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제3라운드.-5-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벌써 완성했다고?'
결승전이 시작된 지 30분을 살짝 지난 상황.
완성의 스타트를 끊을 팀은 결코 우리가 아니리라는 것 정도야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다.
'저쪽 완성작은 보나마나 돼지국밥일 텐데.'
국밥은 나오는 속도가 빠르다. 어느 국밥집을 가든 주문한 지 5분 이내에 음식이 나오며 단일메뉴만 파는 잘 나가는 국밥집 같은 경우에는 말 그대로 앉아서 주문을 넣자마자 음식이 나오는 경우마저 있다.
그야말로 한국의 패스트푸드란 별명에 손색이 없는 음식.
대한민국에 사는 사회인 남성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적어도 남자 중에 국밥 한 번 안 먹어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뭐, 재벌쯤 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근데 국밥집에서 일하면서 대기업 사장이란 분들 얼굴 본 게 한두 번은 아니거든.'
아무튼.
'빠른 음식' 국밥. 그 인식은 분명 옳다. 실제로 한식 중에서 고객에게 서비스되는 음식 중 국밥보다 빠른 식사가 가능한 음식은 몇 없으니까.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졌을 때'의 이야기다.
한국의 패스트푸드란 별명. 이건 사실 굉장히 어폐가 있는 말이니까.
국밥은 한식 중에서도 가장 조리시간이 긴 슬로우 푸드에 속한다.
돼지의 뼈와 고기를 골고루 사용하여 1차 육수를 끓이고, 그것을 걸러낸 뒤 뼈만을 다시 사용하여 2차 육수를 끓이고 그것을 합쳐 사용하는 게 보편적인 돼지국밥 국물이다.
고기의 기름기가 듬뿍 밴 1차 육수.
진한 사골국물이 우러나온 2차 육수.
이 두 종류의 육수를 합쳤을 때 나오는 그 그윽하면서도 돼지의 쿰쿰한 향이 깊게 배어나오는 맛은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한 번 먹어보길 추천하고 싶은 맛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육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시간이다.
육수를 끓이는 시간만 최소 30시간. 그나마도 이게 최소한 필요한 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타지 않게 저어주고, 육수가 너무 끓어올라 풍미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밤새 불조절을 하며.
그렇게 꼬박 하루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지만 우리가 먹는 한 그릇의 국밥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대회에서 그러한 절차를 제시간 안에 해내는 건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대회에서는 육수와 양념에 한정하여 참가자가 사전에 준비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규칙을 걸었다. 덕분에 돼지국밥은 상당한 양의 애로사항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회장에서 돼지국밥을 만드는 게 간단해졌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사전준비가 허가되는 건 어디까지나 육수와 양념 뿐.
그 외의 기타 재료. 예를 들자면 국밥에 함께 나갈 밥이나 국밥에 들어갈 돼지고기, 고명용 야채의 손질 등등.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제법 시간을 들여야 하는 과정이 많다.
특히 고기 같은 경우 얼마나 시간을 들여 익혔느냐에 따라 식감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물건이기에 밥과 함께 부드럽게 씹혀야 하는 고기는 익히는 시간이 길수록 좋다.
'거기다가 육수맛이 고기에 배어들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고.'
요컨대 들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러모로 이득이 많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60분이 아닌 9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상황.
이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 완성했다는 말을 하다니, 분명 뭔가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숨겨진 사실이 무엇인지 알아볼 여유는 없었다.
내 코가 석자다. 온 정신을 다 쏟아 우리 작품을 만드는 것에만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사람 일에 발을 들이밀 새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야.'
저 김가네 돼지국밥 팀의 입장에서 봤을 때가 아니라 내 시점에서 보았을 때 이건 굉장히 좋은 타이밍이었다.
상상도 못 한 순간에 튀어나온 완성작. 관중의 이목은 싫어도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그 말은 즉, 여태껏 이목을 독점하고 있던 이는 찬밥신세가 됐다는 뜻.
주식의 이치와 비슷하다. 누군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다.
이번에 잃는 이는 다름 아닌 무라쿠모 팀이었다.
안 그래도 한 번쯤 맥을 끊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온 행운이다. 뭐, 당하는 입장에서는 불행이겠지만.
'재룟값은 뽑았으려나 몰라.'
"적어도 본전은 물 건너갔네."
"뭔 소리고?"
"별거 아냐. 하던 거나 마저 하자."
"실없기는."
심사위원단이 심사를 위해 김가네 돼지국밥 팀의 차량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잠시 곁눈질하곤 시선을 돌렸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이상 다른 사람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
"쯧."
아까까지만 해도 얼굴 가득 짓던 만족스런 미소는 어디 갔는지, 김종권은 한껏 불편한 심정을 내비쳤다.
간신히 만들어낸 좋은 흐름. 타고 있던 호랑이의 등에서 굴러떨어진 그 기분은 분명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알지 못하리라.
"좋을 때에 방해를 하다니."
자기네 만드는 속도가 빠르다고 자랑이라도 할 속셈이냐며 김종권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 상황에서 다른 무언가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음식 장사를 하지만 요리에 대해선 깊게 알지 못하기에 생긴 폐해였다.
"간신히 본전만 챙긴 셈인가."
적어도 힘주어 준비한 재료는 이미 등장을 마쳤다.
관중과 심사위원단의 뇌리에도 강하게 각인됐을 터. 심사에 앞서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주목을 받게 하는 역할은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사람이란 욕심이 끝이 없는 생물이기에, 조금 더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부분에서 그것을 놓친 작금의 상황이 김종권은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주식 놀이하던 때 같군.'
샀을 때보다는 비싼 값에 팔았지만, 계속 상한선을 그려나가는 주식을 바라볼 때의 안타까움일까. 그 씁쓸함을 김종권이 물로 씻어내는 사이 마운드에선 한창 김가네 돼지국밥의 심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첫 심사가 시작되겠습니다. 김용천 선수, 다른 팀보다 훨씬 빨리 음식을 완성하셨는데요. 혹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점 있습니까?"
심사에 앞서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강백동의 말에 김용천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답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자신 있어 보이는 태도. 그러나 심사위원단 중에서 김용천과 나름 안면이 있는 진영배의 귀에는 그 말에 의문을 느꼈다.
'최선?'
김용천은 보통 자기 음식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인물이 아니다. 언제나 음식이 최고의 상태여야만 만족하는 인물이었으니까. 오죽하면 자기 자식이 육수를 만들다 실수한 날에는 사흘간 가게 문을 닫은 일화도 있을 정도다. 육수를 다시 만들겠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루 장사가 굉장히 중요한 식당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는 뜻이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나이 60의 늙은이가 매일 밤을 새며 불을 떼려면 그만한 고집이 필요하다.
그런 김용천이 '최선을 다했다'라. 뭔가 있다. 진영배는 직감했다.
진영배가 속으로 의구심을 키워가고 있음에도 심사는 막힘없이 진행됐다.
"돼지국밥은 고기의 맛을 살리고 향을 가리는 여타 육수와는 달리 돼지 자체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만들죠. 그래서 처음 돼지국밥을 드시는 분은 그 향취에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육수가 뽀얀데, 냄새는 정말 강렬하거든요."
"이게 참 쉽게 익숙해지기 힘들죠. 이렇게 멀리서 맡아도 머리가 아찔하게 냄새를 풍기는 국밥이 또 없어요."
"그러고 보니 강백동 씨는 부산 출신이죠? 돼지국밥 좀 드셔 보셨어요?"
"아무렴요! 한창 먹을 때는 한 가게에서 국밥만 다섯 그릇을 먹은 적도 있습니다. 자주 다니던 국밥집에는 제 전용 대접도 있었어요."
"강백동 씨는 지금도 한창 먹잖아요. 설마 지금보다 더 먹었다는 거예요?"
"아이고, 오죽하면 제가 한창 식당 막내로 일할 시절엔 강백동 씨 지나간 식당엔 재료가 남아나질 않는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와, 진짜 위대한 사람이었네."
"아하하하. 운동이란 게 항상 사람을 배고프게 하거든요. 관중 여러분도 아시죠?"
간단한 토크로 관중에게 웃음을 선사한 세 사람이 수저를 들고 대접을 휘젓는다.
대접 위에 쌓인 부추와 파를 양쪽으로 가르자 그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야들야들한 머리고기. 더더욱 그 속을 파고들면 수저가 오길 기다리던 새하얀 쌀밥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수저 끝으로 살짝 누르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알알이 흩어지는 쌀알. 그것을 본 박종원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보세요. 밥알이 서로 붙어있지 않고 국물에 자연스럽게 말아지죠? 토렴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이런 탱글탱글함이 나올 수가 없어요."
"토렴이요?"
"예. 식은 밥에 국물을 붓고 따라내길 반복해서 밥을 먹기 좋은 온도로 만들어주는 거예요. 거기에 더해 국물이 밥에 코팅돼서 탱글탱글한 식감이 굉장히 살아나죠. 이게 뜨거운 국물을 다뤄야 해서 위험한 데다 밥의 온도를 알맞게 맞추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근데 이건……."
주르륵.
한 숟갈 크게 푼 밥알이 국물을 따라 매끄럽게 낙하한다.
토렴이 아주 잘 되었다는 증거였다.
"아주 잘 됐어요. 기술이 대단하시네요."
"흠흠. 국밥 판 지가 수십 년이 됐으니, 그런 잡기술만 늘지요."
"잡기술이라뇨? 아주 굉장한 기술을 가지신 거예요. 존경합니다."
박종원의 칭찬에 김용천은 담담히 고개를 돌렸다. 입은 다물렸지만 겸연쩍은 표정은 가리지 못한 모양새였다. 끝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김용천이 쏘아내듯 심사위원단을 닦달했다.
"육수는 고기, 등뼈와 다리뼈, 머리를 통째로 삶은 세 가지 육수를 비율에 맞게 섞어 한 차례 다시 끓였습니다. 밥은 지은 뒤 바로 냉동고에 넣어 식혀 토렴했고, 돼지 머리고기는 적당한 크기로 토막 내서 압력솥에 육수를 넣고 몇 가지 재료와 함께 푹 익혔고요. 계속 그렇게 말만 하고 있을 겁니까? 식기 전에 얼른 드시지요."
그 말을 들은 심사위원단이 아차 하는 얼굴로 급히 수저를 들었다.
"음! 순대국밥 같은 흔히 볼 수 있는 국밥하곤 다르게 처음부터 간이 제법 강하게 되어 있네요. 근데 이게 또 절묘해서 굉장히 맛있어요. 돼지육수 특유의 쿰쿰한 향도 아주 잘 살아 있고요."
"와, 진짜 맛있네요. 여기 서서 세 그릇은 더 먹을 수 있겠어요."
"다른 팀은 심사 안 할 거예요? 천천히 꼭꼭 씹어 드세요."
박종원과 강백동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호평에 관중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중에서도 김가네 돼지국밥 팀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바람을 타고 그 먼 거리를 가로질러 퍼지는 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는 듯 핏발선 눈을 좀처럼 현장에서 떼지 못했다.
꼬르륵. 그들의 배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공명한다.
이것이 바로 참가자 중 김가네 돼지국밥 팀만이 가진 강점이었다. 압도적인 향. 그 강점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절로 흐르는 군침을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되는 양 삼키는 와중, 어째서인지 진영배만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
돼지국밥을 한 숟갈 먹고, 잠시 대접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고춧가루와 육수, 간장, 들깨가루를 섞어 만든 양념장을 국밥에 풀어 한 숟갈 먹고는 다시 대접을 빤히 바라본다.
"…… 김용천 사장님. 아니, 김용천 선수."
살짝 찡그려진 진영배의 시선이 김용천에게로 향하고, 그 부름에 김용천 또한 고개를 돌린다.
"불렀습니까?"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가는 잠시 후 순위 발표 때 하도록 하죠."
1, 2라운드와는 달리 3라운드는 상대 평가. 어차피 모두가 고득점을 받을 터인 결승전에서 점수평가를 했다간 끝이 나지 않으리란 이유 때문이었다.
"……."
"……."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던 두 남자의 고개가 이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어차피 심사는 끝났다. 이제 김용천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게 전부였으니까.
영문 모를 침묵이 지나간 직후, 환호 속에 끝난 심사 뒤에 찾아온 짧은 교착상태. 그 사이를 한 줄기 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든다.
─빠아아아아앙!
두 번째 클락션.
대회 시작 50분. 두 번째 완성작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완성했습니다."
만선반점. 짙은 색 두건을 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낸 남자가 심사위원단을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