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파티 나이트.-2-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뭐, 예상했다시피 효민 선배가 찾은 '술을 잘하는 사람'은 술을 잘 마시는 누군가를 찾는 게 아니었다.
'당연한가.'
때가 어느 땐데 입에 술을 대는 학생이 버젓이 나서겠는가. 나나 선배 같은 미성년은 술 한 병 사는 것도 굉장히 힘들다. 대회반 창구를 끼면 수십만을 호가하는 와인도 척척 사들일 수 있겠지만 그건 사용 내역을 철저히 보고해야 해서 마실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게다가 난 술도 잘 못 마시니까.'
회귀 전의 나는 같이 술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술멸치였다. 소주 반병 정도에 발걸음을 비틀대는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이 되는 사람이었단 말이다.
체질이 그렇다 보니 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나이기에 이어진 선배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주어야 할지 골치가 아파왔다.
"바를 맡아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바요?"
바Bar.
사전적 의미로는 길쭉한 모양의 막대기나, 혹은 그렇게 생긴 사물 등을 가리키는 단어지만, 요식업계에 몸을 담은 이나 술을 좋아하는 알중…… 아니, 알붕이들에게는 아마 다른 뜻이 더 익숙하겠지.
바란 말하자면 술집이다.
외국 영화를 좋아한다면 종종 그런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온갖 술이 가득한 찬장 앞에 서서 길고 두꺼운 테이블bar을 지키는 주인장이 있는 술집 말이다.
그런 곳을 부르는 이름이 바로 바다.
가게의 분위기에 따라서 펍 바, 파티 바, 앤틱 바, 오센틱 바, 플레어 바 등등 부르는 별칭이 달라지긴 하지만 바라는 이름만큼은 빠지지 않는다.
"바텐더가 필요하신 겁니까?"
"맞아."
그리고 그런 바에서 술을 섞고 따르는 사람이 바로 바텐더bartender. 바의 주인이자 주관자다.
"그 자리, 원래 주인은 어디 갔습니까?"
학교에서 열리는 파티에 술이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파티 설계자인 선배가 바텐더를 찾는 걸 보면 아마 선배 본인이 바를 파티의 일부로 설계했으리라.
특히 선배가 계획한 뷔페식 파티에서는 음식만큼 드링크가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다. 내가 호텔에서 일할 시절에도 연회에서 드링크를 담당하는 팀이 아예 따로 있었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분명 원래 바텐더의 역할을 맡을 사람도 있었을 터다. 그것도 분명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진 누군가가.
아무리 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미성년자가 하기엔 분명 힘든 점이 있는 역할이라 하더라도 바텐더 또한 요식업계라는 나무에서 큰 가지를 차지하는 직업 중 하나다.
그런 만큼 성심고에도 그쪽으로 전공을 선택한 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고, 그게 바로 식음료과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바텐더, 바리스타 등을 교육하는 학과다.
'분명 거기서 사람을 뽑았을 텐데 말이야.'
대회반은 아니라도 학생 한두 명의 협력을 구하는 것 정도는 효민 선배의 이름값이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터.
그런데 선배가 직접 설계한 자리가 공석인 데다 지금 와서 급히 사람을 구해야 할 정도라니. 뭔가 말썽이 있어도 크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게 말이지……."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3학년 선배 중에 칵테일 대회에서 우승까지 할 만큼 실력 좋은 선배가 한 분 계시거든? 원래는 그 오빠가 파티 바를 맡아줄 예정이었어. 그런데……."
"그런데?"
"그 오빠, 오늘 학교 못 나왔대."
"예?"
아니, 왜?
"지독한 몸살이라나 봐."
"몸살이요? 갑자기?"
"응. 집에서 연락이 왔다더라."
세상에, 타이밍 한 번 끝내준다. 어떻게 당일 날 갑자기 그런 중요한 사람이 나자빠진 거야?
"밤새 찬바람을 쐬서 그렇겠지. 아침에 안 보인다더니 찾아보니까 집 바깥 복도에서 자고 있었다더라."
"……뭐라고요?"
"내 억측이긴 하지만, 아마 그리 듣기 좋은 이유는 못 될 거야."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뱉는 선배의 말에 숨겨진 속뜻을 약간이나마 알 것 같았다.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 또한 너를 바라본다 했던가.
알콜 음료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갑자기 해괴한 짓을 한 이유가 나는 도저히 한 가지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조금 급하게 바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혹시 아는 사람 있어?"
"글쎄요. 아무래도 그쪽은 좀 매니악 한 부분이 있어서."
"그렇긴 하지……."
'포기해야 하는 건가…….'라며 긴 한숨을 내쉬는 선배에게 혹시나 싶어 질문을 건넸다.
"혹시 뭐, 조건 같은 건 없습니까?"
"조건? 무슨 조건?"
"예를 들어 어떤 종류의 칵테일을 잘 만든다거나, 아니면 손님 대접을 잘 한다거나 하는 거요."
"음……. 몇 개 있긴 한데."
"말해봐요. 조건을 달면 일단 누구라도 구할 수 있겠죠."
잠시 생각에 빠진 선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우선 논알콜이나 도수가 낮은 계열의 칵테일, 와인, 샴페인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 필요해. 학교 축제잖아. 아무리 성인이 낀다 해도 취한 사람이 나오면 안 되니까."
"논알콜이나 저알콜……. 또 다른 건요?"
"거기다 음식 쪽으로도 지식이 좀 있다면 편하겠지."
"흠……."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 유명세가 있으면 금상첨화고. 물론 좋은 쪽으로."
정리해보자.
논알콜과 저알콜 주류, 그리고 음식에 대한 출중한 지식과 솜씨를 가진 유명인.
'어려운데.'
말만 들어도 상당한 고급인력이다. 단순한 조건이지만 하나같이 쉬이 찾아보기 힘든 조건이지 않은가.
'거 참, 그런 사람이 갑자기 뿅 하고 튀어나와 줄 리가…….'
그런데 그 세 가지 조건을 계속 곱씹고 있자니 어째 계속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서양에서 오랜 기간 산 탓에 제법 서양 주류에 빠삭하고.
술이 약해서 맨날 술자리를 갈 때마다 논알콜, 저알콜을 찾느라 그쪽 지식에 해박하며.
그 와중에 본업은 요리사라 요리에 능하고 나름 칵테일을 연습한 경력도 있는.
요즘 학교 학생들 중에서 가장 핫한 유명세를 누리는 사람.
'어라?'
이거 설마?
"저기, 선배?"
"응? 왜.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있어?"
"예."
"정말?! 누구?"
저 잔뜩 기대감 어린 얼굴에 대고 답을 해주어야 하나 망설였지만, 나는 끝내 입을 열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기에.
"저요."
"……뭐?"
"저요."
나를 향한 선배의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선배가 술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내 표정이 딱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
"결국 이렇게 됐나……."
어쩔 수 없단 심정으로 푸념을 흘리며, 나는 목덜미를 조이는 나비넥타이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바지와 베스트. 살면서 몇 차례 입은 적 없는 이 생뚱맞은 차림에 화룡점정을 찍는 나비넥타이.
이른바 오센틱 바텐더의 정장인 바텐더복의 착용감은 여전히 새삼스러울 만큼 어색했다.
덕분에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고 끊임없이 소매와 목깃, 넥타이 등을 매만지게 된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으, 좀 이상하지 않나요?"
"잘만 어울리는데 뭐. 오히려 조리복보다 나아 보여."
"그건 좀 어떨까 싶네요."
바의 건너편에서 칵테일 트레이를 세팅 중이던 하유리 팀장의 칭찬에 나는 마지못해 웃었다.
코스프레나 마찬가지인 이런 차림이 본업보다 어울린다니,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놀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왜, 남자는 정장이라는 말도 있고."
"이건 정장은 아니지만요."
일부 오센틱 바의 바텐더는 겉옷까지 전부 갖춰 입고 반듯한 정장 차림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거기까지 따라 할 엄두가 안 난다. 이 정도 차려입는 것도 나름 최선이었다.
'애당초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요즘 이런 옷을 입는 바텐더는 그렇게 많지 않다. 아마 대부분은 가게 유니폼을 입을 거다. 정장은 조금 유행에서 뒤처진 패션이니까. 괜히 오센틱 정장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주방에서 쫓겨난 거야?"
"쫓겨나지 않았어요. 그냥 좀, 이래저래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 있어 보이긴 한다."
웃는 낯으로 대꾸한 하유리 팀장은 그 이상 파고들려 하진 않았다.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다.
"근데 칵테일은 좀 만들 줄 알아? 기본 샴페인 정도야 우리가 따라 나간다지만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 바가 있으면 찾는 사람 많을 텐데."
그녀의 말대로 대강당의 입구 옆, 강당의 모서리 부근에 자리한 바는 그 특유의 분위기와 선반 가득한 관상용 술병 탓에 상당히 눈길을 끄는 구조였다.
거기다 대강당 자체가 뻥 뚫린 구조라 앞을 가리는 것도 없으니, 아마 대강당에서 단상 다음으로 잘 보이는 장소가 바가 아닐까.
"고등학생이면 한창 그런 거에 관심 많을 나이잖아. 벌써 그런 거에 빠지면 안 되는데 말이야."
"팀장님도 고등학생이잖아요."
"나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고등학생이니까 괜찮아."
그거 참, 재미있는 내로남불이다.
"말 나온 김에 한 잔 만들어드릴까요? 드시고 한번 판단해보세요."
"배짱 좋은데. 그럼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한번 봐볼까?"
살풋 눈웃음을 지은 하유리 팀장이 세팅하던 칵테일 잔을 내려두고 내 앞에 앉았다. 뭔가 한두 번 해본 것 같지 않은 능숙한 몸짓이다.
"뭘 만들어줄래?"
"오더는 있으신가요?"
"아니. 바텐더 재량에 맞겨볼게."
"제일 어려운 주문이네요."
"실력 평가엔 제격이지."
맞는 말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렇긴 하다.
"그럼 까다로운 손님께 혼나지 않도록 잘 만들어볼게요."
"부탁해."
그녀의 대꾸에 맞춰 나도 정리해두었던 칵테일 도구를 꺼내 들었다.
술을 섞고 삶을 바꿀 시간이다. 뭐, 2050년이 지나도 사이버펑크스러운 느낌은 하나도 안 났지만 말이야.
***
칵테일을 만들기 앞서, 찬혁은 하유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어떤 칵테일을 만들지 정하기 위해서다.
"탄산에 거부감은 없으신가요?"
"탄산? 싫어하진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까 저녁으로 먹은 케밥의 느끼함이 살짝 입안에 남아 곤란함을 느끼던 차였다. 일을 하느라 지친 것도 있고, 청량감 있는 음료가 나온다면 좋을 것이다.
굳이 그 속내를 숨기는 하유리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찬혁.
두 사람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교차하고, 이윽고 찬혁은 행동을 개시했다.
"그럼 오늘은……. 이걸 써보죠."
잠시 등을 돌려 냉장고와 찬장을 뒤적인 찬혁이 두 개의 음료를 바 위로 올려놨다.
"응? 진심이야?"
그 음료용기에 붙은 라벨을 본 하유리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료수 코크 콜라였지만, 그녀가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거 술이잖아."
그 반대편에 나와 있는 용기는 자세히 살필 것도 없는 술이었으니까. 평범한 사람보다 주류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진 그녀는 금세 술의 정체를 눈치챘다.
도수가 상당히 높은 화이트 럼. 그것도 쿠바에서 만들어진 상등품이다.
"쿠바리브레? 논알콜이 아니지 않아?"
"원래 레시피대로 만든다면 그렇겠죠."
쿠바리브레. 자유로운 쿠바라는 뜻을 가진 이 칵테일은 콜라와 럼, 그리고 라임을 섞어 만든다.
마시기 편한 것에 비해 제법 도수가 높아 신나게 마시다 보면 순식간에 취해 버리는 독한 칵테일 중 하나다.
"그래서 살짝 속임수를 쓸 거예요."
"속임수?"
찬장에서 커다란 쇠숟가락을 꺼낸 찬혁은 그 위에 각설탕을 하나 올렸다.
그리고 각설탕 위로 몇 방울의 럼을 떨어트려 적신 뒤, 성냥을 사용하여 불을 붙인다.
"이게 도수가 불이 확 붙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설탕에 적셔서 불을 붙이면 조금씩 잉걸불이 붙어서 타들어 가요. 설탕은 타지 않고 녹아내리면서 카라멜라이징 되고, 알콜은 불타서 날아가죠."
바 위로 얕은 럼 향이 맴돈다. 다크 럼만큼은 아니지만, 비강을 채우며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기에는 충분한 향이었다.
"그리고 이걸 이렇게."
어느새 원통 모양의 길쭉한 잔에 라임을 넣고 짓이겨 야성적인 풍미의 라임즙을 짜낸 찬혁이 잔에 얼음을 채우고 콜라를 넣는다.
"이 녀석을 풀업."
끝까지 채운다는 말에 걸맞게 잔의 입구보다 살짝 위로 올라온 얼음의 턱밑까지 차오른 콜라. 라임즙과 만나 기포가 슬금슬금 올라오는 잔 위로 찬혁이 마무리 과정에 들어간다.
한 때 불이 붙었던 각설탕은, 어느새 시럽처럼 짙은 갈색이 밴 액체로 변해 있었다. 찬혁은 그것을 망설임 없이 들어 잔에 떠오른 얼음 위로 조심스럽게 붓는다.
"논 알콜 칵테일. 버진 쿠바 리브레 나왔습니다."
"……뭐야, 학교의 얼굴이라면서 이런 걸 학생한테 줘도 돼?"
"와인을 넣고 끓이는 스튜나 브랜디를 넣고 볶는 요리를 미성년자보고 먹지 말라고는 안 하잖아요? 이것도 요리니까 똑같은 거 아닐까요."
"말은 잘해."
살짝 튕기듯 까탈스럽게 웃은 하유리가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코로 흘러 들어오는 콜라와 라임, 그리고 특히나 진한 럼의 향기.
럼으로 만든 시럽이 얼음 위로 코팅되어, 실질적으로는 알콜이 없음에도 비율을 진하게 섞은 칵테일처럼 느껴지는 마술 같은 한 잔.
맛은 평범하게 라임즙을 섞은 콜라의 맛이었지만, 음료의 맛은 특히나 향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만큼, 특이하게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최고의 칵테일을 마신 기분이었다.
이 시점에서, 하유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역시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잘 부탁해, 류찬혁 바텐더."
"예, 팀장님."
파티를 즐기는 입장은 되지 못하겠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이 파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맛보며 하유리는 내용물이 남은 잔을 마저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