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눈높이 선생님.-1-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새까만 밤하늘 위로 저 거리의 화려한 조명만큼이나 밝은 빛을 흩뿌리는 둥그런 달이 떠오를 때쯤이 돼서야 박종원과 방우석은 배불뚝 백반을 나섰다.
들어갈 때와 비교하면 확연히 어두워진 달밤 아래 선 두 남자의 얼굴엔 전혀 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박종원의 얼굴에는 어딘가 만족감 어린 웃음이. 반대로 방우석의 얼굴에는 불만과 불신, 그리고 아리송함이 골고루 섞인 애매모호 한 표정이.
누가 보면 서로 도박으로 승부라도 낸 것 마냥 희비가 극명히 갈리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근무시간이 불규칙한 연예계에 몸을 담은 이들이라고 해도 사회적 통념과 상식을 따졌을 때 분명 일정한 선을 넘어선 시각. 아무리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진 이라고 해도 얼굴이 찡그려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그들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일 때문' 이라는 표현은 들어맞는다고 하는 것이 좋을까.
헤어질 장소로 향하는 길, 여태껏 홀로 고뇌에 빠져 있던 방우석이 박종원에게 질문을 건넸다.
"저기, 박종원 씨. 정말 이걸로 된 건가요?"
"뭐가요?"
"방금 그 류찬혁 학생 말입니다. 확답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대로, 찬혁이 그들의 제안에 돌려준 대답은 보류였다. 정확히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답변.
제법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성사된 만남에서 제대로 된 수확도 얻지 못했고, 거기에 더불어 새해가 밝은 후 가장 첫 번째 신장 에피소드로 방영될 이번 촬영의 성패가 생판 처음 보는 어린 학생에게 달렸다는 것 또한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였다.
'애당초 출연 제의는 박종원 씨가 설득해서 하게 된 거고…….'
그런 와중에 박종원은 저토록 웃고만 있으니, 사람 속도 모른다고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방우석의 그런 걱정을 박종원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무리 연기자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가는 중역. 시청자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불확실한 요소를 줄여나가도 모자랄 판에 하나를 더 늘린 셈이 되지 않았는가.
방우석의 걱정은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갖췄다고 해도 결국은 학생. 이미 충분히 뛰어난 지식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과연 학생이 나서서 뭔가 할 틈이나 있을까?
"그건 걱정 마세요."
방우석의 의심 섞인 물음에 박종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생각이지만, 만약 저와 류찬혁 학생을 비교하면 요리를 잘하는 쪽은 류찬혁 학생일 거예요."
"예? 에이, 설마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하는 방우석이었으나 박종원의 생각은 변치 않았다.
요리에 대한 지식은 뛰어난 박종원이지만 그게 곧 요리 실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박종원은 요리 또한 수준급이라고 하나 초일류 셰프와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박종원 자신이다.
"안영길 선생님과 저. 둘 중 누가 요리를 잘 하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안영길 선생님을 꼽지 않겠어요?"
"그건……."
방우석은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흔들리려던 고개를 세우고 박종원을 바라봤다.
"그럼 박종원 씨가 생각하시기에 그 학생이 안영길 어르신만 한 솜씨를 갖고 있다는……?"
"에이, 그건 아니고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박종원.
성심고의 교장인 안영길의 위상은 국내 요식업계에서는 범접할 이가 없다. 그가 실질적으로 은퇴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에 비견될만한 요리사는 없다는 게 세간의 평가니까.
'하지만…….'
어쩌면, 드디어 그 아성을 넘어설 인재가 드디어 나왔을지도.
저 나이에 다른 곳도 아닌 푸드 엑스포에서 선전한 것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안영길과 함께 출전했다곤 하나 그 혼자만의 힘으로 다른 경쟁자를 제칠 수 있을 만큼 푸드 엑스포는 녹록한 무대가 아니다.
"그리고 뭣보다 류찬혁 학생한테는 저나 안영길 선생님하고는 다른 재능이 있거든요."
호텔이나 고급 식당의 요리와 서민식당의 요리는 다르다. 인력의 차이, 재료의 차이, 시간의 차이.
그 모든 것에서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들어가는 자본의 규모가 다르니까.
어느 한쪽에 특출난 사람은 다른 방면에서는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이건 박종원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자신은 요리사라기보다는 요리 연구가, 사업가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이고.
그러나 찬혁은 뭔가 달랐다.
두 부류를 구분하여 요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나이대의 학생에게는 어려운 일이고, 거기에 더해 그 전부를 일류 이상의 솜씨로 해내는 건 불가능의 영역이다.
방우석은 박종원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 나름대로 길러온 요리 프로그램 PD의 짬밥을 십분 활용하여 어떻게든 이해해냈다.
"대단한 학생이네요……."
"그렇죠. 참, 난 그 나이에 뭘 했는지 몰라. 나오기만 하면 분명 확 뜰 텐데."
"출연제의를 승낙해주면 좋겠네요."
"분명 해줄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요. 이제 류찬혁 학생한테 어떤 역할을 맡기면 좋을지나 생각해 봅시다."
방우석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박종원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장담했다.
"안 하고는 못 배길걸요. 이득을 잘 재는 타입이거든, 나처럼."
***
"씁, 하기 싫은데……."
가게를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한 뒤, 나는 청소가 끝난 홀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골목 레스토랑이란 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정말 하기 싫은 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좋은 기회인 건 사실이다. 골목 레스토랑이 무슨 이름 없는 프로도 아니고 평균 시청률 6%, 최고 시청률은 10% 이상을 뽑았던 쟁쟁한 프로그램이다.
'당연히 저번 대회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겠지…….'
부산에서 열린 대회의 방송은 케이블 채널 특집이었다. 최근 들어 인터넷 방송이나 케이블 채널의 득세로 지상파의 영향력이 많이 죽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상파는 지상파다. 시청자의 유입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런 곳에서 얼굴을 한 번 비춰주면 득이 됐든 실이 됐든 이름값은 올라가고도 남는다.
"그래도 말이지……."
문제는 내가 지금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람이다 이거야.
손님은 맨날 오픈부터 마감까지 만석+웨이팅 10미터. 아니, 요즘 들어 마감시간까지 한 기억이 별로 없는 거 실화냐? 매번 마감시간이 되기 전에 재료가 싹 떨어진다.
'덕분에 짐 옮기느라 웨이트 안 해도 되겠어.'
맨날 박스로 데드를 돌리는데 3대가 대수냐 지금.
아무튼, 나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바빠 죽을 지경이다. 촬영은 일주일에 한두 번. 소요시간은 아직 예상치가 안 나왔지만 골목 레스토랑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보통 10시간은 잡아먹겠지.
사실, 휴일에 맞춰서 촬영을 한다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아니라 가게다.
안 그래도 사장님이 종업원을 한 명 더 뽑으려 해도 연말에 사람이 없어서 안 뽑히는 시국이다. 여기다 내가 방송 나간다고 나가서 손님이 더 붙기라도 해봐라. 그땐 진짜 헬게이트 오픈이지.
알바로 방학 때 노는 학생이나 적당히 골라잡으면 될 것 같기도 하겠지만, 이게 몇 명 불러봤더니 면접도 하기 전에 웨이팅 손님에 질려서 그냥 가버린 사람이 반, 반나절 정도 일하다가 지쳐서 다음날 안 나온 사람이 반이다.
에라이 썩어빠질 놈들. 라떼는 말이야, 어! 온몸에 근육통이 와서 바로 쓰러질 것 같아도 일 나오고 그랬어! 쯧쯧, 하여튼 요즘 놈들은.
…… 뭐, 온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의 나보다야 나이가 더 많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함부로 얼굴 내비치기가 힘든 실정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그냥 제안을 고사하자니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찾아올지 의문일 기회를 놓치기가 아깝고, 거기에 더해 골목 레스토랑의 촬영 진행이 어려워질 것도 생각하면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흠……."
"젊은 놈이 뭘 한숨을 쉬고 있어. 복 나간다 이놈아."
오도 가도 못할 상황에 한숨을 내쉬던 찰나, 이제야 주방에서 나온 사장님이 퉁명스런 말투로 나를 나무랐다. 아니, 이게 누구 때문인데 진짜.
…… 나 때문인가?
어쨌든, 내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는 사장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사장님. 얼굴 한 번 안 비치시더니 이제야 다 끝나셨어요?"
"끝나긴 한참 전에 끝났지."
"근데 왜 안 나오신 거예요?"
"땀나서 꼴이 말이 아니잖냐. 그 꼴로 누구 앞에 서리?"
하긴, 손이 느린 분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했다.
"평소에는 무슨 깔끔 떠는 것처럼 구시네요."
"말버릇 봐라. 어, 내가 평소에 얼마나 위생을 챙기는데!"
"주방위생이 개인청결은 아니잖아요."
"손 잘 닦고 땀 안 흐르게 잘 매고 있으면 그게 개인청결이지!"
그건 맞는 말이긴 하네.
"하여튼, 그래. 저 사람들은 어쩌다 왔대? 우리 가게 TV라도 내보내준다디?"
"가게 말고, 저요."
"뭐? 왜 너만!"
사장님은 가게가 TV에 노출되지 않는 게 불만인지 잔뜩 입술을 삐죽였다.
나이가 50줄에 가까워지는 아저씨가 저러니까 정말 보기 싫은 광경인데.라고 말했다간 경을 치실 테니 일단 가만히 있자.
"왜, 저 부산에서 요리대회 나갔던 거 아시죠?"
"어, 알지. 그러고 보니 대회 심사위원이 박종원이던가?"
"네. 그때 좀 인연이 생겼는데 우연찮게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야, 거 참. 일부러 그렇게 만나기도 힘들 텐데."
보면 세상에 연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 같다며 사장님이 감탄한다.
나도 동감이다. 우연이 대체 몇 번을 겹쳐 일어난 건지 원. 매번 누군가의 농간이니 뭐니 하지만 의외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가게?"
"고민 중이에요."
"뭔 고민? 야, 찬혁아. 세상이라는 건 유명해져서 손해 볼 것도 많지만, 득에 비하면 의외로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건 바로 나가야지."
말 한 번 쉽게 하신다. 내가 왜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게다가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시는 건가. 손익을 따지면 나가는 게 무조건 이득이라는 건 맞는 말이겠지만.
"나가도 되겠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네 인생이다.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나는 조언을 좀 줄 뿐이고."
넌 어쩌고 싶냐는 듯 눈길을 향하는 사장님을 보며 나도 마음을 굳혔다. 그래, 어그로 좀 빡세게 끈 다음 월급에 보너스까지 빠방하게 챙기는 게 나을지도.
"…… 후읍. 좋아요. 나갈래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아, 우리 가게 홍보 잊지 말고."
"알겠어요. 대신 보너스 좀 잘 챙겨주세요."
"안 그래도 연말 보너스 봉투 잘 챙겨놓고 있으니까 걱정 마라. 아니 근데, 듣자 하니 상금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면서. 어린놈이 벌써 돈독이 올라가지곤."
"돈은 다다익선이라고 한 건 사장님이잖아요. 아무튼 각오해요. 지금보다 두 배는 바빠질 것 같으니까."
"세 배, 네 배가 바빠져도 얼마든 환영이다."
그럼 이 가게가 못 버티지 않을까.
자신감 가득한 사장님의 웃음을 보며 나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젠장, 대체 내 힐링은 어디로 간 건지.
속으로 한탄을 곱씹으며, 나는 아까 받은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다음날 아침. 정기휴일인 가게를 뒤로하고 미팅 장소를 찾았다.
이 동네에서 미팅이라고 해봐야 몇 곳 없는 카페가 전부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는 눈은 얼마 없어서 다행일까.
"우선, 긍정적인 결정에 감사합니다."
"아, 옙."
미팅 장소에 나온 이는 방우석 PD 혼자였다. 하긴, 박종원 선생님까지 함께였다면 보는 눈 신경 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을 터다.
방우석 PD가 건네준 계약서를 일단 꼼꼼히 따졌다.
시간당 페이나 계약 조건 같은 건 내가 아는 바가 없어서 봐도 이해를 할 순 없었지만, 회귀 전에 봤던 다른 계약서와 비교해도 딱히 문제 되는 조항은 없었다.
그럼 이제 다음 문제를 봐야 할 차례다.
"저, 그럼 제가 할 일은 뭔가요?"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방송에 나가는 건 좋다 치지만, 나가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작업 처음 나온 이등병마냥 멀뚱멀뚱 서 있을 순 없으니까.
그 질문에, 방우석 PD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답했다.
"크게 나눠서 두 가지 장면을 촬영하려 합니다."
"두 가지 장면이요?"
"네. 하나는 먼저 시청자 여러분께 실력을 보여드리기 위해 저번에 만났던 가게에서 일하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입니다."
"허어."
이건 사장님이 반길 소리구만.
그럼 두 번째는?
"그리고 또 하나는, 대리 운영입니다."
"대리…… 운영이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그가 말을 잇는다.
"예. 솔루션 참가자의 가게를 잠시 대리로 맡아서, 실제로 업무를 해주시면 됩니다."
"…… 어, 그건 즉……."
이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실력의 차이를 보여주라고.
"예, 바로 그겁니다."
방우석 PD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대충 알겠다. 이 사람, 제법 성격이 못돼먹은 양반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마주 보는 내 입에도, 비슷한 종류의 미소가 맺히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