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파티 나이트.-3-
예전에 호텔에 막 입사했을 시기, 나는 한 가지 큰 난관에 당면했었다.
아무리 익숙해지려 노력해도 도저히 해결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 난관이 말이다.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풍토? 아니다. 물론 고국과는 다른 식생에 조금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거야 내가 요리사니까 대충 알아서 해먹으면 해결할 수 있었다.
회화? 그것도 아니다. 사람은 정말 죽어라 노력하면 의외로 금방 대화를 깨우친다. 더군다나 나는 입사를 위해서 따로 프랑스어 시험까지 쳤었다. DELF/DALF라는 건데, 대충 토익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된다.
생활? 사실 이건 꽤 힘들긴 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주거지를 수도권에서 찾는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다. 뭐, 미슐랭 스타를 취득한 호텔에 입사한 몸인데 그깟 별 한 번 다시 못 따겠느냐 하는 마음가짐으로 어떻게든 해결했지만.
입고, 먹고, 살고.
의식주라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3요소는 해결됐지만, 그와 맞먹는,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문화.
의식주가 사람이 그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문화는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사는 십 년의 세월 동안 나는 그걸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그 좁은 한국에서도 전국 팔도마다 사는 모습에 차이가 있는데 이역만리 타국은 오죽할까.
서양과 동양의 관점부터 시작하여 사소한 생활습관 하나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라며 배우고 익힌 것을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익히는 건 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일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애를 먹었던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음주 문화였다.
서양의 음주 문화는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프랑스 사람들은 술을 정말 자주 마신다.
한국 사람이 음주를 즐기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두 차례 정도. 그나마도 업무 등을 마치고 저녁, 야간 시간대에 여가를 즐기며 음주를 즐긴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에게는 음주란 곧 생활이다.
아침에는 잘 잤다고 마시고, 점심에는 식전주라며 마시고, 저녁에는 반주라면서 마시고, 밤에는 간단한 안주와 함께 하루를 끝내며 마신다.
그렇다고 한 번 마실 때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죽도록 들이켜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음주를 즐기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술 종류마저 다양하다.
한국에서 주로 소비되는 주류라고 해봐야 소주, 맥주, 막걸리 세 종류 정도가 끝. 요즘에야 세계화니 뭐니 해서 양주를 즐기는 사람도 많지만 기본적인 소비량을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그에 비해 프랑스를 보면 가장 많이 소비되는 주류인 와인만을 보더라도 그 종류가 물경 수백에 달한다.
거기에 브랜디, 위스키, 럼, 맥주 같은 잡다한 종류의 술까지 합치면…… 아이고 두야. 생각하는 게 싫어질 지경이다.
그렇기에 서양 소재의 음식점에서는 주류에 대한 지식 또한 셰프가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로 꼽힌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술에 약해 그쪽에는 큰 관심 없이 살아온 내게 갑자기 술과 친해지라니, 이만큼 까다로운 일은 따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을 놔 버리자니 돌아올 후폭풍을 생각하면 결코 현명하지 못한 짓이었고.
때문에 그때 당시의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술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듯이, 몸이 나쁜 나는 머리를 혹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리라는 것은 머리만 갖고선 금방 한계가 찾아오는 법. 결국 나는 이 나쁜 몸을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을 궁리하기에 이르렀다.
태생적으로 도수가 높은 술은 극소량을 물에 타서 마시는 등의 연습을 통해 맛을 익혔고, 칵테일 따위의 주류는 최대한 도수를 낮추면서도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한 연구에 힘썼다.
그게 바로 논알콜, 저알콜 주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사유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힘겹게 쌓아올린 주류의 대한 지식과 경험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
"바텐더. 여기 한 잔 더 부탁해요. 마지막 잔이니까…… 그래, 위스키로"
"예. 라벨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음…… 메이커스 마크가 괜찮을 것 같은데. 맛이 좋아서 자꾸 기억나네요."
"주문 받았습니다. 메이커스 마크, 위스키 앤드 워터입니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요. 재지도 않고 물양 맞추는 게 완전 선수야."
어차피 공짜나 마찬가지니 아무래도 좋다며 잔을 든 남성 고객은 그대로 잔을 쭉 기울였다.
소주나 맥주처럼 꿀꺽꿀꺽 마시는 게 아니라 입에 머금고 향과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정석적인 음용법.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주도酒道에 조예가 깊은 고객이다.
이윽고 위스키를 꿀꺽 삼킨 남성이 약한 위스키 향이 감도는 날숨과 함께 감탄사를 내뱉었다.
"분명 평범한 위스키 앤 워터보다 물 비율이 높은데 맛이 굉장히 안정적이에요. 풍미도 깨지지 않고, 살짝 밍밍한 것 같으면서 위스키의 존재감이 확실해. 세잔 밖에 못 마시는 게 아쉬울 정도네요."
"죄송합니다. 그건 학교 지침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서요."
"이해해요. 그래서 더 아쉽네."
혹시라도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관객이 있으면 안 되기에 바에서 제공하는 알콜 주류는 인당 세잔으로 제한을 두고 제공하고 있다.
거기다 도수가 강한 주류는 무조건 물이나 다른 논알콜 부재료를 섞어 작은 잔에 따라 나간다. 칵테일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도수가 낮은 칵테일만 취급하고 있다.
고객의 취향을 반영할 수 없는 고육지책이지만, 경험에 의거하여 최고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든 칵테일은 대다수의 고객이 만족해주셨다.
"와아…… 색깔 봐. 엄청 예쁘다."
"어떻게 같은 술이 이렇게 층층이 쌓이는 거야? 되게 신기하다."
"빨리 찍어. 맛도 궁금하다."
뭐, 도수나 맛은 둘째 치고 미적인 관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고객도 있었기에 이것저것 신경 쓸 거리가 늘어난 나로선 심신이 지치는 작업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물론 이와는 다른 경우도 있다.
바를 찾는 고객이 꼭 학교 외부인만 있는 건 아니다.
바라는 생소한 어른의 문화에 호기심을 품고 찾아오는 학생 또한 꽤 많았다.
앉아도 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자리에 앉아도 무엇을 시켜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중에선 가끔 학생답지 않은 배짱으로 무장한 녀석도 있었다.
"어이, 마스터. 여기도 주문 좀 받아주지?"
"김철정 또 너야?"
뭐, 익숙한 얼굴이긴 했지만.
반사적으로 뺨을 때리고 싶어지는 심정을 참으며 대꾸하자 김철정이 손을 흔들며 웃는다. 물론 옆에는 언제나 함께 다니는 양희연과 나현주 또한 함께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익숙한 얼굴이 그런 재미있는 꼴을 하고 있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요컨대 놀리러 왔다는 뜻이다.
"다 봤으면 그만 가지 그러냐. 어린애가 올 곳이 아니에요."
"우유라도 주시던가."
"…… 너 그거 되도록 진짜 바 가서는 하지 마라."
그쪽에선 바에서 우유를 시키면 진성 또라이로 본단 말이다. 오래된 유머긴 하지만.
"니는 손님이 왔는데 그냥 보내나. 뭐라도 줘야 하는 거 아이가?"
"…… 하, 그래. 온 김에 한 잔씩 하고 가라.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우리가 아는 술이 어딨노. 한 잔 잘 말아서 올려 봐라."
거 참. 자기 입으로 모른다면서 이렇게 당당한 고객은 또 처음이네. 아주 참신하다.
"그래. 그럼 알아서 만든다. 너희는?"
"나도 마찬가지."
"부탁할게."
김철정과 나현주 또한 양희연과 별다를 게 없었다. 하긴 학생이 술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느냐만은.
"만들어줄 테니까 불평만 하지 마라."
안 그래도 찾는 손님이 많은 상황에 골치 아픈 주문이 들어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요식업계에서 고객은 영원한 갑. 요리사는 영원한 을.
오늘도 나는 갑질의 피해자가 되기 위해 도구를 손에 들었다.
***
어느 나라의 내로라하는 술꾼이자 일류 바텐더는 이런 말을 했다.
바에 가면 세 가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첫째는 맡는 즐거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술이란 본래 그 향기가 굉장히 강한 액체이다.
알콜 만이 아니라 통에서 숙성되며 술 자체에 남은 특유의 나무 냄새, 코르크 냄새, 과일 냄새, 타닌 냄새 등이 골고루 술의 유분에 섞이면 그 향기는 결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많은 술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바에는 그 향기가 깊게 새겨진다. 바의 냄새만 맡고도 그 바가 얼마나 오래된 가게인가를 알 수 있을 만큼.
자리에 앉아 술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비강 깊이 그 향기를 들이켜면, 어느새 소풍 전날의 어린애마냥 가슴이 들끓는다.
둘째는 먹는 즐거움.
술이란 향도 좋지만, 그 진가는 뭐니뭐니해도 맛에 있다.
수백 가지를 넘는 다종다양한 술과 음료가 어떻게 섞여 어떤 맛을 내는가.
칵테일이 내는 맛의 다양함은 이 세상에 있는 바의 숫자에 비례한다. 그만큼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
마지막 셋째는 보는 즐거움.
바텐더가 손에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쉐이킹을 연습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오로지 완벽한 한 잔의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을 고객에게 보이기 위하여.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칵테일 한 잔을 만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3분 남짓.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바텐더는 고객이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르는 그 3분을 달래기 위해 수백, 수천 시간의 연습을 거듭한다.
그 어떤 단순한 동작이라도 극한까지 갈고닦는다면 사람의 마음을 앗아갈 수 있다.
"오우야."
"와……."
찬혁에게 주문을 맡긴 세 사람은 그런 경구나 바의 즐거움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마지막 세 번째 즐거움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칵, 샤칵, 샤칵.
별다른 기교도 없이 그저 수평과 사선을 따라 번갈아 오가는 찬혁의 손. 하지만 그 몸의 중심선만큼은 마치 쇠말뚝이라도 박아놓은 것처럼 요동조차 하지 않는다.
은색 칵테일 쉐이커 속에서 사정없이 뒤흔들리는 얼음이 규칙적인 음색을 자아낸다.
얼음이 쇠에 긁히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슬리긴커녕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라도 듣는 것 마냥 서서히 그 소리에 빠져드는 세 사람.
이윽고 셰이킹을 끝낸 찬혁이 세 개의 칵테일 글라스에 그 내용물을 나눠 따른다.
해바라기의 꽃잎을 연상케 하는 밝은 노란빛 음료가 뒤집힌 삼각뿔 모양을 한 잔에 천천히 차오르는 것을 본 나현주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색 되게 예쁘다."
그 순수한 감탄에 찬혁이 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파인애플 쥬스, 레몬 쥬스, 오렌지 쥬스를 1:1:1로 쉐이킹한 칵테일이야. 말이 칵테일이지 실상은 믹스 쥬스지만."
컵받침 위로 잔을 올린 찬혁은 세 개의 잔을 각자에게 밀어 건넸다.
"이름은 신데렐라. 단순해 보여도 되게 유명한 칵테일이야."
신데렐라.
그 이름을 속으로 곱씹는 세 사람에게 찬혁이 말을 이었다.
"아침부터 잔뜩 고생한 아가씨가 몸단장까지 하고 파티장에 납셨는데, 이 정도는 먹어 줘야지."
"나는 남잔데."
"지금부터 여자 하든가."
웃음기 띤 김철정의 농담에 같은 농담으로 응수하는 찬혁.
그 대화에 작게 쿡쿡댄 일행이 저마다 신데렐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거칠게 쉐이킹을 하느라 부스러진 얼음조각과 어우러진 레몬의 강한 산미에 오렌지와 파인애플의 단맛이 더해지니 상상 이상의 상쾌함이 입안을 휩쓸었다.
몸 위에 잔뜩 앉은 재를 손도 대지 않고 단숨에 털어낸 듯, 그 마법 같은 맛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텁텁하던 입속이 순식간에 개운해졌다.
어느새 눈까지 감고 그 여운에 깊이 빠져 있던 나현주가 찬혁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신데렐라면, 찬혁이는 마법사 할머니인가?"
겉보기와 다르게 동화적인 감수성을 가진 나현주다운 발상에 양희연과 김철정이 폭소를 터트렸다.
현재 시각은 저녁 9시. 마법이 풀리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