쳤다면 텐션 바뀌는 것 정도야 대단한 일도 아니긴 할 것이다. 정신은 몸을 따라간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체력 회복과 함께 활기참도 돌아왔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
…… 그렇다고 바뀐 게 저 정도면 그래프가 티라노 이빨 모양처럼 될 것 같지만.
뭐, 그런 건 됐고. 시간도 딱 알맞게 오셨으니 슬슬 출발해도 좋을 성 싶다.
'차는…… 이 정도면 딱 괜찮네.'
제법 덩치가 좋은 SUV. 지금부터 갈 곳에 제법 잘 어울리는 차량이다.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탑승하는 나를 따라 인사차 운전석을 나왔던 우상구 사장님도 다시 운전석으로 되돌아오셨다.
"아, 맞다. 뒷문도 좀 열어주실래요?"
"뒷문?"
"동행이 있거든요."
내 말을 들은 우상구 사장님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떠오르기 무섭게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든 한기 탓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들부들 떨리지 않는 곳이 없는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히터 앞에 달라붙었다.
한 순간은 깜짝 놀란 우상구 사장님이었으나 이윽고 내방자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아이고, 선생님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뒷좌석에 탑승한 이는 바로 어제 우상구 사장님 촬영을 맡았던 카메라팀 중 한 사람.
어젯밤, 직접 방우석PD님에게 전화하여 인력지원을 요청해 오게 된 사람이다.
원래는 우리 둘만 가도 별문제는 없겠지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조그마한 티끌 하나만 있어도 어떻게든 물고 뜯으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 참가자 중 한 사람만 데리고 다녔다고 해봐라. 아무 소리 안 나오나. 예를 들어 수능 문제 출제자가 수험생 한 사람이랑 개인적으로 교류를 나눴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한 것 아닌가?
이 사람은 그 예방책으로 부른 것이다.
요컨대 증거를 남기는 사람이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촬영하며 혹시나 생길지도 모르는 논란이란 이름의 불씨를 미리 밟아 끌 수 있도록 말이다.
"이쯤하면 준비는 끝난 것 같네요. 출발하죠."
"어, 어디로 갈 생각이니?"
"그야 뭐, 이런 새벽에 요리사 두 사람이 갈 곳이야 뻔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장님. 이거 안 되겠구만. 확실히 교육을 할 필요가 있겠어.
이쪽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호기심 깃든 눈빛이 그대로 질문이 되어 쏘아졌다. 하는 수 없지. 아직 제대로 템 파밍 지역도 모르는 뉴비에게 팁을 좀 풀어주도록 할까.
"시장에 갑시다."
"시장…… 요?"
"예."
이 나라 전국팔도 어디를 가든 시장이란 곳은 어디에나 있겠지만, 우리가 갈 곳은 그런 단순한 곳이 아니다.
"한 가락 뽑으러 갑시다."
송파구 가락동의 농수산물시장.
그곳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목표가 되리라.
***
"일단 말씀드리자면, 우상구 사장님 솜씨는 썩 뛰어나지 않아요."
"그, 그렇지……."
가락으로 향하는 길. 차를 타고 가며 라디오나 들을 만큼 한가한 것도 아니기에 나는 비는 시간을 틈타 어제 그에게 마저 해주지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
"어제 먹은 떡볶이는, 솔직히 말해서 엄청 대단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 나도 안다."
그 떡볶이에 대해 평가하자면 '평범'이라는 두 글자가 딱 어울린다.
왜, 아무 만화나 들고 첫장만 넘기면 나오는 '지극히 평범한 어쩌구' 같은 느낌.
내가 우상구 사장님의 떡볶이를 먹고 든 생각이 바로 그거다.
그냥, 아무 길이나 걷다가 눈에 띈 한적한 분식집에 들어가서 먹는 떡볶이. 정말 딱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특색이랄 것도, 특징이랄 것도 없다.
어쩌면 특색이라는 부분에선 근래 한창 욕과 칭찬을 함께 들어먹는 엄청 매운 프랜차이즈 떡볶이가 더 우수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런 음식은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아무튼, 이상의 평가로 말하자면 내가 우상구 사장님이 만든 떡볶이를 매력적이라고 판단할 요소는 거의 하나도 없다고 봐도 좋겠지.
"그럼 어째서……."
"왜 부른 거냐고요?"
"맞다. 네 말이 맞으면 나는 불합격인 게 아니냐?"
하긴, 내 말을 해석하면 그렇게 들렸으려나.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않단 말이지.
"가능성을 봤거든요."
"가능성?"
"예를 들어서요. 여기 똑같은 설계도를 가진 두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건축을 공부하고 경험해봤으며, 적당히 다양하고 적당히 질 좋은 공구를 갖고 적당히 괜찮은 집을 지었어요. 그럼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일까요?"
"…… 그렇, 겠지? 혼자 집을 짓는 건 절대 쉬운 게 아니니까."
"그렇죠? 근데 다른 하나는 그 사람하곤 완전 다른 사람이에요. 집을 지어본 적도 없고, 공구도 부실하고, 가진 재료도 별로 없는 사람이 엉망이긴 해도 비바람 피하기엔 충분한 집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그렇다면 여기서 더 대단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 첫 번째 사람이 아닐까. 그 사람은 적어도 괜찮은 집을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네 생각은 어떤데?"
이 이야기가 누굴 비유하고 있는 건지 대강 눈치챈 듯 보이는 우상구 사장님이 되레 내게 질문했다. 내 생각? 내 생각이라…… 글쎄. 굳이 말해주자면, 솔직히 난 이렇게 생각한다.
"둘 다 제가 보기에는 불합격이에요."
"…… 뭐?"
두 사람 중 후자가 자신이고, 내 입에서 후자가 나오리라고 믿었을 우상구 사장님의 표정이 볼만하다. 하지만 난 진심이다. 내가 꼭 평가해야 한다면 그 두 사람은 둘 다 불합격이다.
"첫 번째 사람은 그만한 조건이 주어졌으면 적당히 괜찮은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하자가 없는 완벽한 물건을 만들어야 돼요. 그게 기본이죠. 후자야 뭐, 아예 제대로 된 완성품이 아니니까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이번 참가자들 중에 전자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지. 오히려 대부분의 참가자가 후자에 속하리라.
요컨대, 아마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온들 아주 완벽한 물건이 아닌 이상 내 입에서 합격이란 말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박종원 선생님이 평가하신다면 모를까.
근데 말이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불합격이 나쁘다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든.
세상에는 분명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기회라는 것이 있다. 정말 사활을 걸고 도전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그건 지금이 아니다. 이건 그저 큰 기회에 섞인 작은 도전 중 하나일 뿐. 그 도전에 실패한다고 기회 전체가 사라지는 건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
특히 노력한 이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가 보기에,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고 비슷한 물건이라도 만들어낸 사람은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겪었겠죠. 언제든 그만둘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아요. 끈기 있게 쓰러진 기둥을 몇 번이고 다시 일으켜서, 손이 까져서 피가 나도록 망치질을 하고, 못나긴 해도 제대로 된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게 절대 쉬운 게 아니거든요."
"……."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을 확실하게 가르치는 건 분명 굉장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엇비슷하게 어려운 일을 이미 한 번 해낸 사람이 두 번은 왜 못하겠어요."
그래서 나는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상구 사장님은, 이미 큰 산을 하나 넘어 마침내 출발점에 도착한 거니까.
출발선에 설 생각이 없는 선수를 억지로 끌고 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직접 그 자리에 섰다면, 적어도 신호 정도는 주고 싶다는 게 내 마음이다.
내 말이 끊기고, 가락으로 향하는 차량 안에 적막이 감돈다.
나도, 우상구 사장님도 말을 꺼내지 않는 탓에 비어 버린 오디오.
뒷좌석에서 튀어나온 짐벌에 달린 카메라 렌즈가 우리 사이를 오가는 것을 느낌적인 느낌으로 눈치챈 것도 잠시. 길고 긴 침묵을 지키던 그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고맙다."
"별 말씀을요."
이후로 약 10분. 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차 내부에선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 침묵은 그다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침묵이 아니었다는 것만을 확실히 해두자.
***
잠시 후, 우리 일행은 목표였던 가락농수산물시장의 입구에 섰다.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스케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우상구 사장님을 내 앞에 세우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상구 사장님은 기초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요. 칼질도 서투르고, 불조절도 잘 못하고, 가게 운영을 획기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으……."
반박할 길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리는 그. 상처 입은 50대 남성의 자존심이 땅바닥을 향한다. 하지만 걱정 마라. 나는 그 특효약을 처방해주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니까.
"사장님. 요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어…… 재료?"
"…… 정답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요리 솜씨가 있어도 재료가 안 받쳐주면 죽도 밥도 안 돼요."
이런 곳까지 데려와 놓고 너무 정답이 뻔한 질문을 던졌나.
그런 당연한 건 왜 물어보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우상구 사장님의 시선을 살짝 회피하며, 등을 돌려 시장의 입구를 향한다.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인프라가 가장 밀집된 도시.
그런 만큼 이 도시에는 농, 축, 수산물의 메카라고도 할 수 있는 3대 시장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하나는 술꾼과 고시생의 마음의 고향 노량진 수산시장.
또 하나는 아시아 최대라는 타이틀을 가진 마장동 축산시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
국내 최대의 농산물 시장인 가락농수산물시장.
아침 경매로부터 시작하여 늦은 밤의 식당까지, 꺼지지 않는 등불로 불야성을 이루는 농산물의 허브.
국내에서 생산, 판매되는 농산물이라면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이곳에서, 나는 우리 청정수 뉴비를 어디 가서 멱 좀 풀어봤다며 자랑할 수 있는 한 명의 당당한 2급수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각오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