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성심고 축제.-4-
"다들 고생 많았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보자. 선배님들도요."
"혁이도 고생했어! 내일 봐!"
"간다."
"빠이!"
"잘 가~."
성재준 선배가 뜻밖의 수확을 얻고 기뻐 날뛰기도 잠시. 마지막 검사를 끝으로 주방을 나선 우리는 서로를 배웅하며 저마다의 보금자리를 향해 발을 옮겼다.
'나 말고는 다 집이네.'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교문으로 향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자니 회귀하기 전의 내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 아니, 그때는 그나마 헤어질 친구조차 없었던가. 참 가슴 아픈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뭐, 집에서 통학을 했어도 어차피 똑같았겠지만."
대회반은 축제 기간 중 담임교사의 재량 하에 조례, 종례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인원점검은 대회반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하니까. 그게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근데 나는 살짝 사정이 다르다.
물론 귀찮게 종례에 얼굴을 비출 필요가 없긴 하지만, 오늘은 반에 들릴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반의 경쟁심에 불을 지른 1반 판매량 내전이 일어난 원인이 바로 난데 결과도 안 보고 바로 기숙사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피할 수 없는 사유와 피로가 가득 담겨 무거워진 발을 어떻게든 옮기며 교실로 향하자니, 가로수 길을 따라 설치된 가로등 아래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됐다.
"어, 저기 온다!"
"인마, 여기다."
"엥?"
정확히는 인물'들'이었지만.
"다들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소강당이 있는 별관과 학교 본관 사이를 잇는 길 중간에서 나를 기다리던 이는 다름 아닌 나의 가족들. 어머니와 주아, 그리고 사장님이었다.
물론 우리 가족이 가게에 왔던 건 알고 있었다. 연락도 받았고, 가게에 왔을 때도 홀에서 내게 알려줬으니까. 일하는 틈틈이 곁눈질로 보기도 했다. 다만 주방 일이 바빠서 따로 만날 시간을 못 냈을 뿐이다.
"뭐하긴. 보면 몰라? 오빠 기다리고 있잖아."
툭 쏘아내듯 말하는 주아 녀석의 말투는 여전히 얄미운 구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독기 대신 웃음기가 가득한 것이 어지간히 즐거운 듯 보였다.
"뭐 하다 이렇게 늦었니?"
"주방 마감하느라 조금 걸렸어요. 이 시간이면 집 가는 길도 꽤 막혀서 오래 걸릴 텐데. 괜찮으세요? 저는 진작 가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아들 얼굴 한 번 보고 갈 시간도 없을까."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괜찮은데."
"너만 좋으라고 하니. 엄마가 좋아서 하는 거지."
평소보다 짙은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하게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런 나를 바라보실 뿐이다.
어딘가 쑥스러운 침묵이 이어진다. 싫은 기분은 아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다행히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 절망적인 주아 녀석의 참견 덕에 어색함에 잠긴 시간도 잠깐으로 그쳤다.
"와, 오빠 생각보다 요리 엄청 잘하더라! 우리한테 음식 날라주던 언니가 막 많이 설명해 줬는데 두 번째 요리는 오빠가 직접 만든 거라며?"
"넌 대체 날 뭐 하는 놈이라고 생각한 거냐."
그나저나 원래 홀 웨이터가 그런 것도 설명해주던가?
"되게 예쁜 언니였어. 화장도 많이 안 한 것 같은데 아이라인 되게 선명하던데? 부럽다……."
아무래도 주아 녀석이 말하는 언니란 하유리 팀장을 말하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사람 특징을 잡아내는 눈썰미는 좋았으니 틀림없을 테지.
'신경을 꽤 써주셨구나.'
나름 셰프의 친지라고 대접에 공을 들인 듯 한데, 감사할 따름이다.
"나도 정말 놀랐다. 이게 고작 요리를 배운 지 1년 남짓한 실력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을 지경이야."
"사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너무 띄워주시면 좀 쑥스러운데."
"아니, 진심이야. 정말 몰라보게 성장했어. 한창때 나랑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야."
'이런 게 청출어람이라는 거구나.'라며 감격스런 표정을 짓는 사장님에게 주아가 딴지를 걸었다.
"엥? 아저씨가요? 에이, 그건 아니다."
"지금은 이래도 아저씨도 한창때는 엄청났단다, 주아야."
"에이. 제가 아저씨 가게에서 밥을 몇 번이나 먹은 줄 아세요? 아무리 봐도 방금 먹은 게 훨씬 맛있었는데."
"아, 아니 주아야. 그건 그…… 그래! 재료의 질적 차이라거나 익숙한 음식의 차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한동안 횡설수설하던 사장님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에야 우리는 대화를 마저 이어나갈 수 있었다.
대화라고 해봐야 자질구레한 안부 인사나 근황 등을 묻는 말이었지만, 최근 들어 집에 가도 그리 오래 눌러앉아 있던 적이 없었기에 그마저도 반가웠다.
하지만 그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듯이, 우리의 즐거운 시간도 그리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아, 저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교실에서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래.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아두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 보렴."
"예.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축제 끝난 뒤에 한 번 들를게요."
어머니는 발을 돌려 떠나는 날 잡지 않으셨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고 나눈 대화치고는 짧은 감이 있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겁던 발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아쉬움은 남지만 이유 모를 상쾌함을 느끼는 건 어째서일까.
그건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
"많이 달라졌네요, 우리 찬혁이."
"그러게 말입니다."
활기찬 걸음으로 벌써 저 멀리 떠나간 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미정은 감개 깊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찬혁이 대단히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주 어린 시절의 찬혁이라면 몰라도, 찬혁의 아버지가 세상을 등진 뒤로 찬혁은 좀처럼 웃지 않는 아이가 됐다.
학교에서는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렸다느니, 싸움을 벌였다느니 하는 소식만 들려왔고,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박춘배의 가게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 하여도 평범한 웃음보단 비아냥 섞인 실소를 짓는 일이 더 많은 아이였다.
신미정은 그런 찬혁이 항상 걱정이었지만, 못난 어미는 정작 그런 아이를 위해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매번 속앓이를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어느새 저토록 의젓해졌다.
마음에서 우러난 순수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됐다.
찬혁이 주방에서 그녀들을 보았듯이, 신미정 또한 주방에서 일하는 찬혁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신미정은 그때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그토록 열정적인 면이 있었다는 것.
항상 냉소적인 모습을 내세우며 타인을 밀어내던 아이가 누군가를 이끌 수 있게 됐다는 것.
아마 찬혁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런 찬혁의 모습은 기억에 남은 그의 아버지와 쏙 빼닮아 있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서 사랑하는 이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한때는 그것이 못내 가슴 아플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그저 벅찬 감격과 기쁨만이 신미정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애수에 젖은 신미정의 눈에서 흐르는 기류를 읽은 것일까,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달라붙은 류주아가 허리춤을 껴안으며 그녀를 불렀다.
"엄마?"
"아, 응? 왜 그러니 주아야?"
"하암. 나 졸려. 오빠도 갔는데 우리도 이제 가자."
"그래. 그래야지."
류주아는 얼굴 가득 피로를 담아 호소했다. 이 넓은 학교를 반나절 동안 쉼 없이 돌아다녔으니 지치지 않는 편이 이상하리라.
신미정은 하는 수 없이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아쉬움이 가슴 한편에 작게 응어리졌으나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 가족이 돌아올 보금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그녀가 맡은 역할이었으니까.
"돌아가야지. 그래야 네 오빠도 마음 놓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이런 현실이……! 이런 현실이 있단 말이냐?!"
가족과 헤어진 뒤 돌아온 교실은 난장판이었습니다.
"……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칠판에 크게 쓰인 A, B, C라는 알파벳과 그 아래 적힌 숫자.
교탁과 그 주변 바닥에 난잡하게 어질러진 수많은 종이.
그리고 그런 교실의 바닥 한복판에서 종이와 함께 비빔밥마냥 뒤섞인 몇 명의 아이들.
난장판. 정말 그 말밖에 설명이 안 되는 교실의 참상에 나는 문을 연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
"오. 찬혁 어서오고."
"…… 어, 그래. 다녀왔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날 반겨주는 김철정의 드립에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애썼다.
눈에 보이는 단서를 종합하여, 교실이 이 꼴이 난 원인을 대충 추리한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쟤네 무슨 떨이라도 했냐?"
"뭐? 그런 걸 어디서 구해."
"농담이었어."
하긴. 학생이 그런 걸 어디서 구하겠느냐마는.
아무래도 우리 반에서는 지금 막 판매량 계측을 끝낸 듯했다.
아마 저기 널브러진 녀석들은 판매량 경쟁에서 꼴등이라도 했겠지. 안 봐도 뻔하다.
"거 참. 판매량 저조한 거야 언제든 그럴 수 있는 거야. 고작 학교 축제 판매량 갖고 그러면 나중에는 어떡하게. 일어나. 옷 더러워진다."
나름 신경 써서 위로랍시고 해준 말이었지만, 그 위로에 대한 답변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너 때문이잖아!"
"딴 애면 몰라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반박을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찰나, 내 옆으로 다가온 양희연이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내 옆구리를 툭툭 치고는 턱짓으로 칠판을 가리켰다.
"마, 함 봐라."
"응?"
칠판에 적힌 건 스코어보드 하나뿐이니 아마 그걸 가리킨 것일 터.
스쳐 지나가듯 대충 훑었던 스코어보드를 다시 세심히 읽어보았다.
"A 133, B 82, C 116…… 다들 꽤 잘 팔았…… 어라?"
그저 쓰인 것을 그대로 읊조리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시간 상 가장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던 B조의 성적이 너무 저조하다. 꼴등인 거야 둘째 치더라도 숫자의 단위가 틀릴 정도로 판매량에서 차이가 난다.
"이제 좀 알겠나?"
"이게 다 네 업보다."
양희연에 이어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하는 김철정.
나는 다시 한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 의문에 답해준 이는 교실 바닥에 널브러진 패잔병, B조 소속의 아이들이었다.
"우린 생각했지. 점심시간이 되면 분명 배고픈 손님이 벌떼처럼 몰려들 거라고!"
"그 생각이 틀리진 않았어. 점심시간이 되니까 손님이 벌떼처럼 몰렸지."
"우리 가게가 아닌 대회반 가게로!"
아.
"대체 대회반에서 뭘 어떻게 준비했길래 10분 만에 학교 전체에 소문이 나냐고!"
"점심시간이 되니까 학교가 아예 유령도시처럼 됐어! 전부 대회반 매장에 몰려서!"
"어째서 하늘은 저놈들을 우리 반에 주고 대회반을 낳았단 말인가……."
요컨대, 그런 거였다.
"손님 경쟁에서 말렸구나?"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마!"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는지 네가 알아?!"
"맛있다고, 분명 맛있다면서 우리가 만든 걸 먹는 손님이 다른 가게 쪽으로 아련한 눈길을 보내는 걸 직관하는 심정을 네가 아냐고!"
어…… 그거 참 해줄 말이 없다.
"어쩌겠어. 그게 세상사란다 얘들아. 사회란 그런 거야."
날카로운 현실 지적에 B조 아이들이 바닥, 교탁, 칠판, 책걸상 등을 가리지 않고 두들기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래 얘들아. 이런 거에도 익숙해져야 사회에 나가도 굳세게 살아갈 수 있단다.
실의에 빠진 아이들은 잠시 슬픔을 표출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나는 반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섰다.
"아무튼 판매량 1등은 A조네."
"암, 그렇고말고."
"그럼 뭐, 더 간 볼 것도 없지. 자, 여기. 창민이랑 예은이한테 빌려서 열 장 채웠어."
보상의 수여식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간소했지만, 애당초 이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반 아이들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았던 건지, 내 손에서 티켓을 거의 강탈하듯 채간 김철정이 교실 중심에 있는 책상 위에 올라서서 포효를 내질렀다.
"해냈다! 티켓, 넌 우리 거야!!"
"우아아아아!!"
"부럽냐? 부럽다고요? 어쩌라고요? 아하하흐하헤하흐하헤헤!!"
잠시, 내가 저 녀석들에게 떨을 준 게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역시 요리하는 놈들이야. 성능 확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