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55화 (155/403)

155. 난제풀이.-2-

사방이 뻥 뚫렸지만, 그러면서도 꽉 막힌 마운드 위.

우리의 시선을 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관중. 수천을 넘어 만 단위에 이른 사람의 벽은 심리적인 의미에서는 두터운 철근 콘크리트 벽보다도 견고하고, 비할 데 없이 유동적이다.

"…… 조용하네."

"그러게."

한때는 환호를, 한때는 탄성을, 한때는 경악을, 한때는 아쉬움을 선수들에게 나누어주던 만수천의 관중은 그 누구 하나 입 여는 이 없이 깊은 침묵과 고요에 잠겨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대회 개최부터 곧 시작될 폐막식까지. 장장 다섯 시간가량을 어디에도 가지 않고 함께한 관중이다.

그 다섯 시간의 끝. 아니, 예선까지 포함한다면 장장 두 달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의 종지부가 찍힐 이 때에 함부로 입을 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방을 둘러싼 침묵의 장막을 가장 먼저 걷어낸 것은, 여태껏 그래왔듯 이 대회의 메인 MC이자 심사위원인 강백동이었다.

"사랑하는 부산 시민 여러분, 전국팔도 각지에서 이 대회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주신 관광객 여러분, 그리고 모니터 너머에서 시청하고 계신 시청자 여러분."

마운드에 나란히 선 우리를 등진 그가 사방을 둘러본 뒤 엄숙한 분위기 아래 말을 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참으로 오래 기다려주셨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순위발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시작하기 앞서 제가 감히 여러분께 드리고픈 말이 있습니다."

꼿꼿하게 펴져 있던 강백동의 허리가 굽었다.

마치 머리를 땅바닥에 박을 기세로, 이 이상 깊게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아쉽다는 감정이 절로 전해질 정도로 공손한 인사를 거듭 되풀이하며 사방의 관중과 렌즈 너머 시청자에게 전하는 그.

안 그래도 적막하던 분위기가 이제는 숫제 숙연해질 지경이다.

'저것도 능력이란 건가…….'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능. 강백동이란 사람이 선천적으로 갖고, 후천적으로 발달시켜온 그 재능에 혀를 내두를 때쯤 비로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12000여 명의 관중 여러분. 감사합니다. 124000여 명의 시청자 여러분. 이 긴 시간을 함께 달려준 여러분의 성원이 있었기에 저희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강백동이, 이번에는 관중에게 등을 돌려 우리. 선수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여기, 그 누구보다 힘든 고행의 길을 헤쳐온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개할 필요는 없겠죠. 이분들의 얼굴, 이름, 솜씨.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됐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런 게 필요 없다는 걸, 여러분의 환호와 박수로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힘껏 박수를 치면 평균적으로 약 80데시벨에 해당하는 소리가 나온다.

이는 대략 지하철 탑승 시 들리는 소음 수준의 크기를 가진 소리다.

열 사람이 합을 맞춰 힘껏 박수를 치면 약 100 데시벨 이상의 소리가 난다. 이는 본격적으로 소음을 넘어서 제법 소리가 커지는 단계다.

그렇다면 백 사람의 박수는 어떨까? 천 사람의 박수는? 그리고…….

-짝짝짝짝짝짝!

만 사람의 박수는?

"!"

깜짝 놀라 번쩍 치켜 올린 고개가 좀처럼 아래로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

만 명이 다함께 치는 힘찬 박수. 그것은 소리 이상의 무언가였다. 관중의 손바닥이 맞부딪히며 발생한 공기의 파열. 한 사람이 행한 것이라면 보잘것없었을 그 작은 바람이 겹치고 겹쳐 온몸을 두드리는 충격이 된다.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귀로 들리는 것 이상으로 느껴지는 사람의 존재감. 이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지 내 옆에 선 양희연을 비롯한 다른 참가자에게서도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추석특집 부산 상인 요리대회의 대미! 순위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

"순위를 발표하기 앞서, 이 순위는 심사위원단의 정당한 토론과 논의 끝에 나온 결론임을 명심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심사위원단을 대표하여 일종의 양심선언을 마친 진영배가 마이크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거 참, 되게 살 떨리네…….'

그도 요식업회 회장으로서 소규모 요리대회의 심사위원 정도는 몇 차례고 맡아본 전적이 있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 앞에서 심사위원 노릇을 하려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늦은 나이까지 제법 풍성함을 유지하고 있는 머리카락이 최근 들어 살짝 가늘어진 것 같은 느낌에 노심초사하던 차에 이런 책임감까지 껴안았으니, 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할 여유도 그리 많이 주어지진 않았다. 순위발표가 말 그대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 이제는 고민이 아니라, 고민한 결과를 관중에게 알려야 할 때였다.

"순위는 5위부터 3위까지 순차적으로 공개된 뒤, 마지막에 1위와 2위가 공개됩니다."

"5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중의 긴장을 유발하는 침묵이 경기장을 짧게 스치고, 심사위원단의 목소리 역할을 맡고 있던 강백동이 외친다.

"5위! 김가네 돼지국밥 팀!"

그 이름이 발표된 순간 관중이 술렁였다.

"김가네 돼지국밥이 5위? 가장 먼저 완성하지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5위일지는 몰랐다."

"못해도 3위 안에는 들 줄 알았는데."

부산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돼지국밥의 저조한 성적에 충격을 받은 관중이 수근대는 목소리가 합쳐졌고, 그런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심사위원단이 나섰다.

"김가네 돼지국밥이 준비한 메뉴는 분명 훌륭했습니다."

"세 종류의 육수를 황금비율로 합친 국밥 육수와 그 육수를 이용해서 압력솥으로 익힌 머릿고기. 거기다 토렴한 밥까지.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아마 이건 조리하신 선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라는 단어에 관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에 더해 본인이 알고 있다니, 그건 무슨 뜻일까.

그 의문은 심사위원단이 아닌 김가네 돼지국밥 팀의 선수이자 사장, 김용천 본인이 나서 풀어주었다.

"아시다시피 제출은 제가 가장 빨랐습니다. 다만, 그건 요리가 빨리 준비되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문제도 없던 돼지국밥. 심지어 심사위원단도 다들 맛있게 먹었을 텐데, 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것일까.

"앞서 심사위원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저희 가게에서는 세 가지 육수를 섞어 씁니다. 머릿고기를 삶은 육수, 1차 돼지뼈 육수, 2차 돼지뼈 육수. 이렇게 세 가지죠. 대회 규정 상 만들어둔 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허가되어 혼합육수를 가져와 사용했습니다만……."

김용천의 씁쓸한 시선이 푸드트럭이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회 시간 내내 육수가 끓으며 비율이 변할 걸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머릿고기 육수가 들어가는 만큼 2차 사골 육수를 많이 넣어 고기잡내를 가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죠. 그래서 육수가 그나마 정상일 때 최대한 빨리 사용하고자 서둘러 음식을 제출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찬혁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쩐지 너무 빨리 나온다 싶더라니.'

울며 겨자먹기로 선택한 행동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으리라. 그제야 찬혁과 진영배는 김용천이 말했던 '최선'이란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다감한 표정을 지은 김용천에게 박종원이 말했다.

"그 부분을 지적한 건 진영배 회장님이었습니다. 저는 사장님의 돼지국밥을 먹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 그 차이를 깨닫지 못했거든요. 솔직히 너무 맛있어서 단점이 있는 줄도 몰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게에서 먹으면 이보다 훨씬 맛있을 거란 말에 저도 깜짝 놀랐어요. 아쉽습니다. 실수가 아니었다면 분명 1위를 드려도 아깝지 았았을 텐데."

"제가 실수한 거니 어쩔 수 없지요. 다음에는 가게에서 모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관중이 탄식을 흘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치명적인 실수를 안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을 만큼 맛있는 요리. 과연 직접 가게에 찾아가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지, 안타까움은 점차 기대로 변해갔으니까.

순위발표가 이어졌다.

"4위! 남해왕만두!"

"갈비만두와 통해물만두. 아주 좋은 조합이었습니다. 살짝 느끼할 수 있는 갈비만두와 김치소를 넣어 깔끔한 뒷맛을 주는 통해물만두의 조합이 훌륭했어요."

"그러나 이 역시 아쉬운 건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대갈비를 통째로 이용한 만큼 조리시간을 늘렸어야 했어요."

"양념에 재는 데 10분, 삶고 찌는 데에 10분씩만 더 투자했어도 훨씬 부드러운 식감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심사위원단의 말대로 조리시간을 늘렸다면 분명 제 시간에 완성하지 못했을 터. 그 사실을 아는 남해왕만두 팀과 심사위원단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니면 고기의 크기를 조금 더 작게 소분해서 익혔으면 지금의 조리시간으로 충분했겠죠."

"그게…… 앞서 제출한 만선반점에 임팩트로 지지 않으려고 무리를 좀 하다 보니……."

하긴, 돌돔을 통째로 튀긴 그 패기에 맞대응하려면 평범한 비주얼로는 무리가 있었겠지.

할 말이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말에 박종원도 공감했다.

"마음은 알겠지만, 반대로 맛에만 집중하셨다면 이보다 좋은 결과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혁 일행을 제외하면 결승 참가자 중 가장 젊은 남해왕만두의 사장이 긴 한숨을 뱉었다.

"이어서, 제 3위는! 만선반점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아……."

충격적인 탕추위의 비주얼을 기억하는 관중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아마 오늘 보았던 요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요리를 뽑으라면 분명 손에 꼽힐 메뉴가 되겠죠. 만선반점의 돌돔 탕추위입니다."

"우선, 메뉴의 완성도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좋았습니다. 조미료를 넣은 술에 잘 재워 비린내를 잘 제거했고, 익은 상태도 아주 좋았습니다."

"탕수의 완성도도 높았어요. 산미, 단맛, 짠맛. 무엇 하나 튀는 것 없이 서로 잘 조화된 탕수였습니다. 탕수육 양념이 이거라면 저 혼자 소 자 한 접시는 해치울 것 같아요."

심사위원단의 입에서 연이어 나오는 찬사에 듣는 이들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하는 거라곤 무엇이 어떻게 좋다는 말 뿐. 그렇다면 어째서 순위가 3위에 그쳤단 말인가?

그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박종원의 몫이었다.

"따로따로 있는 것들이 서로 존재감이 너무 강했던 것. 그게 돌돔 탕추위의 문제였습니다."

돌돔은 흰살생선 중에서도 특히나 탄탄한 육질과 강한 감칠맛, 그리고 은은한 단맛이 일품인 생선이다.

물살이 빠른 곳에서 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육질이 탄탄해져 거의 육고기에 버금갈 정도의 탄력을 자랑하는 돌돔을 튀김의 재료로 간택한 것은 분명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돌돔의 감칠맛과 단맛을 너무 잘 만들어진 탕수 소스가 쉽게 덮어 버린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

"아마 우럭이었다면 이 소스가 잘 어울렸을 거예요. 조금 더 부드럽고 고유의 맛이 적어 소스의 맛이 배기 좋을 테니까요. 근데 돌돔은 자기가 가진 맛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부딪혀요."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우남길이 고개를 수그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중국 현지의 탕추위 중에서도 사천식 탕추위는 매운맛과 짠맛이 강한 탕수를 사용합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계통의 맛은 흰살생선과 아주 잘 어울리죠. 식초, 설탕이 주가 되는 탕수육식 탕수가 아니라 사천식 탕수가 쓰였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재료, 기술. 모든 게 완벽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바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런 단점을 안고서도 3위에 안착한 것은 그만큼 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었지만.

5위부터 3위까지. 입을 열기도 힘든 긴장감 속에서 중하위권이라 볼 수 있는 세 팀의 순위가 발표됐다.

남은 것은 두 팀. 그리고 두 개의 순위.

여태껏 5위부터 역순으로 올라온 것과는 달리, 1위와 2위는 정순으로 발표된다.

즉, 이 다음 이름이 나오는 팀이, 바로 이 대회의 우승자가 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가운데, 우연찮게 동시에 고개를 돌린 찬혁 일행과 이치로의 시선이 맞부딪힌다.

참가자를 위한 박수와 강백동의 미사여구 섞인 멘트가 끝날 때쯤엔 다시 떨어진 시선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들 사이로 이어진 팽팽한 긴장의 끈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당겨지고 있었다.

"추석특집 부산 상인 요리대회! 우승의 영광을 차지한 팀은 바로!"

그 순간, 찬혁은 자신의 허리춤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감촉을 느꼈다. 시선을 돌리니, 눈을 꼭 감고 조리복을 집게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잡아당기는 양희연이 보였다.

'이 녀석…….'

아닌 척 해도 여태껏 잔뜩 긴장하고 있던 걸까.

저도 모르게 입에 배이는 웃음을 참지 못한 찬혁이 양희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손길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희연을 마주 보며 찬혁이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

질 리 없다.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담긴 눈동자. 희연은 대체 이 녀석이 뭘 믿고 이러나 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찬혁은 그저 당당했다.

십여 초의 짧은 침묵.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마치 한 시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강백동의 외침이 이어진다.

"8색 구슬초밥을 선보인 스즈! 축하합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찬혁의 옷을 잡고 있던 손마저 흐느적흐느적 늘어뜨리는 희연의 손목을 찬혁이 잡아채고, 그대로 위로 뻗는다.

한데 모여 위로 솟아오른 두 사람의 손을 정확히 포착한 카메라가 두 사람의 모습을 전광판 가득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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