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91화 (191/403)

191. 주방의 귀인.-1-

참가자의 사후 관리를 전부 박종원 선생님을 비롯한 제작진에게 일임한 뒤, 내 일상은 출연을 결심하기 이전과 비슷한 나날로 돌아왔다.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에게 역으로 일을 넘기고 쉬는 느낌이라 묘한 기분이다. 아니, 이 경우 하청으로 받은 일을 전부 끝낸 셈인가.

내가 만약 진짜 하청업체였다면 원청업체가 준 업무를 마무리 지은 시점에서 그걸로 업무 종료. 다음 하청이 돌아올 때까지 또 어떻게 버티나 전전긍긍하고 있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런 곳과는 꽤 상황이 달랐다.

중소 딱지를 달고 있긴 하나 oem 말고도 꽤 잘 나가는 자체 생산 상품을 가진 중소란 말이지. 이렇게 말하니까 좀 대단해 보이는데.

이러면 그 가게가 내 것도 아닌데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이려나.

'아니, 솔직히 내 지분도 좀 있지 않을까?'

특히 홍보 부문은 내 공이 거의 전부인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홍보팀 팀장 정도는…….

…… 그만두자. 사람이 대목을 앞두니 현실도피가 다 나오네.

골목 레스토랑 촬영이라는 비일상에서 한발 물러나 다시금 일상으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출근도 똑같고, 일하는 건 엇비슷하고.

적어도 일상은 함께 일하는 사람이 최소 둘은 더 있다는 점에서 플러스 포인트일까. 크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첫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판매 메뉴를 개시한 지 어언 일주일. 비로소 이 동네에도 구석구석 크리스마스의 기운이 풍기기 시작했다.

집 쪽은 해봤자 조촐한 트리 하나 보기 힘든 삭막한 겨울철 달동네지만, 적어도 가게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내 쪽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찾아보기 힘든 새벽부터 트리에 감아둔 네온사인이 봐주는 사람도 몇 없는 거리 위에서 열일 중이다.

한때 유럽에서 살았던, 아니. 감각적으로는 오히려 한국보다 유럽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가 보기에 좀 우스운 모양새긴 하다.

프랑스는 가톨릭 신자가 전체 인구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니 가톨릭의 대표적인 축일인 크리스마스를 온 나라가 나서서 기념하는 거야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은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종교를 갖지 않은 무종교인인데 정작 크리스마스 때는 서구권 나라 못지않다.

'정작 옆에 일본은 크리스마스가 빨간 날도 아닌데 말이지.'

나야 뭐 아무래도 좋긴 하지만.

'사람들이 바깥에 많이 나온다'='가게에 오는 고객이 많아진다'라는 루틴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봤자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 가게 같은 백반집을 찾을 사람은 몇 없겠지. 나 같아도 우리 가게보다는 적당한 피자집이나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을 찾겠다.

이건 내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의 내 생활상을 되새겨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인간의 생활패턴이 아니다.

저명한 철학자 니체가 그랬다지,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이는 노예라고. 그럴진대 하루의 반절을 일하며 보내는 나는 대체 무엇일까? 돈의 노예? 아니면 자본주의의 노예? 요즘은 길을 지나다니다 보이는 빨간 양말만 봐도 기립하고 싶어진다.

'반쯤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내가 당초 사장님의 가게에 온 목적은 분명 힐링이었을 텐데…….'

이젠 그냥 물 건너간 것 같다. 별수 있나. 세상에는 빨리 포기해야 이득인 상황도 있는 법이지.

슬슬 체념에서 순응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나는 오늘도 내 일상의 시작을 향해 발을 디뎠다.

***

그렇게 찬혁이 다시 찾아온 반복되는 하루를 시작하는 한편, 누군가는 집 다음으로 익숙한 자신의 공간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비일상적인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우상구의 두 주먹이 비좁은 조리대를 거세게 내리쳤다.

분식집이라고는 하나 나름 식당인 만큼 평범한 가정집에 비교하면 훨씬 넓은 조리대 위는 이리저리 늘어놓은 냄비와 그릇, 볼 등이 난잡하게 뒤섞여 더이상 무언가를 올려놓을 공간도 없었다.

그곳만 난잡하면 다행이다.

화구와 그 주변의 벽에는 벽이 점묘화용 도화지라도 된 것 마냥 크고 작은 붉은 소스 방울이 잔뜩 묻어 있었고, 싱크대는 잘못 건드렸다간 무너질 것 같은 잡동사니의 사탑이 쌓였다. 거기에 더해 그 옆에는 온갖 잡다한 기구가 샤워실에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는 훈련병마냥 오와 열 따위는 가뿐히 무시한 채 난잡하게 도열한 상황.

"이걸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정리하는 데에만 족히 한 시간은 필요하겠지. 우상구는 울상이 된 얼굴로 간신히 그 참상을 외면했다.

뭐가 뭔지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공간. 그 속에서 단 하나 더러워진 곳 없이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물건을 향해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자석 클립으로 벽에 붙인 인쇄물 한 장. 더러워진 부분이라고는 잔뜩 읽느라 손때가 타 거뭇해진 것 외에는 받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그것은 다름 아닌 얼마 전 박종원에게 받은 찬혁의 레시피였다.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긴 하지만 지금의 우상구에게는 그야말로 구명줄과 같은 물건.

그것도 자기 자신만이 아닌, 그가 짊어진 일가족의 생계가 달린 구명줄.

저 레시피를 받은 지 이틀. 우상구는 숙식을 가게에서 해결하다시피 하며 레시피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니 연말이니 하는 소리는 이미 그에게는 자질구레한 일에 불과했다. 다른 가게야 어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 솔루션에 거는 각오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퇴직금에 집 담보 대출까지 땡겨서 연 가게. 이 기회를 제대로 잡고 반등하지 못하면 그와 가족은 빈말이 아니라 그날부로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렇게는 안 돼…… 절대로 안 돼!'

가족 모임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할 수 있다.

신년 해돋이 따위는 매일 뜨는 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한테나 중요한 것이다.

50대 후반에 들어선 이 남자에게는 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고, 지지 않을 오기가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현실의 벽을 맞닥뜨려본 이, 그렇지 않은 이.

우상구는 전자였다.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현실의 벽에 맞닥뜨린 경험이 있다.

그때마다 그는 벽을 피하거나, 뒤돌아서는 길을 택했다.

성적 부족으로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도, 수많은 회사에 지원서를 넣고 떨어질 때도, 온갖 스펙으로 무장한 동기에게 승진으로 뒤처질 때도 그랬다.

재수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2지망을 택했고, 자신의 스펙을 늘리기보다 목표를 낮추는 방법을 골랐고, 상사가 된 동기에게 아부를 떨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이익……!"

하지만 현실의 벽이란 이유와 오기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핸드폰으로 떡볶이 만드는 레시피 따위를 검색하며 기초적인 지식을 익히고, 찬혁의 레시피와 비교해보며 그저 우직하게 만들고 또 만드는 시간.

그가 시험한 조합은 이미 쉰 개에 달해 있었고, 그와 동시에 어색했던 칼질조차 지금은 제법 그럴듯한 모양으로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맞지 않는다.

수많은 조합을 실험했음에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눈을 가리고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서, 정확한 퍼즐의 모양이나 굴곡, 그림 따위는 알 수도 없는 상태로 그저 수많은 퍼즐 조각 중 먼저 맞춘 조각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운 좋게 손에 잡히길 기도하는 작업의 반복.

"이것도 아니야……."

마지막으로 만든 떡볶이를 시식해 봤지만, 찬혁의 레시피대로 만든 것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깔끔하게 혀를 강타하고 목구멍으로 넘어와 개운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여운이 남는 그 신기한 맛. 소스의 일체감. 단맛과 짠맛, 매운맛이 따로 놀지 않는 그 신비함.

그것에 비하면 자신이 만든 떡볶이는 그럭저럭 먹을 만한 값싼 포장마차 떡볶이 수준에 불과했다.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손님상에 나가서 채 반도 사라지지 않는 그때에 비하면 적어도 돈을 써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요리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돈을 써도 딱히 아깝지 않은 요리'가 아니라 '이 돈을 주고 먹기 미안한 요리'였다.

그러나 우상구의 실력과 지식으로는 이 이상 더 나은 결과물을 뽑아내는 건 무리에 가까웠다. 평생 컴퓨터와 숫자, 보고서만 잡고 살아온 그는 산지에 따른 식자재의 차이를 모른다. 품질이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데에 서투르다.

사방에서 엄습하는 허탈감에 자리에 주저앉은 우상구가 한숨을 흘렸다.

"하아……."

이러는 순간에도 다른 참가자들은 점점 과제의 해결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벌써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거 없는 불안감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우상구에게는 방도가 없었다.

울창한 밀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찾아낸 불빛을 향해 걷는 와중, 갑자기 눈앞에 낭떠러지가 나타난 격이다.

불빛은 낭떠러지 건너편에 있다. 그러나 길은 없다. 그렇다고 불빛을 등지자니 며칠 뒤엔 누구도 찾지 못할 밀림 한구석에서 신원미상의 주검이 되어 있을 게 뻔했다.

난생처음 맞닥뜨린 피할 수 없는 벽.

어깨를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에 절로 나온 한탄을 삼킨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저앉아 있기만 해선 답이 없다. 일단 모가 나오든 도가 나오든 던지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우상구는 자신의 등을 떠미는 충동에 몸을 맡기고 가게를 나섰다.

과연 이래도 되는지 의문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절벽 사이를 잇는 다리가 얇은 새끼줄 하나에 간신히 매달린 위태로운 물건이라고 하여도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벽을 외면하고 죽나, 들이박고 죽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지금은 후자를 선택할 때였다.

가게를 나선 우상구가 발을 옮긴다.

그 모습을 말없이 촬영하고 있던 제작진이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 그곳에는 다름 아닌 언젠가 그들이 다녀왔던 배불뚝 백반이 위치한 장소였으니까.

***

바쁘다. 정말 바쁘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백반집이니까.

설마 이런 서구적인 날에 하필 그 선택지를 이쪽으로 돌린 사람이 이토록 많을 줄은 난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고 보는 게 옳다. 나도 희망 정도는 가져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런 희망도 무색하게 오늘 우리 가게 앞에 줄선 고객은 이전보다도 그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 같은 게 아니다. 그냥 많아진 거다.

'거기다 왜 또 저렇게 남녀 조합이 많은 거야…….'

고객에게 이런 말을 해선 안 되지만,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커플 손님은 꺼려지는 부류의 고객이다. 이런저런 이유 중 몇 가지를 고르자면 일단 자리를 차지하는 시간이 길고, 어떤 말썽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거기에 내 개인적인 사심은 없다. 절대로.

…… 아니, 진짜라니까.

아무튼, 그렇게 희망과 절망의 상전이를 실시간으로 겪으며 어디선가 좌우 흑백 곰인형이 우푸푸 하는 웃음과 함께 날 감시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띠링!

"어서 오세요!…… 엉?"

그러던 그때, 주방 일을 하며 홀의 반응은 어떤지 곁눈질 하던 내 눈에 지금 막 들어온 손님의 얼굴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고객의 생김새가 유별나게 눈에 띄는 게 아니면 딱히 신경을 쓰지 않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시선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상구 사장. 이전 제작진에게 받은 각 가게의 영상에서 특히 눈에 밟힌 참가자였다.

1인 식당을 개업하기에는 좀 고령이지 않나 싶은 나이. 거기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경력과 요리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학력 등이 합쳐져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가망이 없으리라 생각한 솔루션 참가자.

'저 사람이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 라고, 다른 때였다면 조금 놀랐을 상황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고? 당연히 내가 준 과제 때문이다.

가게가 여섯에 사람이 열 가까이 된다.

그중 누구 하나는 도움을 바라고 날 찾아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참가자들 중에 가장 먼저 찾아온 게 저 사람일 줄이야…….'

살짝 호기심이 돋는다.

과연 저 사람이 첫 화톳불 정도는 지피고 온 참뉴비일지, 아니면 그마저도 못한 못난이일지.

저 사람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고인물의 심장을 뛰게 만들 수 있을까.

이르게 찾아온 기대감에, 내 얼굴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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