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60화 (160/403)

160. 끝이 없는 것이 끝.-4-

대회가 끝난 이튿날.

나와 양희연은 서울로 돌아가기에 앞서 전날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던 우승 축하 선물 쇼핑을 위해 잠시 부산 시내로 외출했다.

"근데 왜 둘이서만 나가라는 거야."

"와, 내 있어서 불만이가?"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하긴, 얘네 아버지는 가게 영업이 끝난 후 새벽까지 우릴 옆에 앉혀놓고 술을 달리시는 바람에 아직도 꿈나라에서 돌아오질 않으셨고, 성 셰프는 셰프대로 가게 일 때문에 아침 일찍 집을 비우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불만 아니면 빨랑 하고 가자. 이게 우리 마지막 휴일 아이가."

"그러게. 뭐 한 것도 없……지는 않지만."

평화롭지만은 않았던 연휴의 끝도 벌써 코앞까지 다가왔다.

요 며칠 사건사고가 가득하긴 했어도 대미 하나만큼은 화려하게 장식했다는 점에선 제법 후하게 점수를 쳐줄 수 있을 것 같은 연휴였다.

특히, 평소에 사고 싶었지만 가격대가 좀 있어서 살 엄두를 못 내던 사치품을 선물로 받았다는 점에선 가산점이 꽤 들어갔다.

"정말 그걸로 되나?"

"이게 뭐 어때서?"

"아니……. 좀 더 좋은 거 사는 게 낫지 않나? 내는 그쪽은 잘 몰라가 뭐가 뭔진 몰라도 숫자 많이 붙은 게 더 좋은 거 아이가?"

어허, 큰일 날 소리를. IT업계는 그리 만만하지 않단다 아가야. 럭키골드50이 갤럭티카 폴드2보다 좋을 리가 없는 것처럼.

"이미 충분히 비싼 거 샀어. 이것도 살 때 정말 사도 괜찮은 건가 싶어서 좀 망설였다고."

"누가 보면 무슨 명품백이라도 하나 지른 줄 알겠다. 아빠야가 괜찮다 카지 않았드나."

뭐, 당연히 내가 산 건 그런 비싼 물건은 아니었다. 그보다 한참 급이 낮은 30만 원 대 보급형 태블릿을 샀을 뿐이다.

세상이 참 편해졌다. 예전에는 돈을 줘가며 가르쳐달라고 빌어도 국물도 없던 예전에 비하면, 최근에는 한 번의 조회수, 한 명의 구독자를 갈구하며 자신의 비법을 떡하니 공개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 태블릿도 그런 정보를 조금이나마 더 편하고, 큰 화면으로 보기 위해서 산 것이다. 10cm로 보는 화면과 20cm로 보는 화면에서 얻는 정보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니까.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해도 내 돈으로 사기는 뭔가 아까워서 여태껏 손가락만 빨던 물건이다.

'조리기구 사는 데 백, 이백은 팍팍 쓰면서 이런 건 좀 인색해진단 말이지.'

컴퓨터와 핸드폰을 제외한 전자기기는 직업적으로 필요한 게 아니면 사치품이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대에 수백을 호가하는 오븐이 나 같은 요리사한테는 필수품이어도 평범한 일반인 입장에서 보면 사치품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너야말로 뭐 안 사도 돼?"

그보다도 내가 신경 쓰이는 건 희연이 녀석의 상태였다.

녀석은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내내 딱히 뭘 구경할 생각도 없이 내가 전자기기 코너에서 이리저리 구경하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뭐라고 할까……. 꼭 정신이 딴 데 있는 사람처럼.

보통 여자랑 쇼핑하러 가면 남자는 끌려 다니는 짐꾼 신세라는 동서양 공통의 유머가 있는데, 이 녀석한테는 그게 오히려 반대로 적용된 것 같았다.

"뭐 백을 살까 구두를 살까? 당장 내일부터 학교 갈 긴데 사봤자 어차피 쓰지도 몬한다. 게다가 그런 건 반년이면 유행 다 끝난다 아이가. 지금 사봤자 다 돈낭비다, 돈낭비. 그럴 바에 아빠야한테 살 돈 그대로 용돈이나 달라 칼란다."

"오……."

반박할 구석이 없다.

"그럼 집에 있지 뭐 하러 따라 나왔어 힘들게. 고생 많이 했는데 좀 쉬어도 될 걸."

"……니는 눈치가 없는 거가, 아니면 머리가 띨빵한 거가?"

"뭐?"

"뭐."

"……아니, 됐다."

어디 한 번 더 지껄여 보라는 듯 눈꼬리를 세우는 녀석의 눈빛에 나는 급히 말을 끝맺었다.

딱히 쫄아서 그런 건 아니다. 정말로.

"아무튼, 니도 살 거 다 샀제?"

"어, 일단은."

"맞나. 그럼 가자. 배고프다. 비싼 데 가자, 비싼 데. 누나가 쏠게."

"네가 사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사는 거 아니냐, 그거."

"그래서, 싫나?"

"아뇨."

"그럼 얼른 온나."

그렇게 말하고는 앞서 지나가는 양희연의 뒤를 나는 바싹 붙어 쫓았다.

***

어떤 유명 올튜버가 비교적 최근 개업한 미국식 바비큐 식당.

찬혁과 희연은 그녀의 아버지처럼 거하게 취하기라도 한 것 마냥 머리가 기운 태양빛이 드는 창가에 앉아 한창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와, 여기 제대로다."

"잘 골랐네. 니 이는 어떻게 알고 왔노? 원래 알던 데가?"

"아니, 처음 와봤어."

"여는 내도 모르는 덴데 잘도 찾았네."

"뭐, 인터넷에선 유명해서."

일 년도 안 되어 예약 잡기도 어려울 만큼 유명세를 떨치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찬혁의 선택이었다. 기실, 전 세계를 뒤져봐도 그 사실을 알 사람은 찬혁 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요리사 지망생인 만큼 미식가까지는 아니어도 먹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맛있는 음식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양희연은 좀처럼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사 먹는 게 제일 낫더라. 만들 수는 있어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

그리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복스럽게도 고기에 빵을 올려 흡입하듯 먹고 있는 찬혁에게 있었다.

정확히는, 찬혁이 어제 저녁 가게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에.

희연은 먹는 둥 마는 둥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며 어제 일을 회상했다.

***

"그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받아들이긴 힘들 것 같습니다."

"……예?"

박종원의 제안에 잠시 당황했던 찬혁이었지만, 말 그대로 당황은 잠시에 불과했다.

고민을 해보긴 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박종원이 오히려 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 아직 설명을 좀 덜 드렸는데요. 이게 류찬혁 학생에게 개인적인 부담은 없이, 제가 창업자금을 부담하는 조건입니다. 개업 후 1년 이후부터 할부로 갚아주시면 되고요. 물론 무이자에요."

"굉장히 좋은 조건입니다만, 역시 대답이 같네요."

"아니면 제주도가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거주지는 물론 거처를 마련하실 때까지 저희가 운용하는 관사를 이용하실 수 있고 가족 분들도 함께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권유를 넘어 이제는 숫제 집착에 가까운 감정을 내비치는 박종원의 가열찬 권유에도 찬혁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권유하고, 거절하고.

마치 결투의 공수공방을 보는 것 같은 대화가 몇 차례나 지나간 뒤, 먼저 지쳐 쓰러진 쪽은 공격자의 위치에 있던 박종원이었다.

"이거 마음을 돌릴 수가 없네."

"죄송해요. 그래도 과분한 제안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과분하다뇨. 나야말로 이 정도로 류찬혁 학생을 잡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 같은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양희연으로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박종원은 월척을 놓친 낚시꾼의 얼굴로 침울함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아직 그렇게 좋은 대우를 받을만한 입장은 아닌 것 같아서요."

"참 모르는 소리 하시네. 류찬혁 학생. 스포츠 구단에서 한 세대를 풍미한 선수를 가장 싸게 영입한 때가 언젠 줄 알아요?"

"어……. 글쎄요? 제가 스포츠는 잘……."

"바로 막 데뷔했을 때에요. 당연히 그렇거든. 계약 하나가 끝나서 시장에 풀릴 때마다 몸값이 서너 배로 훌쩍훌쩍 뛰니까. 앞서 영입했던 구단일수록 횡재한 거죠. 가능성을 믿고 한 배팅이 제대로 성공했으니까요."

"그건 이미 성공했던 선수의 이야기 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에이, 빼시는 거 봐. 본인도 그렇게 생각 안 하면서."

박종원의 말에 찬혁은 그저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정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박종원을 미소 짓게 했다.

"그러면 가장 영입이 어려운 선수는 어떤 유형의 선수인 줄 아세요?"

이번에도 잘 모르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젓는 찬혁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자기 가치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선수에요.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선수는 싸게 후려칠 수 있고,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선수는 포기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선수는 포기도 못 하게 하거든요."

그렇게 말을 끊은 박종원은 방긋 웃는 찬혁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도 비워놔야 할 것 같으니까요."

다만,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는 듯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 위에는 그의 명함이 한 장 올라가 있었다.

"언젠가 생각이 바뀌면……. 아니, 그냥 아무 때나 연락 주세요.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아니면 이쪽 업계에 궁금한 게 있다거나 할 때요. 언제든 좋아요."

찬혁은 마지막까지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현관을 나서는 박종원과 그 일행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명함을 챙기고는 테이블 위의 접시를 걷었다.

그때, 여태껏 그 분위기에 섞여들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던 이유나가 기함을 토했다.

"왜 거절하신 거예요?!"

"예?"

"아니,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 박종원 선생님인데, 게다가 조건도 되게 좋았고……. 혹시 그거예요? 삼고초려? 하긴 찬혁 씨 솜씨가 대단한 건 사실인데요……!"

횡설수설하며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이유나였으나 양희연 또한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

분명 좋은 조건이었고, 단박에 승인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어도 적어도 대답을 미루기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단칼에 거절한 걸까.

그 의문에 찬혁은 그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결정하고 싶지 않아서요."

"결정이요?"

자칫 너무 우유부단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마디였으나, 이어지는 찬혁의 말에 몰래 귀를 기울이고 있던 희연은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이 산다는 건 꼭 집을 짓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집이요?"

"예. 밑그림을 그리고, 토대를 잡고, 벽돌 하나부터 시작해서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고……. 살면서 한 일이 전부 하나의 건물을 만드는 거죠."

손님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는 손을 늦추지 않으며 찬혁이 말했다.

"그렇지만 건물을 지을 때는 그 건물 하나만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옆에 있는 건물에 맞춰서 모양도 바꿔야 하고, 일조권을 따져가며 높이도 조절해야 하고. 점점 자기가 만들고자 했던 건물이 변할 수도 있어요."

"……."

"아마 저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글쎄요. 아마 목 좋은 자리에 이미 기초공사가 끝난 건물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건축을 마무리 짓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분명 처음부터 만드는 것 보다야 훨씬 편하겠죠. 물론 그것도 좋겠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찬혁에게 희연의 시선이 향했다.

"평생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를 다른 사람이 골라주고 만들어준 집에 쓸 수는 없잖아요. 지금 전 아직 토대를 쌓는 중이에요. 이 토대가 앞으로 얼마나 넓어지고, 높아질지 모르는데 벌써 공사를 끝내자고 결정하긴 아깝지 않나요?"

"으음……."

"어떤 모양이 될지, 얼마나 높을지. 주변에 맞춰서 그런 걸 고민하지 않고 제가 짓고 싶은 건물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찬혁 씨는, 뭔가 되게 나이답지 않은 구석이 있네요."

어딘가 질렸다는 듯 감탄스런 어조로 말하는 이유나를 향해 찬혁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자주 들어요. 그런 말."

***

'자기가 짓고 싶은 건물을 만든다…….'

양희연은 어느 의미 찬혁의 말과는 반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일본에서 그녀는 다른 아이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딱히 외모나 인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혼혈이라는 이유로 학교라는 사회에서 그녀는 배척의 대상이 됐다.

유일하게 편했던 장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있는 집뿐이었고,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도 이미 한 번 굳어진 그녀를 둘러싼 상황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희연 자신이 보기에 어딘가 모났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는 이 까칠한 성격 또한 그 시절에 영향을 받은 탓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그녀의 속에는 배척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쌓여갔다.

희연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한국말을 배울 때 굳이 사투리까지 따라 하려 애쓴 것도, 굳이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스포츠와 오래된 옛날 TV프로그램까지 챙겨봤던 것 또한 그런 두려움의 표출에 가까웠다.

혼혈이라는 신분, 외국에서 자랐다는 환경 탓에 아이들의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나온 집착에 가까운 노력이었다.

찬혁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주변에 맞춰 억지로 모양을 뒤튼 기괴한 오브제 같은 건축물이 지금의 희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친구가 생겼다.

사투리를 쓴다고 이상하게 보는 것도 아니고, 혼혈이라고 신기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아는 걸 잘 모른다고 면박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난 이런 사람이고 너는 이런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해주는 친구가 많이 생겼다.

주변이 변해갔다.

하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환경에 또다시 애써 따라가려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태어난 이래, 양희연은 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꼈다.

'그리고 이건…….'

눈앞에서 멍청한 얼굴로 음식 맛에 감탄이나 하고 있는 이 녀석.

아직 날카로운 가시를 벗지 못했을 시절, 그것에 찔려도 멀쩡한 얼굴로 대하려 노력해준 찬혁의 덕분이리라.

이 기괴하고 못난 오브제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는 점점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웬일로 그렇게 웃냐. 어때, 맛있지?"

"다물고 무라. 침 튄다."

"……쩝."

너무 칭찬에 인색한 것 아니냐며 입을 삐죽 내밀고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 찬혁의 얼굴을 본 희연은 빵을 집어 그 입을 손수 도로 집어넣으며 웃었다.

"마, 다물라고 했지 내밀라 안 했다."

"……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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