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92화 (192/403)

192. 주방의 귀인.-2-

참가자 중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난 누군가 나를 찾아오게끔 유도했다고 해야겠지.

퍼즐 레시피 풀이. 내 입으로 쉽다고 말해놓고 그걸 번복하자니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솔직히 그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식약처 홈페이지만 뒤져봐도 온갖 프랜차이즈의 메뉴에 들어가는 재료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데 평범한 사람이 그걸 보고 그 메뉴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뭐,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내가 만든 레시피가 딱히 대기업에서 만든 레시피 수준이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일반인 기준으로는 충분히 난해한 과정이 가득하다. 과제를 준 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참가자 중 누군가가 정답 가까이에 근접이라도 했다면 그것 자체가 충분히 기적 같은 일이고.

그럼 쉽다는 소리는 왜 한 거냐고? 그야 기준을 내 부하로 잡고 한 말이니까. 애당초 호텔의 부하직원이라고 해도 이 업계에서 보면 충분히 재능 있는 인원이 모인 집단, 일반인하고 비교하면 미안하다.

태릉선수촌에 모인 운동선수를 점심시간에 공 좀 차본 게 전부인 사회인하고 비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내가 본 참가자들 중 일반인의 부류를 벗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평범하게 요리를 좀 해봤고, 공부를 좀 해봤고, 알바를 좀 해본 사람들.

그 정도 수준에서 이 문제는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난제다.

이걸 풀었으면 어쩔 거였냐고? 그럼 애당초 이 프로그램에 안 나왔겠지.

어쨌든 결론을 정리하자면 결국 그들은 어느 시점에서 어쩔 수 없이 막히게 된다.

만약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문제를 푸는데 참고서를 봐도, 전공서적을 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마지막에 의지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건 다름 아닌 문제의 출제자. 요컨대 나다.

그리고 그런 내 유도대로 나를 찾아온 참가자가 있다.

이제 내가 알아봐야 할 부분은 하나.

과연 저 참가자, 우상구 사장이 어느 지점을 자신의 벽으로 보았는가.

저게 정말 벼랑 끝까지 몰려서 더이상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두운 숲의 초입에서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동행자를 찾는 것인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내가 그를 대할 자세가 달라지리라.

정확한 판단은 잘 살펴본 뒤에 내리는 게 맞겠지만…….

"하아……."

사방을 훑는 어르신의 저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속 저울이 점점 후자로 쏠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믿는다,

"쓰읍."

거,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구만.

언제쯤 퇴근이 진정한 의미의 퇴근이 될지 속으로 넋두리를 뱉으며, 주방을 나선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우상구 사장님이시죠?"

"예?"

***

우상구는 당황스러웠다.

가게를 나설 때만 해도 당차기 그지없던 발걸음은 배불뚝 백반의 간판에 채 다다르지도 못한 지점에서 그 기세를 잃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토록 긴 줄을 군대 바깥에서 본 것은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한 뒤로 처음이었으니까.

평소엔 그다지 왕래가 많지 않은 골목길이 마치 번화가의 중심이라도 되는 것 마냥 수많은 인파로 가로막혀 있다. 안 그래도 좁은 골목인데 차는 제대로 지나다닐 수 있을까. 그런 때아닌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단 줄을 서긴 했지만, 이걸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발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뒤로 붙은 줄을 보면 또 빠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어영부영 가게로 들어왔다.

가게 내부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많은 고객이 있는데 책상에는 기름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메뉴도 밀리지 않는다.

대리운영 때가 생각났다. 아니, 일손이 더욱 많은 덕인지 그때보다도 더욱 완벽한 것 같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주문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던 우상구는 이어진 상황에 놀랐다.

자기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찬혁이 먼저 그를 찾아왔으니까. 실제로 만나본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이 시점에서, 우상구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찬혁이 자신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이토록 바쁜 가게에서 일하며 지금 막 들어온 고객의 인상을 단박에 파악할 정도의 여유와 분별력을 가졌다는 것.

만석은커녕 열 명 남짓한 손님만 몰려도 금방 패닉상태에 빠지는 자신과 비교하면 이미 그 자체로 실력을 증명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만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대면에 우상구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 찬혁이 선수를 쳐 그에게 말했다.

"오신 이유는 대강 알고 있어요. 우선 식사 먼저 하시고 가게에 가 계시면 가게 일 마무리하는 대로 찾아뵐게요."

"아, 예. 예?"

"…… 그리고, 기다리실 동안 좀 쉬고 계세요. 가까이서 보니까 되게 피곤해 보이시는데."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말을 끊은 찬혁이 주방으로 돌아간 뒤, 혼자서 멀뚱히 자리에 남은 우상구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어 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흐트러진 옷과 머리, 퀭하게 들어간 볼, 눈 아래로 옅게 늘어진 다크서클.

확실히, 서로 통성명도 안한 사람이 보자마자 걱정이 앞서 나올 법한 상태였다.

"…… 허허."

대체 어쩌려고 이러고 있는 건지.

갑작스럽게 정수리부터 시작해 심장을 일직선으로 꿰뚫는 것 같은 둔한 통증에 우상구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새삼스럽게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실감된다.

평소 겉모습만큼은 흐트러져선 안 된다고 그토록 자식들을 닦달했는데, 이제 그런 말도 쉽게 꺼내진 못할 것 같았다.

'고작 철야 하루 했다고 이렇게 되다니…….'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체력은 조금만 관리를 못 하면 뚝뚝 떨어지고, 피로는 마치 대출 이자마냥 쌓이는 데에만 급급하다.

과연 이런 자신이 식당을 운영해도 괜찮은 것인가.

급격하게 하강곡선을 그리는 자신감에서 억지로 눈을 돌린 그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사람이 신나서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는 커플도 있고, 무어라 말도 없이 접시에 얼굴을 박고 경주라도 하듯 먹는 남자 일행도 있고, 예쁜 모양새로 나온 음식을 손도 대지 않고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여자 일행도 있다.

그 외에도 일가족이나 근처에 사는 노부부, 조부모와 손주 등등.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음식에 빠져들게 하는 가게의 풍경은 어느 의미 이상적인 식당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겠지.

다만…….

─꼬르륵.

"윽."

참으로 서글프게도, 그의 몸은 그런 서정적인 감상보다는 다른 쪽에 더욱 관심이 쏠리는 듯했다.

주책없이 곯는 소리를 내는 우상구의 배. 다행히 홀은 대화와 식기 부딪치는 소리로 시끄러워 그 소리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레시피 연구를 시작하고 삼시 세끼를 떡볶이로만 때웠던가.

그나마도 몇 입 먹고 만들고, 몇 입 먹고 만들기만을 반복한 탓에 난생처음 겪는 패턴에 당황한 그의 위장은 신물을 뱉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떡볶이라는 자극적인 음식은 빈속에 고통을 주기 충분한 요리였다.

그런 와중에 이토록 다채로운 음식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라는 건 그의 몸에는 가혹한 이야기였다.

우상구의 뇌리에 문득 생각이 스친다.

'주문 안 받지 않았나?'

그렇다. 찬혁은 그에게서 어떤 주문도 받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주든 크게 불만이야 없겠지만 대체 어째서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한 그때, 그가 앉은 식탁으로 다가온 종업원이 그의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저 학교 건너편 떡볶이집 사장님 맞으시죠? 찬혁이가 맛있게 드시라고 전해달래요."

"아, 예. 감사합니다."

쟁반 위에는 적당한 크기의 뚜껑이 덮인 대접과 굵게 다진 단무지가 담긴 접시, 그리고 따뜻한 차가 한 잔.

조심스런 손길로 뚜껑을 열어보니, 대접 안에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요리가 담겨 있었다.

"죽?"

죽이었다. 그것도 조금 모양새가 이상한.

마치 그릇에 담아 굳힌 순두부를 그대로 내온 듯, 거울처럼 매끈한 면이 돋보이는 새하얀 죽. 잣과 검은깨가 살짝 올라간 것 외에는 아무런 부재료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죽의 모습에 흥미가 돋았다.

'처음 보는 음식인걸.'

그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죽을 한 술 떴다.

연하게 끓인 호박죽처럼 살짝 끈적이는 질감과 코끝을 파고드는 고소한 쌀내음. 달달한 향.

그의 입이 조심스럽게 죽을 머금자, 이윽고 그의 두 눈이 크게 뜨인다.

우유와 쌀의 은은하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고소함. 꿀물을 머금은 것 같은 달콤함, 그리고 여태껏 그 어떤 죽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부드러움.

고소하고 달달한 죽이 들끓던 그의 속을 어머니의 손길처럼 쓰다듬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살살 느껴지던 통증이 단숨에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단맛으로 인한 미약한 진통효과였지만, 단맛과 진통의 상관관계를 모르는 우상구에게는 그야말로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한 번 움직인 수저는 멈출 줄을 몰랐다.

한 입, 두 입. 그의 손이 연달아 움직인다.

고소함과 달콤함이 과해서 느끼하게 느껴질 때엔 먹기 편하게 다진 단무지를 살짝 곁들여 먹으면 단박에 입속의 느끼함이 가신다.

그야말로 들이마시듯 그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가며 접시 벽에 들러붙은 죽까지 단숨에 해치운 뒤에야 우상구는 수저를 놓을 수 있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만족감. 난생처음 느끼는 미식의 황홀경에서 간신히 헤어나온 그의 시선이 주방 저편에서 드문드문 고개를 내미는 찬혁에게 향했다.

'설마, 내 상태가 어떤지 살피고 일부러 이 죽을 만든 건가?'

대단한 아이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과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직접 고객의 입장에서 그를 살피게 되니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요리 하나 제대로 연구하지 못해 급급한 그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요리를 아주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다니, 이건 대체 얼마나 큰 기회란 말인가.

이쪽이 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무아지경으로 요리에 몰두하고 있는 찬혁을 향해 우상구가 차곡차곡 접시를 쌓은 쟁반을 들고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 쯤이 되자 찬혁의 시선이 우상구에게로 향했다.

"아, 사장님. 맛있게 드셨어요?"

"예. 정말 감사히 먹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이만 들어가시는 건가요?"

"아, 예. 그런데 계산은 어디서……?"

우상구의 질문에 찬혁이 고개를 저었다.

"계산은요. 그냥 들어가셔요. 어차피 메뉴에도 없는 요리에요."

"예?"

그럼 그 요리는 그냥 임기응변으로 만든 요리었단 말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완성도가 너무 뛰어난 요리였기에, 감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재료가 딱 알맞게 준비됐었거든요."

"아니, 그래도 계산을 안 할 수는……."

"정말 괜찮아요. 재료비도 얼마 안 드는 요리에요. 진짜로."

거듭된 만류에도 우상구는 좀처럼 물러설 줄을 몰랐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쪽은 찬혁이었다. 못 이기겠다는 듯 투덜대는 목소리로 찬혁이 말했다.

"그럼, 계산은 사장님 가게에서 야식 먹는 걸로 받을게요."

"…… 예?"

당혹스러운 제안에 잠시 의문이 담긴 표정을 지은 우상구는 이윽고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했다.

오늘 밤, 당신이 이룬 것을 확인하러 가겠다.

부드러운 언행 속에 숨겨진 비수. 수려한 칼집 속에 제 몸을 감춘 보검의 예기를 느낀 우상구가 표정을 굳힌다.

오늘 밤, 찬혁이 사냥에 나선다.

자격 없는 자를 선별하는 사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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