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제3라운드.-8-
'그렇게 나오시겠다.'
자리에 앉는 심사위원단을 보며 나는 내 인식을 조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보다 더 상향조정을 해야 할 필요가.
세상에 있는 음식 중에선 먹을 때 순서를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양식이나 중식의 코스요리 같은 경우 나오는 순서 자체가 음식을 먹는 순서가 되겠지.
한식이나 일식에도 그런 계통의 음식이 몇 가지 있긴 하다.
한식에는 궁중연회상 정도가 그런 위치에 있다 할 수 있겠고, 일본의 경우 카이세키 요리会席料理라고 불리는 상차림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이건 시야를 넓게 가지고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여러 종류의 요리를 순서대로 먹는 문화는 어느 나라에나 있으니까.
하지만 초밥처럼 한 종류의 요리를 순서까지 지켜가며 먹는 요리는 세상에 몇 가지 없다.
'뭐, 네타에 따라 종류가 바뀌는 거 아니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햄버거를 들어가는 속재료에 따라 다른 종류의 음식으로 가르지는 않으니까.
군대리아. 넌 빠져 있어. 빠져 있어 빵만 잘려서 우유에 박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튼. 요즘에는 초밥도 먹고 싶은 사람 마음대로 아무 종류나 골라 먹는 추세이긴 하지만 흔히 말하는 장인이 운영하는 전통초밥집이나 오마카세 형식 가게에선 아직도 초밥을 먹는 순서를 지키는 걸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어느 것은 애피타이저. 또 어느 것은 메인. 또 어느 것은 디저트.
고작 하나의 음식을 세부적으로 다시 나누는 꼴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참. 가장 작은 단위의 코스요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지 그 순서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바뀌곤 한다.
완전히 같은 초밥을 먹더라도 요리사가 그 순서를 어떻게 분배해주느냐에 따라 아무거나 집어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을 수도, 맛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라쿠모 팀의 의중은 짐작이 간다.
저들이 말한 대로 초밥은 특별한 기술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만들어진 그 순간이 가장 맛있다.
샤리와 네타의 균형, 온도, 간.
그 모든 것을 가장 정밀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그때니까.
거기에 더해 먹을 순서마저 셰프의 임의대로 정할 수 있으니 자신의 의도대로 심사를 이끌어가기에 가장 이상적인 포지션.
과연 저 조합이 어떤 시너지를 낼지, 정면승부를 해야 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잠식하는 기대감에 저도 모르게 흥분되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보여주실까, 현지 요리사의 실력이란 것을.'
아, 이건 패배 플래그인가.
***
도마와 칼, 행주, 식초를 탄 물, 와사비, 강판.
그리고 네타와 샤리.
만반의 준비를 끝낸 이치로가 칼을 들고는 말했다.
"매움, 원하시는 수준. 만듭니다."
한국말이 서투른 이치로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한 심사위원단이었으나, 이내 말뜻을 알아들은 박종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심사하는 자리지 않습니까. 저희가 입맛을 알려드리면 앞서 심사한 팀에게 불이익이 됩니다. 평소 만드는 그대로 만들어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
박종원의 날카로운 지적에 이치로는 군소리 없이 손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고른 생선은 흰살생선인 광어.
생선을 먼저 사선으로 자른 뒤, 손에 식초 섞인 물을 묻히고 샤리를 쥔다.
샤리를 쥐고, 그 위에 껍질 채 강판에 둥글게 돌려 갈아낸 와사비를 바른 뒤, 네타를 얹어 모양을 잡는 손.
네타 위로 간장양념을 붓으로 발라 마무리 짓는 이치로를 보며 심사위원단은 우선 그 손놀림에 감탄했다.
대충 움켜쥔 것처럼 보이는 샤리와 대충 집어든 것처럼 보이는 네타가 단 수 초 만에 손의 그림자 아래에서 합쳐져 초밥이 되는 마술 같은 광경.
그러면서도 초밥 세 개를 만드는 내내 똑같은 몸동작은 마치 기계 같았다.
기계적인 마술. 모순이지만, 그 이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드시죠."
"아, 예."
맛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맛있었다.
절묘하게 간이 맞춰진 샤리와 칼집을 넣어 간장이 촉촉하게 배인 네타. 광어 특유의 쫄깃함 대신 부드러움이 크게 부각 됐지만,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요리로써 손색이 없었다.
"이야, 나무랄 데가 없네요. 샤리와 네타의 조화가 참 잘 맞아요."
"와사비도 아주 좋습니다. 이 청량한 매운맛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팩 제품으로는 내지 못하는 맛이에요. 와사비 맛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 번쯤 이런 제품을 사셔 드셔보는 것도 좋습니다. 한국에서는 100그램에 3만원을 넘게 호가하는 물건이라 무턱대고 사먹기에는 부담 되는 가격이지만, 저는 돈값을 한다고 봅니다."
좋은 신발은 주인을 좋은 곳으로 이끌고, 좋은 옷은 주인을 빛나게 한다고 하던가.
그에 비하면 좋은 음식이 하는 일이란 간단했다.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그 단순함에 심사위원단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만면에 가득 웃음기를 띈 그들 앞에 이치로가 지체 없이 다음 초밥을 내놓는다.
"연어입니다."
"오징어입니다."
"문어입니다."
"새우입니다."
어휘력이 부족하여 자세한 설명도 없이 그저 원재료의 이름만을 말할 뿐인 이치로였지만, 그 속에 담긴 기술은 그 짧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케이퍼로 만든 소스와 무순을 얹어 서양의 맛을 훌륭히 섞은 연어초밥.
눈으로 보기도 힘든 방사무늬 칼집을 촘촘히 넣어 양념이 잘 배인 오징어초밥.
데친 뒤 초절임하여 새콤한 맛이 일품인 문어초밥.
새우 오보로와 와사비를 섞은 소스 위로 데친 새우를 얹은 새우초밥.
누군가는 초밥을 보고 그저 밥 위에 생선을 얹은 게 전부인 요리라 폄하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지금 이치로가 만든 요리를 먹으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터였다.
입을 가득 채운 해물의 맛에 푹 빠져들기 시작한 심사위원단. 이치로는 그들을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펼쳐질 무대 위로 안내한다.
양념에 살짝 절인 입속에서 톡톡 터지는 날치알초밥.
껍질을 살려 겉을 토치로 살짝 구운 도미초밥.
싱싱한 성게를 그대로 사용해 온전히 성게의 맛을 살린 성게초밥.
어느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역시 클라이맥스의 절정을 담당할 메뉴의 등장에는 모두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오토로 스테이크 스시입니다."
참치 대뱃살을 통째로 구운 참치 대뱃살 스테이크 초밥.
아주 강한 불에 짧게 4면을 구워 겉은 바삭하게, 속은 참치 기름이 녹은 육즙이 촉촉하게 밴 참치초밥에 심사위원단의 얼굴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오죽하면 마지막 디저트 역할로 준비된 계란초밥을 먹은 뒤에도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그러나 관중은 심사위원단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평가가 어떨지 예상할 수 있었다. 말이 아닌 얼굴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
'저렇게 멍청한 얼굴로 좋아하는데 모르는 것도 능력이지.'
그 모습을 관망하고 있다 보니, 속에서 절로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마 지금까지 평가한 선수 중 최고점 감이리란 예상이 들었다. 이번에는 예상이 좀 틀려주길 바랐으나 안 될 거야 아마.
'젠장, 오늘은 어째 한 번 빼곤 대충 전부 들어맞는단 말이지.'
상향조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가? 그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필요가 아니다. 그냥 상향조정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번 더.
'저런 양반이 왜 국내에 있는 거야?'
이치로라는 이름의 요리사를 보며 나는 잠시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생선의 처리? 조미? 소스 배합? 그런 건 나도 할 수 있다. 적어도 네타를 다루는 것에서 내가 당장 그보다 부족한 점을 느끼진 못했으니까.
내가 놀란 점은 바로 그의 눈썰미였다.
일류 스시장인은 고객에게 맞춰 양념이나 와사비의 양을 조절하는 재주가 있다. 우리만 해도 성 셰프는 당연히 할 줄 아셨고, 실장급 선배들은 손님의 요청에 따라 조절하는 것 정도는 가뿐히 해내셨다. 나야 앞 주방에 선 적이 없어서 직접 요청을 받은 적은 없지만, 하려면 할 수는 있다.
'근데 그것도 단골 고객이나 돼야 하는 거지.'
회귀 전, 원철 선배는 대략 세 번 이상 오마카세를 이용한 단골 고객의 얼굴을 기억하고 맛을 조절할 수 있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었다. 아마 과장이 좀 있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훌륭한 솜씨다.
그런데 저 이치로라는 양반. 저 양반은 앞서 낸 단 세 점의 초밥으로 심사위원단의 취향을 정확히 꿰뚫어봤다. 표정을 보면 안다. 처음 초밥을 먹을 때엔 살짝 인상을 찡그리거나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던 심사위원단이 가면 갈수록 초밥 한 점에 짓는 미소가 깊어졌으니까.
그를 고용했을 김종권이란 아저씨는 저 사람의 진가를 제대로 알고 있긴 할지 의문이다. 호텔 같았으면 연봉이 억대로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솜씨인데.
…… 아니, 지금 내가 남 걱정이나 해줄 때는 아닌가.
"하아, 어렵겠네 이거."
"언제는 쉬울 줄 알았나."
양희연의 핀잔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지. 회귀 전을 포함해야 간신히 삶의 밀도를 비벼볼 만한 경력자들과 대결하는 건데, 그게 쉬울 리가 있나.
"구경은 할 만큼 했다. 우리도 뭔가 보여줄 차례 아이가."
"그래. 이제 끝낼 때가 됐다."
마주 본 양희연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난다. 망설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 눈에 남은 건 도전을 향한 욕구뿐이다.
태산을 앞둔 등산가의.
태풍을 앞둔 항해사의.
거 참, 성 셰프도 딱히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가자."
개막과 클라이맥스는 넘겨줬지만, 커튼콜을 내릴 줄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
하지만 아직 내릴 수는 없다.
클라이맥스가 끝났으리라 생각한 관객에게 그보다 더한 게 있음을 깨닫게 해줘야 하니까.
바람처럼 휘두른 양희연의 손이 커다란 빨간색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는 클락션 소리에 심사위원단과 관중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며 화들짝 놀랐다.
마치 화려한 폭발과 함께 멋들어지게 끝난 영화를 감상한 뒤 여운에 잠겨 올라가는 크레딧을 바라볼 때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제야 아직 남은 팀이 있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
심사위원단도 크게 다를 건 없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쭈뼛쭈뼛 찬혁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설마 저희 남은 거 깜빡하신 건 아니죠?"
짓궂은 찬혁의 농담에 얼굴을 붉힌 심사위원단이 미안한 표정으로 거듭 고개를 숙이자 찬혁은 농담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짧은 웃음이 지나간 뒤, 헛기침으로 목을 푼 강백동이 입을 열었다.
"스즈 팀. 가장 마지막 순서로 작품을 완성하셨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심사를 앞둬서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그래도 홀가분하네요."
"양희연 선수는 어때요?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요."
"괘, 괘, 괜찮습니데이! 이보다 하, 학교가 더 힘들다 아입니까."
"아하하! 힘들진 않아도 긴장은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아니, 얘는 아저씨 봐서 이러는 걸걸요.'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심사위원단의 흐뭇한 미소와 딱딱하게 굳은 양희연의 얼굴을 번갈아 힐끗거린 찬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은 긴장이 누그러진 분위기 속. 찬혁은 심사위원단의 표정에 살짝 아니꼬운 마음이 들었다.
'별로 크게 기대하고 있진 않구만.'
이미 한껏 쌓아놓은 기대를 전 차례에 충분히 폭발시키고 온 탓이리라 찬혁이 어렵게 납득하고 있는 찰나.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던 박종원이 나섰다.
"스즈 팀. 준비한 메뉴를 보여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박종원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호기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의구심 뿐.
찬혁 일행이 준비한 메뉴가 초밥임을 알고 있기에, 과연 이치로가 만든 작품과 겨뤄 빛이나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 주눅이 들 찬혁과 희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보다 당당한 자세로 그들이 준비한 메뉴를 심사위원단 앞에 내세웠다.
"예, 여깄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박종원이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로, 그리고 찬혁과 희연이 계획한 대로. 그들이 준비한 메뉴는 초밥이었다.
"…… 어라?"
"이건…… 초밥…… 맞죠?"
다만, 평범한 초밥은 아니었다.
찬혁은 고작 평범한 초밥을 들고 이치로 같은 거물과 겨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공……?"
평범한 초밥은 조그마한 타원형 모양으로 뭉친 샤리 위에 보다 큰 네타가 올라간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찬혁이 내놓은 초밥의 생김새는 전혀 달랐다.
동그랗게 뭉친. 마치 공처럼 생긴 모양의 초밥.
알록달록한 네타가 샤리 속에 살짝 묻혀 꼭 아이들 장난감처럼 형형색색 귀여운 모양의 초밥이 그들이 내민 나무 접시 위에 가득했다.
"저희가 준비한 메뉴는 테마리스시手まり寿司. 구슬초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