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어셈블.-4-
사람들은 가끔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한다.
혼자 하기는 버거운 일에 당면했다는 뜻이 담긴 은유적인 표현…… 이지만, 나는 은유고 뭐고 집어치우고 그 상황 자체가 현실이란 게 문제다.
대회반과 학급 프로그램 두 가지를 동시에 주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어련할까.
심지어 대회반은 그 안에서도 다시 일이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1학년 팀의 프로그램 준비.
또 하나는 2학년 팀의 주방보조 준비.
그나마 후자는 효민 선배에게 받은 레시피를 숙지하고 연습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별문제 없다지만 전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매장 컨셉, 메뉴, 인테리어. 그 모든 걸 우리가 주관해야 했으니까.
물론 선생님들의 도움도 이래저래 받았고, 꾸준한 피드백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 나름의 요령 덕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준비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몇 가지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2학년 팀과 비슷한 메뉴가 겹쳐 버린 탓에 때아닌 요리 대결로 해당 메뉴를 가져갈 팀을 정했다거나, 교장 선생님의 주선으로 하게 된 다른 학교와의 미팅이라거나.
"으으, 비슷한 메뉴라지만 레시피는 아무리 봐도 연회용 아니야? 좀 져주면 안 됐어?"
"레시피가 연회용이라고 꼭 용도에 맞는 곳에서만 쓸 필요는 없잖아요? 거기다 애들이 져달라고 하면 져줄 애들입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으으, 몰라. 할 일 또 늘었어!"
"그나저나 그 관광고에서 왔다는 애들은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응. 저번 학교 축제 때도 학교 간 교류로 왔던 곳이거든. 못 본 얼굴이 많긴 했지만. 조만간 1학년 팀하고도 미팅 잡힐 것 같던데?"
그거 다행이다. 얼굴 한 번 대면해본 적 없는 사람이랑 일하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라서.
'그나저나 관광고라…….'
나름 고급 딱지를 달고 있는 호텔은 웨이터 한 명 조차 허투루 고용하지 않는다. 알바를 고용하더라도 최대한 장기알바를 고용하여 충분한 교육을 받게 한 뒤 실무에 투입한다.
당연한 일이다. 고객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텔을 대변하는 자리에 아무나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쪽 교사진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테니, 그들이 보기에 짧은 기간이나마 비교적 부담이 적은 환경에서 실무 비슷한 것이라도 체험하는 데에 성심고의 학교 축제가 안성맞춤이었다는 뜻이겠지.
우리는 우리대로 노동력을 얻고, 저쪽은 경험을 쌓고. win-win이다.
'덤으로 나도 편하고.'
전문적인 접객 교육을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업무능력은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런 교육을 받은 인원이 홀을 맡아준다면 주방의 장인 나도 훨씬 일이 수월해지리라.
"그나저나 너네는 어떻게 돼가? 준비 잘 하고 있어?"
"뭘 또 묻고 그러십니까. 메뉴 구상까지 다 끝난 거 알고 계시면서."
"아니, 그거 말고."
"?"
그거가 아니면 또 뭐가 있다고.
"너네 반 말이야. 듣기로는 1학년 중에 식당 준비하는 애들이 있대서 우리 사이에서도 꽤 화제야. 올해에도 역시 간이 부은 애들이 있다고."
"아."
그쪽이었나. 하긴, 당장 가족 중 한 명이 정보 소스일 테니 알려질 만도 하지.
뭣보다 여태껏 이 학교에서 먹거리로 축제 준비를 하고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학급은 전례를 따져 봐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봐도 식당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면 눈에 띄는 게 당연하다.
"학교 입구 근처에 준비하고 있는 포장마차, 너네 거 맞지?"
"예. 맞아요."
"입구 근처는 상급생들도 잘 못 받는 자린데, 용케 땄네?"
"1학년 팀장 아닙니까, 이래 봬도."
권리가 있는 만큼 책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쥐어져 있다는 건 참으로 달콤한 일이다. 어지간한 학급이었으면 교사 선에서 막혔을 안건도 재깍재깍 처리되고, 얼마나 좋아.
"뭘 보여줄지 모르겠지만…… 괜찮겠어?"
"아무렴요. 오히려 긴장은 저희가 해야 할 걸요?"
이미 내 손을 떠나도 모든 게 완벽하게 돌아가도록 시스템 구축이 끝난 지 오래다.
그 말은 즉, 대회반 일정을 위해 나를 비롯한 대회반 일행이 떠나더라도 전력에 저하가 없을 우리 반 전체를 축제 내내 맞상대해야 한다는 것.
긴장을 풀면 오히려 묻히는 건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
"오, 자신감. 그래도 명색이 대회반인데 맥없이 깨질 순 없지. 기대할게."
"얼마든지요.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왠지 3학년 선배들을 못 본 것 같지 않아요?"
축제 대비 대회반 합동 미팅 이후로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2학년하고는 제법 자주 함께 연습하는데 말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보통 점심시간이나 교실 이동 수업 때면 보통 하루에 한두 번은 만났는데, 요즘은 통 보이질 않으니.
"선배들? 어……."
잠시 말꼬리를 늘리던 선배는, 이윽고 어딘가 안쓰러운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 5일치 배달 음식 값이 대회반 경비에서 빠져나갔다는 것만 알려줄게. 아침, 점심, 저녁, 야식까지 전부."
오.
그것 참. 미래를 생각하면 달갑지 못한 답변이었다.
***
요즘 학교에선 수업 시간 중 일부를 축제에 대비한 준비 시간으로 쓸 수 있게끔 여건을 마련해준다.
덕분에 공간이 넓어 무엇으로든 활용하기 편한 대강당이나 운동장 등에는 인파가 몰려 북적북적 정신이 없지만, 반대로 평소 수업시간 때 사용하던 공간은 한적했다.
그래, 우리 반 아이들이 모인 이 실습실처럼 말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축제 때 요리를 준비하는 학급은 극소수. 그렇기에 실습실 또한 비어 있는 때가 많아 다른 공간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어느 의미 이쪽도 블루오션이란 말이지. 뭐, 그 파란 바다를 차지한 게 죄다 고래 밖에 없으니 블루오션이 곧 블루칩으로 이어지진 않겠다마는.
아무튼, 우리는 축제 때 만들 요리를 연습하기 위해 온 것이고. 메뉴 구상을 주축으로 한 게 나인만큼 그걸 다른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내가 할 일이지만. 그 전에 먼저 해둬야 할 일이 있다.
"일단 조를 세 개로 나누자."
"조를 나눠? 왜?"
"어차피 반이 다 같이 하는 거잖아. 조는 왜 나누는 거야?"
타당한 의견인데,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뭐 하루 종일 반에서 하는 거에만 붙어 있게? 축제 구경 안 다녀?"
아무리 학생들이 직접 계획하고 실행하는 축제라지만, 정작 학생을 위한 축제를 본인들이 즐기지 못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나야 뭐, 대회반은 그런 것도 감안 해야 하는 거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납득 했다는 듯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는 아침 10시부터 입장해서 저녁 6시까지가 기본 스케줄이야. 이걸 3교대로 돌린다. 이의 있는 사람?"
없었다.
"1조는 오픈 전 준비부터 12시까지. 2조는 다른 조보다 먼저 점심 먹고 12시부터 3시까지. 3조는 3시부터 마감까지 각각 맡으면 돼."
지난 지옥주를 통해 조별 행동에 요령을 붙인 아이들이니 걱정은 한 시름 덜어도 될 것 같아 다행이다.
조원 선정은 지원자를 중심으로 최대한 형평성에 맞췄다.
오픈 준비나 마감은 어차피 다 같이 모여서 하겠지만 1조의 경우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등교해야 하기 때문에 기숙사에 사는 아이들이 먼저 자리를 채웠고, 2조나 3조는 그냥 평소 친하게 지내는 애들이 먼저 뭉텅이로 자리를 잡으니 알아서 분배가 되더라.
4인방 중 대회반 일로 빠져야 하는 나를 제외한 김철정, 양희연, 나현주는 모두 1조. 전원이 기숙사에 사는 덕에 일어난 우연 아닌 우연이었다.
조 선별을 포함한 선행과제가 일단락 된 뒤. 우리는 비로소 요리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을 위해 조리도구를 꺼내며 준비를 시작하는 아이들.
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준비를 할 수 없다. 우리가 고안한 메뉴는 이 주방에 있는 도구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특별한 놈이니까.
"현주야, 헬프."
"? 응. 알겠어."
그리고 내가 가져온 이놈이, 바로 그 특별함을 완성시켜줄 가장 중요한 녀석이다.
가로, 세로가 70CM에 높이는 1,5M나 되는 커다란 철제박스.
잠금을 풀고 커버를 위로 들어 벗겨내자, 그 웅장한 모습을 본 나현주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와아……."
"어때, 죽이지?"
하단에 깔린 둥그런 원판과 그 위로 서양식 양날검처럼 솟은 길쭉한 말뚝.
원판 아래에는 본체에 장착했을 때 체결되는 커다란 톱니바퀴.
그리고 말뚝 주변을 감싼 총 다섯 개의 판넬.
"외장만 따져도 무게 20KG, 균형추와 모터가 달린 이동식 본체까지 합치면 총 무게만 60kg에 가깝지. 5중 가스 열선에 상중하 3단 온도 조절 기능, 3단계 회전속도 조절 기능, 한계 중량 300kg을 자랑하는 말 그대로 몬스터 머신이야. 괴물이지."
주말 내내 시간을 들인 끝에 간신히 찾아낸 물건이다.
설마 있을까 해서 학교 설비실을 뒤지다가 이게 튀어나왔을 때는 말 그대로 경악했다. 아니, 대체 왜 학교에 이런 게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무리 좋은 조리도구도 실제로 쓰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이 녀석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나현주. 너를 포함한 판매대 담당 세 명은 축제 전까지 이 녀석 사용법을 죽어라 익혀야 된다. 고기 적층법, 조립법, 분해법, 조작법, 고장 시 대처법, 그리고 마감 후 점검법도. 수리법까지 익히라는 말은 안 하겠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돼. 이놈은 주방 기계 중에서도 중장비라고."
"…… 알겠어."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킨 녀석이 내게 물었다.
"이거, 이름이 뭐야?"
"이름?"
녀석의 경직된 말투에 점점 흥분이 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오래 대화를 나눈 상대가 아니라면 눈치채기 힘들만큼 작은 변화이긴 했지만, 이 녀석이 그만한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름…… 흠, 이름이 꽤 여러 개야."
"여럿?"
"어. 뭐, 슈와마 머신이니 스핀 바비큐 머신이니 이런저런 이름이 있긴 하지만……."
아마 그중에서 한국인한테 가장 익숙한 이름은 이거겠지.
"케밥 머신."
"…… 직관적이네."
"그거 하나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니까."
칼이니 오븐이니 튀김기니, 그런 기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케밥. 그중에서도 되네르 케밥이라는 한 종류의 요리만을 만들기 위해 설계된, 그야말로 전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다.
전용기라. 뭔가 찡해지는 단어다.
남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요리사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을 위해서……."
그 말에 나현주 또한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던 걸까, 녀석의 반짝이는 눈빛이 케밥 머신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 감성 참 특이하단 말이지.'
원체 특이한 녀석이라 이제 와서 그런 게 신경 쓰이는 건 아니지만.
"좋아. 구경 끝났으면 슬슬 시작하자."
우리 1반이 준비한 축제 프로그램. 되네르 케밥을 만드는 연습을 시작할 시간이다.
"각오 단단히 해라. 전문가도 제대로 못 다루는 사람이 수두룩한 놈이니까."
신신당부하는 내 말에 맞춰 당혹스런 눈빛을 보내는 나현주.
그런 녀석을 마주 보며 난 그저 웃을 뿐이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똑똑히 알게 해줄 테니까.
딱히 내가 대회반으로 런할 예정이라 이렇게 힘든 메뉴를 고른 게 아니라는 걸 부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