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어셈블.-2-
교장 선생님을 대동한 대회반 미팅이 끝난 뒤, 나는 1학년 팀을 따로 모아 일종의 후속 미팅을 열었다.
"아아, 이제야 좀 쉬나 싶었는데."
"투정 부리지 마. 받은 게 있잖냐."
"혁이 넌 맨날 멀쩡해. 몸이 철로 되기라도 했어?"
"꾸준한 운동과 좋은 식습관을 가지면 항상 몸이 건강한 법이다."
"나는 운동 조금만 해도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몸 가누기도 힘들단 말야."
"…… 아, 그러냐."
듣기만 해도 전 세계의 여성을 적으로 돌릴 것 같은 넋두리를 담아 불평하는 백예은에게 잠시 싸늘한 눈길을 보냈으나, 이내 다시 거둬들였다.
"……."
"……."
저기 나 말고 더 화나신 것 같은 분이 두 분 계시거든.
싸늘하다 못해 예리한 안광을 번뜩이는 송지영과 여준기에게서 억지로 눈을 돌리고 여태 아무 말도 없이 잠잠한 안창민에게 말을 돌렸다.
"야,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안 거냐?"
"뭘?"
"왜, 그…… 집 짓는 거 어쩌구 하는 말."
"난 또 뭐라고. 너 그 말 하는 거 인방에 그대로 나왔던데."
"뭐?"
아니, 이유나 그 양반 설마 그때까지 계속 방송 중이었던 건가. 어째 보조배터리를 몇 번이나 교체한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너 그런 것도 보는구나."
"…… 요즘 인터넷 방송 안 보는 애들도 있냐. 그리고 그건 누나가 보래서 본 거야. 평소엔 외국 쪽 요리방송 말곤 안 봐."
어째 급하게 말을 돌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어차피 나나 얘나 더 파고들어봤자 서로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아서.
"그래, 아무튼. 일단 모인 이유부터 좀 설명하자. 다들 아까 교장 선생님 말씀 잘 들었지?"
1학년 일동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슬슬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시간은 끝났단 걸 직감한 것이리라.
"우선 미리 말해두겠는데, 다들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그건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준비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 탓도 있지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
성심고 축제가 지역의 명물인 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역 주민만 우리 학교의 축제를 구경하러 오는 건 아니다.
성심고는 일단 실업계 학교고, 거기다 교육능력 하나만큼은 세계구급으로 인정받는 학교이기 때문에 이 학교의 졸업생은 대부분의 업장에서 즉시전력으로 보이는 일이 많다.
오죽하면 진학을 선택하지 않은 졸업생들의 이듬해 취업률이 20%에 가까울까.
'이나마도 남자 같은 경우에는 군대 사정이 껴서 자기가 취업을 안 하는 거고.'
참고로 대회반의 경우에는 각 기업끼리 스카우트하겠다고 경쟁하는 구도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괜히 대회반이 학교의 얼굴이라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그만큼 뜨거운 경쟁 속에서 자기 자리를 보전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뭐 아무튼, 대충 그런 사정이 뒤섞여 우리 학교 축제에는 지역 주민만큼이나 업계 관계자가 오는 일도 잦다.
거기다 이 학교 출신에서 유명한 셰프가 한두 명이 아니니, 가끔 정말 유명한 졸업생이 놀러 오는 경우에는 방송국에서 촬영도 온다.
요컨대 학교 축제 때에는 외부의 시선을 굉장히 많이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노출도가 높으니까.
"꺄악, 혁이가 못된 말 한다!"
"지영아. 처리해."
"예스, 캡틴."
"읍……!"
내 한마디에 사족을 덧붙이는 백예은의 얄미운 입을 이전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송지영이 틀어막았다.
음, 조용한 게 아주 좋구만. 공로자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말을 이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번 가설식당 이벤트를 평범한 학예회 수준으로 끝내선 안 돼. 돈은 받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벤트를 열고 있는 동안만큼은 진짜 가게를 개업했다는 생각으로 해야 할 거야."
보통은 고작 학생에게 프로 수준의 역량을 기대하지 않겠으나 우리 학교는 궤가 다르다.
프로 수준의 역량이 아니라, 어지간한 프로를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야만 한다.
그게 바로 대회반의 존재 이유니까.
"메뉴 구성은 우선 중간고사가 끝난 뒤에 하자. 다들 다음 주 금요일 오후에 시간 비워줘."
"알겠어."
"오키."
"좋아. 그럼 오늘은 이만 해산하자. 다들 시험 준비는……."
말꼬리를 흐리며 일동을 둘러보니, 다들 눈에서 자신만만이라는 네 글자가 홀로그램을 쏘는 것 마냥 비추는 게 보였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해.'
여기 있는 놈들 중 중간고사를 걱정하는 녀석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교과목 필기시험이면 몰라도 실기라면 특히.
그 이상 무어라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해산! 다음 주에 보자."
***
일주일이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중간고사 시험이 끝난 직후에도 혼자 기숙사와 주방을 오가며 과연 이 이벤트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며, 시험으로 이것저것 메뉴 개발도 하다 보니 시간이 남아날 틈이 없었다.
오죽하면 철정이 녀석이 매번 새벽 늦게까지 책상에 붙어 있는 날 보고 학을 뗄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인 덕분에 나도 가설 식당의 기초 컨셉을 구상해낼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1학년 일동의 손에 쥐어졌다.
"이건 뭐야?"
"매장 컨셉?"
"적당히 기초만 잡아둔 거야. 너네랑 상의하면서 하나씩 고쳐야지."
"인테리어부터 메뉴구성까지…… 이 정도면 기초를 끝낸 수준이 아니잖아."
"이걸 중간고사 치면서 혼자 준비한 거야?"
"힘들었을 텐데……."
"팀장 아니냐. 이럴 때 고생하라고 팀장도 하는 거지. 됐으니까 얼른 쭉 봐봐."
컨셉에 대한 감상보다 앞서 감탄하기 바쁜 일동이었지만, 내가 재촉하자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난 녀석들답게 재빨리 요점을 알아채고 질문을 꺼내 들었다.
"기본은 양식에 두고 있는 거구나. 이유는?"
"그게 축제 환경에 제일 좋을 것 같아서. 축제 때는 관객한테 돈을 받긴 해도 명목상 받는 거지 해봤자 입장료 수준 밖에 안 받잖아. 그러면 당연히 손님이 몰릴 텐데, 양식은 퀄리티를 수준 이상으로 지키면서 대량으로 준비할 수 있는 메뉴가 다양해."
"오케이. 납득."
고개를 끄덕이는 백예은의 뒤를 이어 안창민이 입을 열었다.
"메뉴는 코스 메뉴? 단품인 편이 낫지 않아?"
"관객은 뭔가 평소랑 다른 체험을 하고 싶어서 축제에 오는 거 아니겠냐. 코스 요리 쪽이 참신하고 임팩트가 클 거야. 대신 규모를 축소해서 전채, 메인, 디저트만 취급할 거고."
"그런 것 치곤 구상한 메뉴가 좀 많은데…… 아, 코스 대분류를 나누려는 거구나."
"정답. 미트, 시푸드, 비건 메뉴를 따로 구상했어."
"비건까지? 그건 좀 과한 준비 아니냐?"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세상에 손님이 얼마나 다양한데. 채식주의자 분류까지 따져가며 안 만든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뭐야 그게, 분류 같은 게 있어?"
"있다. 나도 이해는 잘 못 하겠지만 소, 돼지처럼 네 발 달린 것만 안 먹는 플로 페스코나 고기는 전부 안 되지만 유제품이랑 계란은 먹는 락토 오보 같은 분류도 있고, 정말 채소랑 과일만 먹는 비건은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일부뿐이야. 심하면 채소도 안 먹고 과일만 먹는 사람도 있다더라."
"세상에, 말도 안 돼. 난 고기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가던데……."
"넌 좀 심해. 아무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는 법이야. 내일도 그런 손님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고."
참으로 끔찍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짓씹는 여준기를 보며 나도 고개를 저었다.
채식주의자의 세계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는 내 말에 다른 아이들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건의하여 고칠 건 고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조언을 해준 팀원 덕분에 계획도 완성에 다다랐다.
이제 토론은 슬슬 마무리 지어도 좋다고 생각될 때쯤이 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토론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아이들은 주홍빛 햇살이 창문에 족적을 남기는 것을 본 뒤에야 하나둘 장난스럽게 불평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와 씨, 시간 늦은 거 봐. 점심도 못 먹었는데 저녁까지 같이 해결해야 하게 생겼네. 너무 서두른 거 아냐?"
"넌 하루 정도는 안 먹어도 상관없지 않아?"
"하루에 세 끼 먹고 사는데 한 끼를 거르면 하루의 3분의 1을 손해 보는 거야!"
"좀 손해를 보고 살아! 맨날 이득만 보려고 하니까 뱃살이 뒷돈 챙기는 거 안 보여?"
"무, 뭐라고?"
와, 이건 딜이 좀 아프게 박혔는데.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여준기를 말리곤 분위기 환기를 위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자자, 그쯤 하고. 서두른 이유가 있긴 해."
"응? 뭔데?"
"우리가 할 일이 이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다음 주에는 반에서 준비하는 프로그램도 같이 참여해야 되는 거 알지?"
"아."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 일동이 탄성을 터트렸다.
"힘들 거라고 했잖아. 기초 컨셉을 오늘 완성해놔야 연습이든 뭐든 할 시간이 생겨. 레시피 직접 만들면서 수정할 시간도 필요하고. 그래서 좀 서두른 거야."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팀원들.
이쯤 했으면 상의는 충분하다. 나머지는 주말에 내가 정리해서 제출하면 끝이다.
"좋아, 오늘은 이만 가고 다음 주부터 방과 후에 연습 시작하자. 해산!"
"끝났다! 으으, 시험 끝나자마자 이러고 있으려니까 되게 뻐근하네."
"다들 잘 들어가고."
머리를 맞대고 있던 일동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도 뒤이어 일어섰다.
안 그래도 피로가 좀 쌓인 참인데, 시험도 끝났으니 좀 푹 쉴 수 있겠지.
"아, 혁아! 기숙사 들어가?"
그런데 얌전히 돌아가려던 나를 백예은이 붙잡았다. 의아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니, 백예은은 배를 꾹 쥐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어, 왜?"
"혹시 석식 신청했어?"
"아니."
"그럼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점심도 못 먹어서 되게 배고파."
"…… 혼자 가면 되는 거 아니냐."
"혼밥할 때 음식 많이 시키면 눈치 보인단 말야."
"대체 얼마나 먹을 생각인데 눈치까지 봐?"
"점심에 못 먹은 것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거야!"
"…… 아, 그럼 좀 보이겠네."
한 끼를 워낙 많이 먹는 녀석이니.
바로 방금 있었던 여준기와 송지영의 대화가 떠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떨쳐냈다. 얘는 일반인 기준 두 끼는커녕 하루 아홉 끼를 먹어도 살이 안 찔 녀석이라.
그런 백예은을 보는 여준기와 송지영의 눈이 다시 한번 날카롭게 빛을 뿜었다.
***
나는 기본적으로 반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은 아니다.
물론 트롤링을 할 때야 정말 열과 성을 다하지만, 반이 합심해서 하는 일은 적당히 1인분만 해내자는 모토로 임하기 때문이다. 내 공부에 대회반까지 바쁜 일이 한가득인데 누굴 주도할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아이들 몇 명이 합심하여 반을 주도하기 시작하면, 적어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기만 해도 반은 간다.
적당히 낄끼빠빠를 잘하는 타입. 그게 나에 대한 평가다.
근데 이런 나보다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 녀석이 있다.
시종일관 조용하고, 학급행사에서도 잘 앞으로 나서지 않는 탓에 좋은 본판을 두고 어째 존재감이 없는 녀석.
나현주를 말하는 것이다.
키는 곧 180을 찍을 듯하고, 어딘가 싸늘한 인상 탓에 처음 보면 조금 무서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살짝 어벙한 면이 있는 녀석.
현주가 먼저 말을 거는 대상은 아마 반에서 우리 4인방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혹시 이번 축제 때 반에서 이런 걸 했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 있어? 있으면 손을……."
"나. 하고 싶은 거 있어."
"…… 어? 현주 네가?…… 아, 아니. 어. 말해봐."
다른 것도 아니고 축제 때 반에서 할 프로그램을 모집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들다니, 평소 저 녀석의 모습을 아는 나로선 상당히 뜻밖이었다.
반장이나 다른 아이들의 당황스런 기색을 보면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지만, 나현주는 당당히 손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식당하자, 우리."
그 당돌한 제안에 한층 더 당황스러움을 더해가는 교실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두야.
겸업 에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