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컴플레인 액시던트.-3-
길고도 길었던 축제 가설식당의 공식적인 업무가 모두 끝을 맞이한 뒤, 교장 선생님이 내게 주신 봉투의 내용물은 단 한 장의 오류도 없이 공평하게 각 팀원에게 배부되었다.
"이게 여러분의 사흘 치 봉급입니다."
"뭐예요. 돌려줘요."
"그래. 자, 받아."
"이걸 주네."
'…… 라고 설명하면 되게 간단하게 보이긴 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그리 녹록한 일이 못 되었다. 아마 열기만 보면 그 이상이지 않았을까.
처음에 받았을 때는 돈이라고 생각했던 두꺼운 봉투의 내용물. 그 정체는 사실 같은 무게의 지폐보다도 훨씬 고가의 부상이었던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러했다.
"백화점 상품권? 시, 십 만원?! 뭐가 이렇게 많아?!"
"인 당 한 장씩이야. 일단 나누고 있어봐."
"아직 뭐가 더 남아 있는데…… 뭐야 이거. 식사권?…… 화랑 호텔 뷔페 식사권이잖아?! 것도 가족단위 식사권이야!"
"그거 말고 다른 호텔이나 레스토랑 것도 있어. 학교 스폰서 기업이 준 거라니까 이거저거 많을 거야."
정리하자면 백화점 상품권 10만원권과 다양한 고급 식당의 식사권.
백화점 상품권이야 그렇다 쳐도 최고급 레스토랑의 인당 비용이 최소 0이 5개는 붙는다는 걸 생각하면 가족단위 식사권은 엄청난 가치를 가진 물건이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그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차라리 좀 몰랐으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랬으면 그 난리도 나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리 스폰 기업에서 내어준 물건이래도 수량의 한도는 있는 법이어서, 각자에게 한 장씩 돌아갈 만큼의 총량은 있었지만 인기 있는 식당의 경우에는 그곳을 원하는 이들에 비해 식사권이 확연히 부족했다.
부족한 물량을 차지하기 위해 시작된 쟁탈전은 그야말로 난투극이나 다름없었다. 피로 피를 씻는 무자비하고도 비인간적인 전투…….
"가위……!"
"바위……!"
"보!""보!"
"무, 무승부!"
"또 무승부야! 벌써 17번 연속 무승부라고!"
"저 정도면 기네스북 등재 수준 아니냐?"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다……."
같은 일은 사실 딱히 없었지만. 17번 연속 무승부는 좀 비인간적이긴 한가?
아무튼, 교장 선생님이 주신 물건을 배부하는 겸 우리는 주방, 홀, 도움 인력 가릴 것 없이 뒤풀이 모드에 들어갔다.
배달음식에 과자에 음료수까지. 전화가 닿는 대로 왕창 시켜서 놀고먹었다. 중간중간 미니게임으로 식사권을 가져갈 인원을 고르면서.
요즘 물가가 장난이 아닌지라 제법 돈이 나가긴 했지만, 모두가 함께 모은 돈과, 덤으로 자진해서 추가금을 납부한 아이들의 돈을 합치니 얼추 정리가 됐다.
그럴 거면 그냥 만들어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야. 요리사가 왜 자기 밥을 만들어 먹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지극히 정상적인 발언을 소신껏 했을 뿐이다.
'뭣보다…….'
"백예은 선수! 세 번째 치킨박스 클리어! 네 번째를 뜯습니다!"
"아아, 그에 반해 여준기 선수는 두 번째 박스가 끝나갈 때부터 손이 점점 느려졌는데요. 이제 한계인가요?"
"말씀드리는 순간 백예은 선수, 치킨 네 마리를 클리어! 다음 순서인 피자로 손을 뻗습니다!"
"괴물입니다! 정말로 괴물 그 자체인 선수예요!"
난 싫다. 죽어도 싫다. 저걸 누구보고 감당하라고 직접 요리를 해먹이겠는가.
뭐, 그런 느낌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잠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아침은 오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도 해는 지는 법.
코앞까지 다가온 하교시간. 후련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심정으로 우리는 나름대로 미운 정이 든 가설식당을 뒤로 했다.
"사흘간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쪽이야말로 덕분에 많이 배웠어."
사흘이라는 시간. 고작해야 72시간. 실질적으로 함께한 시간은 그 반도 되지 않지만, 사람 사이의 신뢰를 싹트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진즉 저문 태양의 자리를 가로등이 대신하는 교문 앞에 선 우리는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유리 팀장님."
"이제 일도 끝났으니까 그렇게 안 불러도 되는데."
"이쪽이 벌써 입에 익어 버렸네요."
뭣보다 이거 말고 나은 호칭이 생각 안 나기도 하고.
"그럼 누나라고 부르는 건 어때?"
"그건 좀."
비슷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다음에 또 봬요."
"그러고 싶네. 아마 내가 학생일 때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만."
그러고 보면 인력지원은 2학년까지만 온다고 했던가. 내년에 또 축제가 열리더라도 3학년이 됐을 그녀를 다시 보긴 힘들 것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꼭 다시 봤으면 하네. 유능한 인재는 같이 일하기만 해도 편하니까."
"동감입니다."
"사회에서 보려면 나도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넌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됐을 것 같거든.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과찬이시네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요."
"그건 네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거야. 어쨌든, 힘들긴 했어도 재밌었어."
그렇게 말한 하유리 팀장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교문 너머로 떠나갔다. 일할 때도 그랬지만 굉장히 쿨내가 진동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를 따라 손인사를 건네며 다함께 떠나가는 관광고 학생들. 대회반의 대표로서 대열의 선두에 서서 배웅하던 그때, 관광고 쪽 대열 가장 후미에 붙어 있던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저기!"
"음?"
김서령. 아까 낮에 있던 컴플레인 사태의 피해자였던 여자아이다. 아이라고 해도 같은 학년이지만. 심정적으로 그랬다.
"아, 아깐 정말 감사합니다. 류찬혁 셰프!"
"아니 뭘. 감사할 것 까지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상투적인 감상이지만, 그게 사실이라 어쩔 수가 없다.
"내년에도 꼭! 다시 뵀으면 좋겠어요!"
"어…… 예. 저도요."
아무리 아직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그녀 또한 그쪽 학교에서 고르고 골라 보낸 인재 중 하나. 업무에 굉장한 도움이 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면학에 힘쓰면 지금보다 훨씬 성장할 터. 그런 사람이 인력지원을 와준다면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
내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김서령은 꽃이 만개하는 것 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몇 차례나 거듭 고개를 숙이고는 저만치 떨어진 일행을 황급히 쫓았다.
"우리 팀장 능력 좋네."
"뭐?"
"와, 시치미 떼는 거 봐."
"뭔 소리야. 치워. 무거워."
쉰소리를 하며 어깨동무를 해오는 여준기의 팔을 대충 밀어내곤 크게 심호흡 했다.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대체로 잘 끝난 편이리라.
"우리도 이만 해산! 주말 푹 쉬고 다음 주에 보자."
이것으로 공식, 비공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일정이 막을 내렸다.
"아, 지친다."
정했다. 이번 주말은 온전히 휴식에만 집중하기로.
평소 월화수목금금금 같은 대학원생이나 프로그래머나 할법한 일정을 소화해왔지만, 이번 주만큼은 그 루틴을 잠시 손에서 놓자.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결의했다.
***
"뭐해?"
"반성문 쓴다."
물론, 그 결의가 현실로 실행되는 일은 없었다. 아아, 나는 슬프다. 선생님은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뭐야. 뭐 잘못했어?"
"…… 어, 조금."
뒤이은 김철정의 질문에 뜨끔거린 심정을 감춘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하긴 했지.
이것도 다 업보다. 내가 거기서 숙이고 들어갔으면 굳이 이런 걸 쓸 필요도 없을 테니까. 원망은 한다. 주로 과거의 나를.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뭔 잘못을 했다고 반성문을 다 쓰냐."
우리 학교에서 반성문까지 써서 제출하는 경우는 제법 희귀한 일에 속한다. 그만한 말썽을 부릴 만큼 한가한 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말썽을 부릴 힘이 남은 녀석들은 진즉 전학 간 지 오래고.
"아, 그러고 보니 너네 식당에서 누가 손님이랑 싸웠다더니, 설마 너였냐?"
"어."
"이야. 이거 된 놈일세. 식당 금기를 화끈하게 깨버렸어."
네가 그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다며 실실 웃는 김철정의 표정이 살짝 열 받는다. 맞는 말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나마 교장 선생님한테 걸려서 반성문으로 끝났지."
담임 선생님한테 걸렸다면 정말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괜히 사탄의 아가리가 아니라니까.
"야. 너네 가게에서 싸움난 걸 내가 왜 아는지 알아?"
"…… 아, 설마."
"담임 선생님이 알려주셨거든."
"실화냐……."
세상에 맙소사. 원체 월요병과는 연이 없던 이 몸에 순식간에 월요병 바이러스가 퍼지는 게 느껴졌다. 왜 시간은 흐르는 걸까. 그냥 깔끔하게 멈춰주면 안 되나.
"후……."
그래, 현실도피는 이쯤 하자. 이런 와중에도 내 손은 거의 기계적으로 내 나름의 허례허식이 가득한 장문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반성문에 기계적이라는 표현은 좀……."
김철정이 타당한 지적을 해왔지만, 괜찮다. 실수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반성은 하지 않는다.
"그럼 반성문이 무슨 소용이냐."
"다음번엔 조금 더 자제하겠다는 자신을 위한 약속이지."
안 그래도 쉴 시간도 부족한 때에 반성문이나 적는 신세는 두 번 다시 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그런 약소한 이유라도 있으니 글을 쓰는 손이 멈추지 않는 거다.
잠시 후, 사유와 사죄, 반성이라는 삼박자를 두루 갖춘, 내가 봐도 훌륭하다고 자화자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퀄리티의 반성문이 완성됐다.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단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 나왔다.
"끝났냐?"
"어. 이제 좀 쉬어야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미리 온수장판을 틀어놓은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최근 날씨가 쌀쌀해져서 슬슬 맨몸으로는 자기 힘든 시기가 되어 버렸다.
'기숙사 시설이 좋아서 다행이지…….'
한때 살던 고시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안 그래도 따뜻해지지도 않는 라디에이터, 그나마 있는 거라고 켰더니 양옆 방에서 시끄럽다고 벽을 두들길 땐 정말 죽을 맛이었더랬지. 지금 생각하면 그립긴 개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 잔다. 밥 시간 돼도 깨우지 마."
"그럼 나 혼밥하라고?"
"어."
"매정한 놈일세……."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수면안대와 귀마개, 따스한 솜이불까지. 전부 이날을 위해 준비한 물건을 빠짐없이 착용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든다.
잠시 후, 왠지 모르게 극심한 허기짐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참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김철정의 얼굴이었다.
"야, 넌 무슨 사람이 죽은 것처럼 자냐."
"뭐?"
"벌써 여섯 시야. 일어나. 밥 먹으러 가게."
뭐야. 여섯 시? 내가 고작해야 12시가 되기 전에 잠들었으니 고작해야 여섯 시간 정도다.
겨우 그걸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며 인상을 찌푸리는 내게, 철정이 녀석이 딴죽을 걸었다.
"일요일 여섯 시라고 정신 나간 놈아."
"…… 뭐?"
이것이 당신의 주말입니다.
뭐예요. 돌려줘요.
왠지 기억에 남은 문구였지만, 아쉽게도 이번에 내가 빼앗긴 것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