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파티 나이트.-4-
내가 가끔 '우리 학교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라느니 '살아남는 놈이 강해지는 곳.' 같은 농담을 하고 다녀서 성심고가 정말 지옥 같은 곳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우리 학교는 지옥 '같은' 곳이 아니라 지옥 그 자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그 대신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함께 배우게 되니까. 주로 한계적인 의미로.
…… 근데 사실, 말을 이렇게 했다고 우리 학교가 무슨 사람을 압착기에 넣어 마지막 액기스 한 방울까지 자비 없이 뽑아내려는 마음이 가득한, 그런 무자비한 곳은 또 아니다.
의외로 휴식 시간을 챙겨줄 때는 확실하게 챙겨주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축제처럼 말이지.'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학교 축제는 분명 홍보 수단으로서는 더없이 제격이지만, 그 근본은 학생을 위한 축제다. 고된 학습 과정을 버텨온 학생들의 기력을 다시 채워주기 위한.
그렇기에 이렇게 상당한 액수의 비용을 감당하며 디너 파티 같은 이벤트까지 여는 것이다.
…… 뭐, 대회반을 비롯한 몇몇 사정이 절박한 학생들은 정작 그 파티를 준비하느라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순 없지만 말이다.
특히 나처럼 조금 특이한 위치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오늘의 파티 컨셉은 뷔페식. 그렇기에 주방이 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긴 하지만, 파티에 첫 고객이 유입된 후 후속 유입이 거의 없는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주방이 할 일은 적어진다.
단순한 이유다. 배가 부를 만큼 먹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는가.
처음에는 비축을 죄다 까먹을 기세로 빠르게 소비되던 음식도 점점 그 소모가 더뎌진다. 그러니 파티가 끝나갈수록 주방에도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에 해당 되지 않는 파트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내가 담당하는 드링크 파트였다.
사람이 배가 불러도 갈증은 생기는 법이다. 특히 이렇게 서 있는 시간이 긴 파티라면 말할 것도 없고.
때문에 내 바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음식에 흥미를 잃은 고객의 방문이 늘어났고, 얼마 전부터는 카운터에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때아닌 호황을 누리게 됐다.
거기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대 위에 올라간 초청 가수가 갑자기 바 이야기를 꺼내며 엄청난 칭찬을 하는 게 아닌가?
대체 누구인가 봤더니, 파티 초기에 짧게 바를 이용하고 갔던 남성 손님이었다. 어째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에 위스키에 조예가 있는 것을 보아 재력이 좀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가수였을 줄이야.
그것도 최근 어느 트로트 경합 방송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된, 인싸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주 대대적으로 광고를 때려줬으니, 고객이 늘어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참 운이 좋았다. 물론 일에 치이는 나는 불행해졌지만.
'차라리 이게 돈이라도 받는 거면 좋을 텐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미성년자가 주류를 판매하는 건 법에 저촉된다. 그러니 이렇게 파티 입장료만 받고 주류는 무료제공하는 형태가 된 거고.
아마 이게 선생님들이 허락해줄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겠지. 효민 선배의 우격다짐에 희생되었을 그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도대체 끊이질 않는 고객의 파도에 나는 내 모든 힘을 끌어내야만 했다.
신데렐라부터 시작하여 버진 모히또, 플로리다, 골든 메탈리스트, 셜리 템플 등, 레시피를 기억하는 모든 논알콜 칵테일, 주류마다 존재하는 최대한 도수를 낮춰서 마실 수 있는 방법 등을 총동원하느라 머리가 빠개지는 줄 알았다.
거기다 가끔은 이상한 사람의 상대도 해줘야 했고 말이다.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그 사람 다른 술로 갈아탄 지 오래예요. 그나저나 여기서 대체 뭐 하고 계십니까."
"쉬는 것도 질려서 잠깐 와봤는데 어쩌다 봤거든."
"이런 재밌는 걸 그냥 지나칠 순 없잖아?"
쉼터까지 박차고 나와 어디서 본 것 같은 대사를 연달아서 하는 3학년 대회반의 식중독 트리오 선배들이나.
"……."
"……."
"……."
"…… 오셨으면 좀 주문을 해 주시죠……."
"이해해 줘, 찬혁아. 원래 이런 분이시잖니."
"알긴 합니다만. 주문 안 하실 거면 그냥 제가 알아서 드립니다?"
"…… 그래라."
"어휴, 참."
대체 언제 온 건지 모를 안씨 남매의 아버지인 안상필 셰프. 그리고 그와 동행한 백예은의 누나, 백하은 쿡.
"바텐더!"
"마스터, 여기도!"
"주문 받아줘요!"
"예예, 갑니다!"
그 외에도 다종다양한 고객의 파도까지.
그리운 얼굴과 낯선 얼굴이 뒤죽박죽 섞인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제법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스터!"
"바텐더!"
…… 정신적인 즐거움과 육체적인 고됨은 별개이긴 했지만 말이다.
***
축제 2일차의 일정은 다른 날과 비교하면 제법 특이한 구성을 갖는다.
디너 파티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아마 축제 때 중요한 이벤트는 대부분 이틀차에 몰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곧 시작될 캠프파이어 이벤트.
캠프파이어라고 해봤자 그렇게 크게 불을 피우지는 않지만, 어차피 상징적인 이벤트이기 때문에 불꽃의 크기 따위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 기왕 피우는 거 통나무 2층 정도 높이로 쌓고 태우면 안 되나."
"그게 재밌을 것 같긴 한데."
……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저런 멋진 작품이 이런 사람들의 손에서 탄생한 걸까. 세상은 불공평하다.
스스로 학교 미니어처를 만들어놓고 정작 실제 학교에 불을 내고 싶어 작정한 예비 방화범들의 흉흉한 대화가 귓가에 들려왔지만, 일단 무시하자. 그게 상책이다.
아무튼, 우리 학교의 캠프파이어 이벤트의 진행과정은 간단하다.
저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을 적은 쪽지를 장작용 얇은 나뭇가지에 묶은 뒤 한데 모아 불태우는 것. 찾아보면 어딘가 비슷한 것이 있을 법한 이벤트다.
그래도 참여율은 제법 나쁘지 않아서, 탑처럼 촘촘하게 쌓인 1m가량 높이의 장작더미에는 마치 나뭇가지에 나비가 잔뜩 앉은 것 마냥 무수한 수의 쪽지가 묶여 있었다.
파티 뒷정리를 끝내고 온 대회반 인원들은 거의 마지막 순서로 쪽지를 묶게 됐는데, 빈 공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어디다 묶어야 하나 살짝 고민했을 정도였다.
"혁이는 무슨 소원 적었어?"
"나? 딱히, 그리 대단한 건 안 적었어."
쪽지를 묶고 장작에서 저만치 물러선 내 옆으로 다가온 백예은의 질문에 대충 대꾸했다.
그게 불만스러운 건지 백예은이 뺨을 부풀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당초 이런 이벤트에 감성적인 무언가를 느끼기엔 내가 좀 메마른 편이기도 했고.
"말해주면 어디 덧나?"
"별거 아니래도. 그냥 남은 한 해 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싶다, 뭐 그런 거야."
"뭐야. 수수해."
"그거라도 적은 게 어디냐. 아무것도 안 적고 쪽지만 묶어둔 애도 있더만."
거기다 나는 상당히 간절하다. 대체 올 한해에만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
회귀 전까지를 한 해에 포함한다면 내가 기억하는 커다란 사건만 대충 네다섯 개가 넘는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렇고. 1년에 한 번만 일어나도 귀찮을 일이 이 정도로 쌓이면 귀찮은 걸 넘어 '왜 또 나만……!' 같은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무서워진단 말이다.
"오히려 그런 게 좀 있는 편이 재밌지 않아? 급식만 벌써 10년째 먹고 있잖아. 가끔은 재미가 있어야지."
헤실헤실 웃는 백예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단 고사성어가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말하는 재미있는 일이 해마다 이만큼 있으면 제 명에 못 죽을 거야."
"…… 혁이는 혹시 주말에 집에서 나오기 싫은 타입?"
"그게 왜 그쪽으로 이어지냐."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음? 아냐?"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약속이 있으면 나가는 거고, 아님 마는 거고."
"으음, 주도적이지 못한 타입이기도 하구나."
"시끄럽네 거."
사람 호구조사 하는 것도 아니고 뭘 자꾸 캐묻는지.
녀석은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 킥킥대며 웃을 뿐이었다.
"그럼 주도적이지 못하고 집에 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혁아."
"그러니까 아니래도. 머리말 떼고 불러라."
어째 오늘따라 과하게 어그로를 끄는 녀석의 이마를 검지로 눌러 밀어냈다. 녀석은 마음에 안 드는지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볼을 부풀렸다.
"여기 있었네. 야 빨리 와. 반 애들 다 모여 있어."
"어, 간다."
반마다 무리를 지은 아이들이 캠프파이어 주변에 빙 둘러 앉았다.
어디서 보든 자기 마음대로긴 하지만 친한 아이들끼리 뭉치다 보면 결국 같은 반이 되어 버린다. 특히 우리 같은 1학년은 다른 반에 아는 사람도 몇 없으니 더욱 그렇고.
"빨리 불 붙였으면 좋겠다."
"오늘 날씨 추운데. 불 쐬면 좀 나아지겠지? 으으, 춥다."
"…… 나 사실 케밥 남은 거 꼬챙이에 꽂아왔는데, 구워 먹을 수 있을까?"
"완전히 미친 소리네."
"당장 하자."
"너희도 같이 구워지기 전에 그만둬라."
축제나 캠프파이어가 처음인 것도 아닐 텐데 잔뜩 들뜬 아이들의 수다가 귀를 파고든다.
분위기에 휩쓸린 탓인지 나까지 살짝 기대될 정도다. 불같은 건 어차피 맨날 보고 사는데도 말이다.
"오, 시작했다."
"뭐야 저거. 저게 왜 열려?"
행사의 시작을 알린 것은 대회반 3학년 팀장인 한석준 선배였다.
자기가 만든 건 자기가 가장 잘 안다는 걸까, 캠프파이어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긴 학교 모양 장식으로 다가간 선배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짓을 태연히 저질렀다.
"…… 뭐?"
미니어처라지만 전고가 1미터를 넘는 학교 모형의 대문을 태연한 태도로 여는 선배. 아니, 잠깐만. 그거 가동도 되는 거였어?
'수제 사탕 만드는 방법으로 뼈대부터 하나하나 세웠다던데, 가동까지 가능하게 해놨을 줄이야…….'
바에서 실컷 떠들던 식중독 트리오의 대화를 듣고 알아낸 사실이다. 묻지도 않은 걸 멋대로 알려준 거긴 하지만.
열린 문 속에서 몇 가지 도구를 꺼낸 선배는 익숙한 태도로 쓱쓱 움직이더니, 눈 깜짝할 새에 간이 횃불을 만들어냈다. 대체 무슨 연습을 한 걸까.
스피커에서는 박예휘 선생님이 태연한 목소리로 '지금부터 발화식이 있겠습니다.' 같은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었지만, 이게 저렇게 쉽게 설명해도 되는 상황인가 잠시 상식적인 한계가 찾아왔다.
…… 뭐, 지금 와서 상식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착화제가 뿌려진 장작더미로 다가간 선배가 멀찍이서 횃불을 던지기가 무섭게, 착화제로 만들어진 길을 찾은 불은 말 그대로 불길이 되어 단숨에 장작더미를 휘감았다.
"끼요요오오오옷!"
"불이다! 불이야!"
대체 무엇이 그토록 마음을 뒤흔들었던 걸까,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인간적인 괴성에 한숨을 흘렸다. 그래, 즐기자. 즐겨.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그렇다면 철저히 즐기는 자 모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다하다 참지 못한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이보다 더한 게 또 있겠어?
"그러고 보니 이거 끝나고 담력시험 있지 않았냐?"
"2인 1조로 가야 된다며, 팀 짤 사람 있어?"
"여자애랑 짜면 좋을 텐데."
"너랑 짜줄 사람 있음? 꿈 깨라."
"내가 봤을 때 너는 졸업할 때까지 솔로야."
"야, 우냐? 울어? 야 얘 조커된다!"
…… 잠깐, 지금 내가 무시 못 할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이 다음에 뭐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