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90화 (190/403)

190. 대리기사.-4-

교육자의 입장에서 과제라는 건 참 좋은 문화다.

적당한 소재와 목적, 그리고 보상을 걸어두면 실에 달아 놓은 미끼를 쫓는 우마처럼 배우는 측에서 알아서 스스로를 조져주니까.

아,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온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뭐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발상은 꽤 나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개인시간을 챙기면서 프로그램에도 간접적인 기여를 하는, 나 류찬혁은 그야말로 워라밸의 화신으로써 다시 태어난 것이다!

"워라밸? 그거 뜻은 알고 하는 소리야?"

밸런스는 어디 개먹이로 줬느냐며 신경 긁는 웃음소리를 내는 주아 녀석에게 잠시 고까운 눈길을 보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녀석도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온다. 이건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다.

'화실에서 하루 20시간씩 그림만 그리다 건초염 직전까지 다녀왔던 녀석이니…….'

인생 열심히 살겠다니 뭐라 하진 않겠지만 몸 건강은 챙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뭐니뭐니 해도 최근 들어 이 집안에서 제일 일에 치이는 사람은 나니까. 거기다 저건 후에 있을 미래 이야기이기도 하고.

"으, 뭐지? 갑자기 오싹한 게 소름 쫙 돋았어. 보일러 잘 틀었는데 어디서 바람 들어오나?"

"창문 잘 막았나 확인 다시 해보던가."

"신문지 잘 개 놨는데. 이상하네."

아마 지금쯤 미래의 주아 녀석이 제발 거기 남아 있으라며 4차원 공간 속에서 책장이라도 두들기고 있는 거 아닐까. 집에 고장 난 손목시계 같은 건 없나 한 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안타깝게도 그런 미래를 지금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가여운 동생은 후줄근한 추리닝으로 가린 팔뚝을 문지르며 아랫목 부근에서 도롱이 벌레처럼 뒹굴거릴 뿐이다.

그 처량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감상하며 나도 나갈 채비를 마저 끝냈다.

"뭐야 어디 가?"

"어. 일하러."

"또? 징하다 진짜. 어떻게 방학인데 집에 있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길어?"

이 나라 학생 평균이지. 대학생일 때의 이야기지만. 고등학생 중에서 나 같은 경우는 극히 특이하다는 걸 나 또한 알기에 그저 씁쓸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 내가 뭐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는구나.'

아마 나중에 TV에서 내 얼굴을 보기라도 한다면 깜짝 놀랄지도.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 주아 녀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것을 기대하며 속사정을 숨기고 답했다.

"안 그래도 나도 지치는 참이었다. 이제 짐 하나는 덜러 가야지."

***

솔루션 참가자들에게 과제를 하달한 다음 날. 박종원과 방우석은 촬영을 시작하기 앞서 그 그 과제를 만든 장본인, 찬혁을 만나기 위해 가까운 카페로 왔다.

'아니, 어찌 보면 이게 오늘의 첫 촬영이로구만.'

그리고 아마 누군가에게는 이번 에피소드의 마지막 촬영이 될 것이다.

마침 그 마지막 촬영을 할 당사자가 약속시간보다 살짝 이르게 도착했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 입구를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찬혁.

그가 카페 한구석에서 몇 없는 고객의 눈길을 끌고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며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촬영지가 가깝잖아요."

물론 촬영지가 가깝다는 게 두 사람의 거주지에서 가깝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걸 알아챈 찬혁이 옅게 웃었다.

찬혁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방우석이 입을 열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저도 요 근처에 사는데요."

안부 확인 겸 간단한 인사가 오간 뒤, 박종원이 앞서 본격적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우선, 이번에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프로그램 진행이 많이 수월해졌습니다."

"뭘요. 크게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아뇨. 대단한 거죠. 직접 연구해서 만든 레시피를 넘겨주셨는데."

"무상으로 드린 것도 아니고, 대가를 받고 드린 거니까요."

"으음…… 솔직히 저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제작진 측에서의 보상이라고 해봐야 썩 대단한 액수는 아니었다. 사실, 어디 가서 그 가격에 메뉴 컨설팅을 의뢰하면 그 자리에서 준 돈으로 싸대기를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 개인에게 주는 보수 치고는 후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적절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보상.

박종원은 꼭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애를 어른이 속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아니, 사실이 그러하니 이토록 마음이 무거운 것이겠지. 박종원은 거듭 정말 괜찮으냐고 물었으나 찬혁 또한 괜찮다는 답만을 되풀이했다.

"어차피 저한테는 그렇게 중요한 레시피가 아니니까요."

아마 더 나은 걸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라며 웃는 찬혁이 방우석은 살짝 두려울 정도였다. 지금도 왜 문을 안 여느냐며 내려간 셔터를 두드리는 시청자 좀비떼를 만들어낸 음식이 그에게는 고작 그 정도 수준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들에게 넘긴 것보다 월등한 레시피를 다시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비용과 수고가 조금 더 들겠지만 어차피 그건 참가자 수준에 맞추어 만든 레시피였으니까.

"그러니까 보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네요."

이제야 속앓이가 멈췄다는 듯 웃는 박종원에게 찬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또한 굉장히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동질감 섞인 웃음이었다.

"저도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종원의 고민은 이로써 해결됐지만, 아직 방우석은 찬혁에게 볼일이 남아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식적인 촬영 종료를 알리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사적인 질문이 한 가지.

"류찬혁 씨의 촬영일정은 그제부로 끝났습니다. 출연료와 영업수익은 저번에 알려주신 계좌로 다음 해 1월 말일에 지급될 예정이고요."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오히려 좋은 장면을 만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관련으로 여쭈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방우석이 말을 이었다.

"참가자들에게 레시피를 주신 건 분명 감사한 일입니다만, 어째서 과제라는 단계를 주신 건가요?"

"잘못한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방송적인 측면에서는 좋은 그림이 나왔어요.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레시피를 그냥 배부하는 게 훨씬 간단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주입식 교육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지식을 주입하듯 규격화된 지식만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그저 레시피를 기억하게 만드는 목적이 전부라면 그냥 처음부터 완성된 레시피를 주는 편이 참가자도, 그리고 그 레시피를 고안한 찬혁이나 그 과정을 감독할 제작진으로서도 훨씬 편할 것이다.

찬혁 또한 그 생각에 동의했다. 만약 누군가에게 그저 레시피를 가르칠 뿐이라면 완성된 레시피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 레시피를 배우는 사람이 단순한 종업원일 경우지.'

아무리 작아도 그들 또한 한 가게를 책임지는 사장이다.

편하게 주어진 것은 쉽게 잊는다. 무언가를 얻을 때 고생을 해봐야 사람은 그것이 소중한 것임을 안다.

레시피 완성을 연구하며 요리 연습이 되리라 예상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찬혁은 그보다도 참가자들이 자신이 준 레시피를 너무 만만히 여기지 않았으면 했다.

전력을 다해 만든 건 아니라지만, 제법 최선을 다해 만든 건 사실이니까.

"과장을 좀 보태면 레시피는 요리사가 피땀 흘려 낳은 자식이니까요. 누구든 자기 자식이 자격 없는 사람한테 가는 건 싫잖아요?"

그 말에 박종원은 격하게 동의했고, 방우석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동질감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레시피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럼 그 사람은 자격이 없는 거죠. 그만한 노력도 못 하는 사람은 요식업이라는 걸 하면 안 돼요."

요식업. 그것도 혼자 운영하는 요식업은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 아닌 이상 반드시 어딘가 하자가 생긴다.

그건 위생일 수도 있고, 맛일 수도 있고, 서비스일 수도 있다.

그중 약간의 문제가 생기는 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현상유지 이상의 무언가를 1년 365일 끊임없이 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고작 요리 한 개를 연구하지 못할 사람이면 성실함 같은 건 안 봐도 뻔하잖아요."

냉정한 언사였다. 그러나 박종원과 방우석 또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그런 자격 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거기다 그 정도면 꽤 쉬운 편이에요."

"쉬운 편이라고요?"

하지만 이 말만큼은 박종원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레시피 연구란 기본적으로 자본과 심력을 크게 소모하는 일이다. 아무리 재료를 전부 알고 있다고 해도 각 재료의 비율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무수히 많아지니까.

그 과정을 '쉽다'는 말로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박종원의 담력은 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찬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진짜 어렵게 할 때는 일부러 재료 몇 개를 안 알려줄 때도 있어요. 핵심 재료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면서 엄청 중요한 재료를 일부러 숨길 때도 있고요."

"그건……."

그렇게 된다면 베테랑 요리사라도 쉬이 해내지 못할 것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다.

찬혁을 향한 두 사람의 시선이 해괴하게 변했다.

'성심고에서는 그런 연습도 시키는 건가…….'

'역시 국내 최고라는 명성을 유지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구나.'

물론 오해였다.

그 정도 난이도의 퍼즐 레시피 풀이는 찬혁이 정말 심술을 부릴 때나 하는 짓이었고, 뭣보다 그때엔 같이 일하며 어깨너머로 관찰이라도 할 수 있었기에 간신히 티끌만 한 가능성이나마 생겼던 거니까.

찬혁이 기억하기로도 그걸 성공한 부하 직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참고로, 찬혁 또한 그 일부 중 하나다.

'애초에 이걸 처음 시작한 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호텔 주방에서 시작한 건 내가 처음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어느 얄미운 셰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찬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튼, 누가 됐든 꼭 성공해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레시피를 만든 보람이 있으니까요."

"아하하, 동감입니다. 저희도 그래야 좋은 장면을 뽑을 수 있거든요."

"거기다 그렇게라도 사장님들이 요리 공부를 좀 해오면 저도 솔루션이 편해지겠네요."

세 사람 사이에 작은 실소가 오갔다.

한 가지 과제로 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니, 그야말로 1석 3조. 공리주의적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웃었을까.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점에 방우석은 찬혁에게 물었다.

"슬슬 일어나볼까 하는데, 혹시 이후에 볼일 없으시면 식사라도 함께 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아, 죄송합니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고민하는 낌새도 없이 튀어나온 찬혁의 거절에 방우석의 얼굴 위로 아쉬움이 스쳤으나, 그 또한 이어진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금 이따가 가게 출근해야 하거든요. 요즘 워낙 바빠서."

"아……."

류찬혁. 참으로 쉴 새 없이 일한다는 말의 모범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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