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어셈블.-3-
점심시간.
혼란한 학급 출품 프로그램 상의 시간을 어떻게든 마치고 식당으로 온 우리 4인방은 여느 때처럼 둘러앉아 식사에 매진하고 있다.
……아니, 거짓말이다. 지금 우리 중에 식사에 매진하고 있는 녀석이라곤 자기가 좋아하는 면요리가 나왔다며 식판에 얼굴을 박고 있는 철정이 밖에 없었다.
나, 양희연, 그리고 나현주는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식판을 뒤적이며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다.
얼마 전 내가 했던 말이 있다.
우리 학교 축제에서는 생각보다 요리 관련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그런 걸 하는 놈들은 뭘 모르거나, 아니면 간땡이가 부은 녀석들뿐이라고.
이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내 스스로도 이 말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에서 뭘 하든 좀 편한 걸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고.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 반 놈들은 내 예상 이상으로 뭘 모르는 간땡이가 부은 놈들이었던 것 같다.
"설마 다른 의견은 듣지도 않고 바로 콜을 때릴 줄이야……."
뜬금없는 나현주의 의견 제시에도 놀랐지만 그걸 망설임도 없이 받는 반 아이들만큼 놀랍지는 않았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받은 거지? 잘못하면 대회반이랑 비교돼서 웃음거리 신세일 텐데?
"니 때문 아이가?"
풀리지 않는 의문에 속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나를 보며 양희연이 툭 말을 던졌다.
"뭐? 왜?"
내가 뭘 했다고 여기서 갑자기 이 상황을 내 탓으로 돌리는 거지?
"아니, 니가 아이라 니들이네. 실수실수."
"너네?"
여기서 나와 함께 묶여서 불릴 사람이라곤 같이 앉아 있는 이 녀석들 뿐인데, 양희연이 지칭하는 대상은 그게 아닌 듯했다.
"마, 함 봐라. 학교 아들이 요리로 뭐 안 할라 카는 거 대회반 때문 아이가."
"그렇지."
"그럼 반끼리 힘 합쳐서 해가 대회반 만큼 용케 한다 치믄 안 할 이유도 없다 안 하나."
"……그것도 뭐, 말은 맞는 말인데."
그게 쉬웠으면 대회반 컷이 그렇게 높을 리가 없지 않을까?
의아한 눈빛을 향하자 양희연은 아직도 이해를 못 했냐는 듯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문디야. 생각을 해라, 생각을. 니 우리 반에 그 대회반이란 놈들이 몇이나 있는 줄 아나?"
"……아."
맞다.
우리 반은 지금 대회반 설립 이후 최초로 대회반 소속 학생을 세 명이나 보유한 학급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1학년 팀 중에서도 핵심 전력인 세 사람 전원이 말이다.
"대회반이 뭐 다 니 같은 아만 있나? 혼자 열다섯 사람 몫 정도 하나?"
"어……. 아니."
"봐라. 너랑 그 가시나랑 안가 놈까지 여 다 있고 거기에 사람 머릿수만 서른이다. 니는 이런데 쫄리겠나?"
어라. 반박할 수가 없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만 해도 대회반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할 뿐이지 경험을 떼놓고 본다면 실력은 분명 대회반 수준이다. 아니, 그 작은 차이마저 저번 부산에서 했던 대회로 메꿔졌을 테니, 실질적으로 우리 반의 전력은 대회반 1학년 팀과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는다.
아니, 꿇리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인력의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앞서 있다.
"니는 다 좋은데 가끔 띨빵하게 굴어서 문제다."
"……."
젠장. 할 말이 없네.
어, 어쨌든 그건 그거고. 아직 남은 수수께끼가 하나 더 있다.
"현주야."
"응?"
나현주. 평소에는 쥐죽은 듯……. 아니, 무슨 천하대장군 마냥 말은 없어도 자체로 존재감을 뿜어대는 이 녀석이 왜 갑자기 나선 건지, 그 이유를 우리는 아직 모른다.
학교 내에선 나현주와 가장 가까운 친구인 양희연 또한 굳이 묻지는 않아도 못내 궁금한 눈치였다.
국물에 퉁퉁 불어 이제는 들어 올리기만 해도 뚝뚝 끊어지는 면발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국수가 아니라 죽으로 만들어 버린 나현주가 비로소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게……."
"?"
"축제 때 아빠가 오신대서……."
……고작 그것 때문에?
나와 양희연의 황당하단 시선 앞에서, 나현주는 붉어진 얼굴로 애꿎은 국수만 괴롭힐 뿐이었다.
***
나현주는 어릴 때부터 특별한 아이였다.
면학이나 예술, 뭐 그런 행동하는 방면에서 두드러지는 재능을 발휘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가진 재능은 신체 그 자체였다.
초등학생 때 이미 중학생 수준은 뛰어넘었고, 그저 성장이 빠를 뿐 곧 성장판이 닫힐 것이란 의사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키는 날로 커졌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에는 체육 교사가 부디 진로를 다시 생각해달라고 빌 정도였다.
하지만 신체적인 축복이 그녀에게 도움만 된 건 아니었다.
주변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넘도록 큰 신장 탓에 주위와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런 환경에서 성장해오며 과하다시피 내성적인 성격이 됐다.
나현주의 아버지, 나동석은 그런 나현주를 향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압도적인 피지컬 덕에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신나게 쇼핑이든 뭐든 하며 아빠 속을 썩이는 재미를 주었을 아이가 허구한 날 운동장에서 쇠질만 하고 있으니, 그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나동석 본인도 일반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흉악한 인상을 하고 있던 사람인지라 나현주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그 자신은 남자였기에 비슷한 처지끼리 모인 친구라도 있지만, 여자아이에겐 힘든 일이라는 것 또한 문제였다.
그렇게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은 흘렀고, 결국 나현주가 중학교를 졸업할 날이 점점 다가왔다.
이맘때쯤, 그녀는 요리사라는 꿈을 갖게 됐다.
나동석을 통해 발골 기술과 고기의 취급법, 구분법, 판별법 등을 배우고, 그를 따라 수많은 식당을 다니며 하나의 고기가 이토록 다채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나현주는 그녀의 인생 최초로 고집을 부려 나동석의 인맥을 통해 갖은 식당을 돌며 요리를 공부했고, 노력은 성심고 입학이라는 결실로 돌아왔다.
나동석 또한 자신의 딸이 달라지리라는 믿음에 물심양면 전적으로 그녀를 도왔다.
축제는 그런 아버지가 학교에서 생활하는 자신을 처음 보러오는 날이다.
그런 자리이니만큼 조금 더 당당해지고, 조금 더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게 바로 나현주가 무리를 해가며 주도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였다.
"어……."
"음……."
나현주의 이야기는 제법 함축된 면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찬혁과 희연은 말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 다 그다지 순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낀 탓도 있었고, 그에 더해 어딘가 순수하기까지 한 동기에 별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 땜시 이기 뭐꼬. 분위기 봐라."
"아니 이게 왜……. 아니다. 미안."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두 사람이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눴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이야기를 듣느라 식판에 담긴 국수는 이미 나현주의 식판에 담긴 것 못지않게 퉁퉁 불어 식은 지 오래.
먹는 시늉이라도 하려 수저를 들었던 찬혁은 국수의 상태를 확인하곤 깊은 한숨과 함께 수저를 내려놨다.
"그……. 미안. 괜한 이야기 하게 만들어서."
"아니야. 별로 나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두 사람은 나현주가 강한 척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착각이었다.
실제로 나현주는 친구만 없었다 뿐이지, 무언가 괴롭힘을 당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녀 자신은 혼자 조용히 지내는 생활에 어딘가 만족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동석은 불만이었을지 몰라도 나현주 본인은 학업이 끝나면 담담히 쇠질을 하는 목가적인 헬스의 나날이 싫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
다만, 요즘에 들어선 친구와 사귀는 것, 여럿이 함께하는 생활에 재미를 붙인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나현주는 그런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타입의 인물이 아니었고, 그덕에 찬혁과 희연은 신나게 착각의 늪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저를 내려놓은 채 깊은 고민에 빠져 책상을 두드리고 있던 찬혁이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눈빛에 양희연과 나현주가 의아해하기도 잠시, 그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래. 부모님 오시는데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지. 현주 너 하고 싶은 거 있어?"
"하고 싶은 거? 왜?"
"일단 이대로 가면 분명 메뉴 구상도 우리가 주축일 테니까 우리 의견을 많이 반영해 줄 거야. 그러니까 미리 의견 조율해두면 어느 정도 네가 원하는 구성을 맞춰줄 수도 있어."
희연이 듣기에도 찬혁의 의견은 타당했다.
애당초 반 아이들이 망설임 없이 식당 프로그램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반쯤은 찬혁과 백예은, 안창민이라는 대회반 3인조의 존재 때문이었으니, 구성도 그들의 의견 위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나현주는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잠시 답변을 망설였지만, 본인도 나름 생각해놓았던 계획이 있다며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럼……."
"그럼?"
"되도록 커다랗고, 웅장하고, 무거운 거?"
"커다랗고, 웅장하고, 무거운……?"
음식에 대한 수식어로는 조금 이상한 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한 찬혁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사이즈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데? 마냥 크다고만 하면 감이 잘 안 잡혀서."
"내가 같이 옆에 서도 신경도 안 쓰일 만큼 큰 게 좋아."
"아니 그건 좀……. 아니, 아니다.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봐."
무심코 입을 뚫고 나올 뻔한 부정적인 답변을 간신히 되삼킨 찬혁은 다시 한번 고민하기 시작했다.
크고, 웅장하고, 무거운.
그 세 단어를 돌림노래처럼 입에서 되뇌던 찬혁은, 이윽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주먹을 쥐고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 좋다. 마침 딱 좋은 게 하나 있네."
"응?"
"크고, 웅장하고, 무거우면서 사람 한 명 정도는 간단하게 압살할 수 있는 요리 같은 건 세상에 몇 없지만, 마침 우리 조건에 딱 맞는 게 하나 있거든."
"진짜가? 그런 게 진짜 있다꼬?"
"믿어봐. 아주 깜짝 놀랄만한 게 있으니까."
평소에는 자주 짓지 않는 찬혁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묵직하던 분위기를 흩어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젠 내전이다. 축제를 터트릴 기세로 해보자고."
찬혁은 보통 학급이 주도하는 행사에 참여할 때엔 한 사람 몫 정도만 해내면 충분하다 여긴다.
하지만, 트롤링을 할 때에는 이 학교의 어느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한다.
찬혁은 지금 학교를, 관객을 상대로 제대로 된 트롤링을 저지를 생각으로 가득했다.
"들어올 땐 빈속이었지만 나갈 땐 아니지. 자기 손으로 배를 터질 때까지 채우게 해주마. 아주 걷지도 못할 만큼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음흉한 웃음을 짓는 찬혁을 보며 희연은 생각했다.
'아, 얘 혹시 피로에 절어서 머릿속 스위치가 마침내 터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덧붙여. 처음부터 대화에 별 관심이 없던 김철정은 끝끝내 세 번째 리필에 성공한 뒤 식판을 들고 자리로 되돌아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