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80화 (180/403)

180. 네거티브 힐링.-1-

한국은 예로부터 4계절이 뚜렷한 나라로 잘 알려져 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계절을 오감으로 느끼다 보면 머리로는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던 시간이 어느새 이토록 빨리 지났는지 의구심마저 든다.

"으으, 몇 달 전만 해도 더럽게 더웠는데 이젠 징하게 춥네."

"그러니까 말이다. 아 씁, 춥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대체 어느새 이토록 시간이 흘렀는지, 한때 낙엽이 쌓여 바람만 불었다 하면 온천지 사방에서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소리가 울리던 가로수길은 지금 와선 황량한 청백색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이불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아 하는 직장인과 학생마냥 늦장을 부리는 태양 탓인지, 오늘따라 학교로 가는 길목은 새벽녘 빛깔의 옷을 유독 두껍게 껴입은 듯 보인다.

"아, 사계절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좀 봄, 가을 정도만 딱 있으면 좋겠어."

패딩을 입고도 어깨를 벌벌 떠는 김철정의 말에 나도 소리 없는 웃음으로 동의했다.

"으, 어른 되면 좀 나아지려나."

"오히려 심해질걸."

특히 녀석과 나 같은 신체 건강한 남자에게 계절이란 증오하지 않을 수 없는 개념이니까.

"뭔 소리야?"

"곧 알게 돼."

어차피 5년도 남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 녀석을 재촉하며 발길을 서둘렀다. 바깥에서 쓸데없이 수다나 떨고 있기엔 얼굴이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다.

기숙사와 학교를 잇는 도보를 걷다 보면 이제 제법 익숙해진 얼굴을 많이 볼 수 있다. 같은 통학로를 1년이나 쓰다 보면 누구든 익숙해지는 법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 오늘도 어김없이 남녀 기숙사를 가르는 갈림길 앞에서 보였다.

"저 오네. 마, 빨리 안 다니나? 추워 디지겠다."

"좋은 아침."

누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같은 반 최장단 듀오는 오늘도 여전한 모습이다.

"미안. 얘가 아침부터 물 차갑다고 안 씻으려 해서 씻기고 왔지."

"니는 뭐 괭이 새끼가. 잘 좀 씻고 다녀라."

"아니 근데 솔직히 양심적으로 아침 화장실 더럽게 춥단 말이야."

"그렇다고 안 씻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씻었다고 좀!"

시답잖은 대화가 오가는 등굣길 위로 킬킬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겨울이 깊어지는 12월 중순의 아침 풍경이었다.

***

"기말고사 채점이 끝났습니다."

조례시간을 여는 박예휘 선생님의 첫마디.

이 순간이 오리라는 걸 당연히 아이들 또한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점수라는 건 언제나 가슴을 졸이게 하는 법이다.

"점수는 저번과 같이 학부모님들 전용 앱으로 개인별 통지될 예정이에요. 혹시 기간 내로 확인이 안 될 경우 전화가 갈 수 있으니 유의하고요."

최근 가정통신문 같은 전달사항은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스마트폰 앱으로 송신된다. 종이 낭비도 줄이고, 혹시 모를 분실 같은 사태를 예방할 수도 있으니 기술 발전의 미래(희망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수 없다.

'애들한테는 어떨지 몰라도 말이야.'

더 이상 뭘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가 없게 됐으니, 소통의 창구가 너무 활짝 열리는 것도 요맘 때의 아이들에게는 버거운 일인 듯싶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감출 게 딱히 없어서."

"그래 너 잘났다."

이번 시험은 유난히 죽쒀서 아버지한테 들키면 죽는다고 호들갑을 떠는 김철정. 하긴, 나도 한창 저 아래에서 놀던 때에는 어머니 속을 적잖게 썩였지.

그때를 되새기면 입가에 저절로 쓴웃음이 떠오른다. 질풍노도의 시기란 말이 딱 맞는다.

아무튼, 비단 김철정만이 그런 심정인 건 아닌지 점수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끓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박예휘 선생님이 아니다.

"조용, 조용."

교탁을 두드리자마자 다시 정숙을 되찾는 아이들을 작게 한숨을 섞어 바라본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걱정이면 다들 처음부터 잘 하면 되잖아요."

말이 쉽지,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주문이다. 물론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듣고 살았다는 선생님에게는 그런 아이들을 이해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곧 있으면 겨울방학입니다. 다들 일찌감치 방학 계획서를 짜두는 게 좋아요. 고등학교 시절은 긴 것 같아도 생각보다 금방 갑니다.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네에."

"오늘 조례는 끝입니다. 시험 끝났다고 너무 말썽 피우진 마세요."

활기를 되찾은 아이들의 힘찬 대답에 웃음으로 화답한 선생님이 교실을 나서고, 1교시를 앞둔 쉬는 시간을 이용해 아이들이 끼리끼리 뭉쳤다. 물론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나, 김철정, 양희연, 나현주. 여느 때처럼 모인 4인방 사이에서 김철정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는 겨울방학 때 어떻게 할 거냐?"

"방학? 공부해야지."

"…… 거 인생을 무슨 1회차 게임하는 것처럼 열정적이게 사냐. 그런 거 말고."

"학생이 공부 말고 뭘 한다고."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뭔 이상한 사람 보는 것 마냥 보고 있어.

"그거 말고. 겨울방학 때 뭐 계획 없어? 여행이나 그런 거."

"딱히?"

"내도 뭐 할 게 있나 싶은데. 또 할무이나 보고 오나 싶다."

"겨울은, 추워서 조깅 하기 힘들어."

"너는 진짜 생각이 그쪽으로만 가는구나."

새삼 놀랄 것도 없다며 허탈한 표정을 한 김철정이 말을 이었다.

"그럼 방학 현장학습은? 어디 갈 곳 있어?"

"내는 일본에서 할라카는데."

"와, 노는 물 글로벌하네. 나현주 넌?"

"나는 이번에 집 근처에 신장개업한 바비큐 집. 아빠가 당분간 직접 맡으신대."

"호…… 좀 부럽다. 나는 또 집에서 할 것 같은데."

김철정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애들까지 확실히 일정을 잡아뒀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아직 시간에 여유가 제법 있는 만큼 천천히 고를 줄 알았는데 말이지.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은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게로 향했다. 의도치 않게 마지막 순서가 되긴 했지만, 아쉽게도 난 딱히 특별한 계획은 없다.

"이번에는 조금 느긋하게 하려고."

"느긋하게?"

"뭔 소리고?"

아무래도 올해는 너무 일에 치이면서 살았다. 대회반 의무도 그렇고, 엑스포도 그렇고, 그 외에도 사건사고가 너무 다양했더랬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이 같은 해에 대여섯 번을 넘게 터지면 아무리 무쇠체력이어도 정신이 먼저 나가떨어진다. 그러니 이번 겨울은 나만의 작은 가게에서 적당히 힐링하며 느긋한 식당일을 즐겨볼 생각이다.

…… 식당에서 일하는 데에 느긋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지 어떨지는 둘째 치더라도.

"흐음…… 뭐, 그건 자기 마음이긴 하지."

"생각해놓은 식당은 있고?"

"어. 집 근처에 하나."

"근데 너무 작은 곳에서 하면 점수 적게 나오지 않아?"

"그거야 뭐……."

어차피 나 같은 경우에는 다음 해까지 써도 남을 만큼 실기점수가 어마어마하게 쌓였다. 고작 겨울방학 한 번 편하게 쉬어간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 뭣하면 자격증 취득해서 채우면 되니까."

"…… 자격증을 아직도 안 땄어?"

"어."

시간이 없었거든.

다시 한번 이상한 놈 쳐다보듯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녀석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 요리 배운 지 이제 막 1년하고도 반이 채 안 된 사람이다.

***

그로부터 약 몇 주의 시간이 흐르고.

거리에 점점 겨울 분위기를 내는 소품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밝게 치장한 크리스마스 트리나 싸구려 코팅지로 장식한 형형색색의 방울, 빨간 털가죽에 하얀 솜뭉치를 단 양말 따위가 아직 오지도 않은 크리스마스를 앞당겨 축하했고, 오가는 손님을 불러 모으기 위해 문 바깥에 설치된 스피커는 어느 가수의 30년 어치 겨울 연금을 책임지는 캐럴을 신나게 틀고 있었다.

이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시기.

그런 근래에 인터넷에선 어떤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산타 귀신이나 눈사람 귀신 마냥, 시기를 잘 탄 괴담처럼 순식간에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나 중고거래 앱 등을 매개로 퍼진 소문.

그 소문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와, 우리 동네 식당 수준 실화냐?」

처음에는 단순한 게시판 하나에서 반짝 뜬 것에 불과한 그 글의 내용에는 잡다한 음식 사진 몇 개가 내걸렸을 뿐이었다.

다만, 그 수준이 남달랐을 뿐.

그야말로 영혼이 담긴 필력으로 맛있다는 소감만을 표현해낸 글과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음식의 모양새에 금세 인기 게시물의 자리에 오른 글의 첫 출발은 그리 좋지 못했다.

─사진 너무 고퀄인데. 폰카가 저렇게 좋게 나오나?

─글도 그렇고 수상함. 바이럴 아님?

─이런 식당은 일단 우리 동네에 없음. 아ㅋㅋㅋㅋ

─새벽에 기만글 쓰지 말라고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바이럴 광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퀄리티 높은 사진과 글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투력 높은 인터넷 민족들답게 글 내부에서 바이럴이다 아니다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그것을 계기로 다시 한번 인지도가 상승하여 다른 커뮤니티에까지 퍼진 글은 얼마 안가 직접 다녀와 보겠다는 사람마저 생겨났고,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야 그 식당 찐인데? 그 가격에서 나올 수 있는 맛이 아니야. 예전에 갔던 호텔 뷔페보다 더 맛있는 것 같음.

─에이 오바 좀 치지 마라. 꼴랑 만 원짜리 밥이 무슨 호텔 뷔페랑 맞먹어. 호텔 뷔페에서 먹어본 적은 있냐?

─진짜라니까?

─나도 다녀왔는데 찐이야. 난 호텔 뷔페는 30 평생 가본 적도 없어서 모르겠는데 살면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긴 했음. 이등병 혹한기 때 먹은 라면 급이었어.

─와; 그건 ㄹㅇ 찐인데.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인증글. 대체 무엇이 그토록 그들의 원동력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에선 시시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바이럴이라는 측과 아니라는 측의 공방이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한 그때, 만인의 이목을 더더욱 집중시키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논란의 그 식당이 맛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feat바이럴충 입닥해라」

어그로의 집대성 그 자체인 제목이 붙은 글의 내용은 단 한 장의 사진, 그리고 단 한 줄의 문장이 전부였으나, 그 누구도 감히 그 글에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에서 주최한 요리대회 우승만 두 번에 푸드 엑스포에서 동상 탄 사람이 만들었는데 맛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ㅋㅋㅋㅋㅋ

논란의 게시글에 담긴 사진 속에는, 주방에 서서 어딘가 경직된 웃음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 혹은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은 금방 그 인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올해 국내에서 열린 굵직한 대회에만 두 번을 출전해 전부 우승한, 그리고 한때 '그 학교의 진상 처리법.gif' 따위의 제목으로 인터넷을 떠돌던 영상의 주인공.

무엇을 숨길까. 그 인물의 정체란 다름 아닌 찬혁이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식당은 바로 찬혁이 겨울 아르바이트를 하던 박춘배의 식당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맞아서 시즌한정 메뉴도 판다던데?

─시즌한정? 뭔데?

─가서 들었는데 양식 홈파티 느낌 나는 메뉴래.

─백반집에서? 에이 설마.

─진짜야. 특기가 양식이라고 직접 메뉴 짜서 준비했대.

─쟤 한식이랑 일식으로 대회 우승하지 않았었음? 근데 특기는 양식이야?

─실화? 진짜 사는 세계가 다르구나. 저래야 성심고 다니나.

─내가 성심고 다니는데 쟤가 이상한 거임.

─아ㅋㅋㅋㅋ내일 간다ㅋㅋㅋ가게 메뉴 다뒤졌다ㅋㅋㅋㅋ

─메뉴판 딱대!

인간이란 유행에 약한 생물이다. 그건 2020년 한해가 끝나가는 이날에도 변치 않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기세가 꺾인 바이럴 파의 주장을 딛고 일어선 유행의 물살은, 그대로 해일이 되어 박춘배의 가게를 덮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피할 곳도 없이 그 기세를 한 몸에 받을 처지로 몰락한 찬혁이 자리하고 있었다.

"…… 내 힐링은 대체……."

하루가 다르게 고되지는 업무에 시달리며 오늘도 힘겹게 잠을 청하던 찬혁은,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두드리다 알게 된 현실 앞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한탄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한해 최고의 대목.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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