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61화 (161/403)

161. 어셈블.-1-

웜업warm up이라는 단어가 있다.

단어의 뜻 자체만을 해석한다면 따뜻하게 데운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쓰이는 의미는 사람이나 기계가 격한 운동에 앞서 준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제대로 웜업을 해주지 않는다면 부상이나 고장이 발생할 확률이 대단히 높아지므로, 결코 빼먹어선 안 될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느냐.

"일장춘몽…… 일장춘몽의 꿈을 꾸었도다……."

"아빠한테 대들고 눈으로 욕먹으면서 연휴 내내 쉬기만 했는데……."

"아니야, 이게 현실일 리 없어. 누가 팽이 한 번 돌려봐. 아님 발로 차줘 봐."

바로 이렇게, 웜업 없이 격렬한 현장에 투입된 인력이 어떻게 소모되는지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도 기계도 휴식은 필요하지만, 사람은 기계와는 달리 너무 오랜 휴식을 취하면 몸이 편안함을 기억한다. 그 결과가 바로 이거다.

연휴라는 천국에서 진로탐색 수업이라는 지옥으로 다시 끌려와 2주라는 시간을 고통 받은 아이들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얘들처럼 앓는 소리라도 하는 녀석들은 오히려 상위권에 속했고, 나머지는 하교 시간이 지났을 때가 돼서도 입도 벙긋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연휴 시작 전에 한 것까지 쳐줘서 일찍 끝났으니 망정이지, 진짜 2주 꽉 채웠으면 어쩔 뻔했어."

"야, 끔찍한 소리 마라 진짜."

정말 그랬다간 바로 땡땡이 각을 잡았을 거라며 김철정이 넋두리를 흘렸다.

"그런데 너네는 왜 그렇게 쌩쌩하냐. 안 힘들어?"

"우리? 우리야 쉬고만 온 게 아니니까 그렇지."

"그러고 보니 대회 나갔었다고 했지? 둘이 같이 나간 거였어?"

"어."

반 아이들이 다 같이 뻗은 와중에 그나마 멀쩡한 몇 사람 중에는 나와 양희연 또한 끼어 있었다. 대회로 경험치를 쌓고 돌아온 뒤, 진로탐색 수업 내내 붙어 있다가 일식이 돼서 그림처럼 갈라진 우리.

사실 우리 반 애들이 이토록 고생한 이유의 절반쯤은 나와 그 녀석한테 있을 것이다. 뭐, 결국 우리가 판정승을 하긴 했지만.

그나저나 그거 TV, 인터넷 가리지 않고 방송했을 텐데.

꼭 보라고 하진 않겠지만 문화생활을 조금은 영유하라고 하고픈 심정이다. 좋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거 볼 시간이 어딨어. 밀린 게임이 몇 갠데."

"아, 그래."

온라인은 하지 않는 패키지 게임 외곬수의 근성이 돋보이는 한마디였다. 하긴, 그쪽 방면으로도 좋은 시대긴 하지.

"그나저나 2학기도 벌써 중반이네."

"그래도 큰 행사는 얼추 끝냈잖아. 나머지는 1학기 때랑 비슷한 거 아냐?"

손으로 날짜를 꼽던 김철정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학기마다 하는 현장실습은 중간고사가 끝난 뒤에나 하게 될 거고, 내 기억이 맞으면 이번 현장실습은 그다지 대단한 곳으로 갈 계획은 없다고 했다.

'1학기 때 힘을 너무 쓴 거겠지.'

5성급 호텔 주방이 '우리 애들 잠깐 현장 학습 좀 하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한다고 막무가내로 받아주는 곳은 아니다.

적어도 년 단위의 협상과 적절한 보상안 등이 합쳐져야 겨우 합의가 될까 말까 한데, 그걸 한 해에 두 번이나 돌리는 건 아무리 성심고라도 좀 무리가 있다.

그럼 남은 건 해봤자 다음 주로 다가온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자질구레한 행사 뿐.

지옥주도 끝났겠다. 남은 학기는 조금 힘을 빼고 지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철정이 녀석이 한껏 웃음을 지었다.

"하아, 이 학교도 아주 사람을 잡아 죽이려는 건 아니구나."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는 듯 짐을 챙기기 시작하는 녀석.

하지만, 그런 희망적인 관측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할 게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음?"

누군가 했더니, 어느새 우리 옆으로 다가온 안창민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딴죽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는 인사는 둘째 치고, 어째 짜증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다.

'수업이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안창민의 말에 반응한 건 나와 김철정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늘어져 있던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운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데?"

"뭐, 아마 내일 되면 알 텐데……."

잠시 말을 흐린 안창민이 달싹이던 입을 닫았다.

"됐다. 그냥 아직 힘든 일이 남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아, 그리고 너랑 나는 아마 더할 거다."

"뭐?"

나?

검지를 세워 나를 삿대질한 안창민은 의미심장한 분위기만을 남긴 채 다시 돌아섰다.

"그럼 나 간다. 누나가 빨리 오래서."

"어. 잘가."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할 얘기가 하나 있었는데."

"응?"

"'살아간다는 건 집을 짓는 것'? 말 잘하더라 너."

뭐야. 그걸 네가 왜 알고 있어.

보기 드문 안창민의 웃음기 섞인 표정에 내가 당황하는 틈을 타, 녀석은 금세 교실을 빠져나갔다.

젠장, 왜 괜한 말을 해서는. 뭔가 중학교 2학년 시절 비밀 노트를 남한테 보여준 것 같은 기분에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철정이 녀석이 질문을 건넸다.

"뭔 소리야? 집이 뭐?"

알려고 하지 마. 알면 다쳐.

아무튼, 그렇게 의문과 부끄러움만을 남기고 넘어간 하루.

안창민이 남기고 간 수수께끼는, 녀석이 말한 대로 이튿날에 해답이 밝혀졌다.

"오늘도 수업 받느라 고생 많았어요. 연휴가 끝난 지 벌써 2주나 됐네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다음 주에는 중간고사가 있습니다. 부족함 없이 잘 준비하시길 바라요."

"네."

"좋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전달사항?

중간고사 같은 나름 학기 행사의 대목을 앞두고 전달사항이란 말에 아이들의 눈에서 호기심 어린 빛이 반짝였다.

"11월 첫째 주. 중간고사가 끝나고 2주 뒤죠? 그때 학교 축제 행사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아.

맞다. 그게 있었구나.

"행사는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흘 동안 개최할 예정이고요.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준비하려니 시간이 모자란 게 아닐까 걱정입니다만, 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 안내문을 나눠드리도록 할 거예요. 자, 그럼 오늘 종례는 여기서 마치죠. 여러분 모두 조심히 들어가세요."

출석부를 닫고 툭툭 쳐서 정리한 박예휘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대회반 소속 학생은 휴게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대회반은 따로 볼일이 있거든요."

말을 끝낸 선생님이 교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쥐죽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반 아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학예회?! 야, 뭔 소리야 갑자기?!"

"너 들었던 적 있어? 난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알고 있던 사람이 있으면 벌써 소문났겠지! 갑자기 뭐야 대체?!"

순식간에 패닉상태가 된 교실 구석에서,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학예회라. 젠장, 슬슬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걸 깜박했을 줄이야.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을까. 책상에 얼굴을 박을 기세로 한숨을 푹 내쉬는 내 옆으로 다가온 안창민이 말했다.

"말했지. 너랑 나는 더 고생할 거라고."

묘하게 약 올리는 것 같은 말투였으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수긍할 뿐이었다.

***

보통 한 지역에서 유명한 학교, 예를 들면 홍대 같은 곳에서 개최하는 학교 축제는 그 자체가 일종의 지역 명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학교라는 집단이 수익을 얻는 구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기업이나 재단 등에서 출자하는 스폰싱 등에서 얻는 자금도 분명 있겠지만, 가장 큰 수익은 학생의 등록금에서 나온다.

거기다 성심고 같은 사립학교는 그 비중이 국립에 비해 훨씬 큰 편이니, 등록금을 벌기 위해선 되도록 많은 학생의 입학을 장려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 학교가 이런 곳이다!'라는 홍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홍보 수단 중 가장 약빨이 잘 먹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학교 축제다.

학교 축제 자체가 일종의 광고이니만큼 학교 측에서도 엄청난 금액을 축제에 투자하고,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걸맞게 축제의 질도 투자되는 비용에 비례하여 올라가니, 당연히 학교 축제가 지역 명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성심고도 마찬가집니다."

웬일로 한 자리에 다 같이 모인 1학년부터 3학년을 총망라한 15인의 대회반 학생.

거기에 더해 대회반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교감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까지 합세한 무리의 앞에서 교장 선생님이 화이트보드에 쓴 문구에 밑줄을 치며 강조했다.

"저희 학교에서는 대회반의 교육과 보조를 위해 매년 상당한 투자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건 여러분도 아시는 바겠죠."

"네!"

"그만큼 여러분의 어깨에 걸리는 책임 또한 막중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성심고의 얼굴이에요."

학교가 대회반 소속 학생을 위해 편의를 봐주는 부분은 엄청나다.

다만 세상에 대가 없는 선물은 없듯이, 우리도 그런 학교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 대부분은 대회에 나가 수상하여 학교의 교육 능력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가끔 유별난 일이 몇 가지 생기고는 한다.

그리고 학교 축제야말로 그런 유별난 일이 생기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각 학급이나 동아리는 저마다 자율적으로 준비한 프로그램을 축제 때 선보이게 된다.

뭐, 댄스팀도 있고, 노래 부르는 팀도 있고, 그도 아니면 플래시몹을 하는 반도 있다.

학교에서는 이미 교체하여 사용하지 않는 중고 조리도구 등을 바자회를 열어 팔기도 하고,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연예인 섭외 등을 진행할 때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문제.

이 학교가 무슨 학교일까?

그렇다. 성심고등학교는 조리 특성화 고등학교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가장 많이 준비하는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당연히 가설식당이나 포장마차 등을 여는 걸까?

그 답은 '아니오'다.

이 학교에서 요리를 주제로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거나, 혹은 정말로 간이 크다 못해 땡땡 부은 녀석들 밖에 없다.

그건 기본적으로 이 학교에 재학하는 모든 학생의 요리 실력이 한 가닥 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2, 3학년들은 잘 알 겁니다. 올해에도 우리 대회반은 학교에서 계획한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할 거예요."

그건 바로 성심고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대회반 전체가 총출동해서 요리에 관련된 컨텐츠를 깡그리 잡아먹어 버리기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이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안광을 뿜어내며 우리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우선 1학년. 여러분은 학교를 찾아주시는 분들을 위한 가설 식당을 준비하세요. 팀장."

"옙."

"공사는 학교가 책임집니다. 기구도 전부 준비해드릴게요. 사흘간 일할 스태프도 저희가 구하죠. 30일까지 매장 컨셉과 메뉴를 준비해서 박예휘 선생님을 통해 제출하세요."

"알겠습니다."

쓰읍, 가설 식당이라. 인테리어 교육도 받긴 했지만 처음부터 준비하려면 좀 어렵겠는데.

하지만 이건 아직 약과다. 고학년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2학년은 축제 2일차 저녁에 열릴 파티를 준비하세요. 시간은 여섯 시부터 열 시까지. 캠프파이어 시간 바로 전 타임에 열릴 가장 큰 행사입니다. 대강당을 전부 드리죠. 1학년은 2일차 저녁 전에 가설 식당을 마무리하고 서포터로 들어갑니다. 실수 없도록 단단히 준비해요."

"알겠어요, 할아버지."

"네."

다행히 이쪽은 내 전문 분야다. 일이 겹쳐서 좀 힘들 것 같긴 해도 가장 중요한 준비는 2학년 선배들이 전부 끝내뒀을 테니까, 우리는 말 그대로 조수 역할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그리고 3학년."

"예."

"3학년은 가장 중요한 걸 준비해야 합니다."

한석준 선배가 평소보다 훨씬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막식에 공개될 푸드 아트 조형물을 만드세요. 오늘부터 3학년 대회반 일동은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중간고사도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3주라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만드세요."

"…… 옙!"

와오. 저건 진짜 힘든 건데.

대회에서 임시로 사용할 조형물이라면 모를까 아예 축제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수준의 푸드 아트 조형물이라면 정말로 전문 업체에 의뢰하는 게 나은 업무다.

디자인하고 실제로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푸드 아트 조형물은 크게 만들면 크게 만들수록 보존 처리를 하는 게 어려워지니, 장비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는 이상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걸 학생한테 전권을 주고 맡겨 버리는 교장 선생님의 배짱이나, 그걸 군소리 하나 없이 받아들이는 한석준 선배의 깡이나, 둘 다 대단하단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가즈아아아아!!"

"으아아아아!!"

교장 선생님과 한석준 선배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꼭 감마선을 맞은 녹색거인 마냥 고함을 지르는 3학년 일행.

그 주체할 수 없는 텐션의 비밀을, 나는 알아 버리고 말았다.

"작년에도 그랬듯이, 이번 작품은 3학년 팀원 전체의 졸업 작품이 될 겁니다. 다시 말해, 이번 행사에 여러분의 졸업이 걸려 있어요. 아시겠죠?"

"예!"

졸작이라고? 그럼 인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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