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48화 (148/403)

148. 제3라운드.-4-

찬혁과 희연이 초밥을 만들 작정임을 눈치챈 박종원이었으나, 그는 우선 이 사실을 공표해야 할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부러 조림을 하는 걸 보면 따로 생각이 있는 게 분명해.'

그들이 무슨 속셈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관중과 심사위원단을 깜짝 놀라게 만들 무언가를 보여주겠지.

거기에 초를 치는 건 까놓고 말해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는 게 박종원의 지론이었다.

'물론 여기서 눈치챈 척 전문가스러운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기왕 하는 거, 완성품을 보며 이미 속내를 알고 있었다는 어필을 하는 게 조금 더 부각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소심한 공명심도 작게나마 있었다.

"선생님?"

"아, 별거 아닙니다. 여기서 선수들의 자리가 잘 안 보여서 몸을 일으키다 실수를 했네요."

"에이, 깜짝 놀랐습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셔야죠."

"죄송합니다. 하하하."

이런 사고의 결과. 박종원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앞에 두고 파티가 끝난 다음 뜯어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이런 기분일까. 대체 어떤 놀라운 걸 보여줄까. 박종원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다.

잠시 소란이 일긴 했지만, 심사위원단 측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일 뿐이기에 한창 요리에 몰두하던 참가자들이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애당초 지금 그들은 누가 폭죽을 터트려도 모를 만큼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으니, 관중석에서 패싸움이라도 나지 않는 한 그들의 집중력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찬혁 일행을 끝으로 다시금 이치로의 차량을 향해 돌아간 카메라.

다른 팀에 카메라가 돌아가 있던 시간은 해봤자 10분 남짓. 하지만 이치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미 대부분의 생선 손질을 마쳐둔 상태였다.

"이치로 선수, 벌써 저렇게 많은 생선을 손질해놨습니다! 손이 정말 빠르네요!"

"광어, 참돔, 농어, 정어리, 연어. 다 손질법이 비슷해 보여도 저마다 조금씩 방법이 달라 힘들었을 텐데. 정말 대단하네요."

마치 관중을 향해 과시하는 듯 조리대 앞에 나열된 생선의 머리와 그 뒤로 놓인 살코기.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다며 카메라를 더 가까이 가져가라는 감독의 닦달에 시달린 카메라맨이 이치로의 조리대 앞으로 다가간다.

전광판을 제 것 마냥 차지하는 그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독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치로의 그림처럼 반듯한 손놀림에서 나오는 멋이 불평불만을 내뱉을 새도 주지 않고 그들의 눈길을 잡아끌었으니까.

"아주 좋아."

그리고 이런 상황에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무엇을 숨길까. 김종권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평소 남에게 지어 보이는 웃음과는 다른 흉심이 혁혁히 드러나는 미소. 광대가 들썩일 정도로 죽 찢어진 입가가 낮은 웃음소리에 맞춰 작게 흔들렸다.

화면 가득 자리를 차지한 이치로의 모습.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관중.

그의 전략이 제대로 통했다.

스시를 만든다는 말에 김종권은 그날 새벽 사람을 시켜 그가 사놓았던 재료를 전부 풀어놓았다.

저 다양한 종류의 낚시치를 사 모으는 건 그로서도 제법 힘든 일이었다. 안 그래도 추석을 맞이해 바다로 나가는 어선도 얼마 없던 상황.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늘은 김종권의 편을 들어주었던 걸까. 바다로 나간 어선이 적었던 만큼 그물에 쓸려나가지 않은 생선이 낚싯배에 잡혀 낚시치 중에서도 질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대회에 쓴다고 한, 두 마리만 살 수는 없었기에 상당한 양의 재고를 그가 안게 됐지만, 그건 대회에 우승한 뒤 이벤트성 제품으로 소비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정가대로 팔 경우 오히려 파는 게 손해가 되겠으나 그렇다고 가격을 올리는 건 하수나 할 일. 가끔은 이런 이미지 장사를 하는 게 길게 보면 훨씬 도움이 된다. 김종권은 장사꾼이지만, 그렇기에 돈으로도 쉽게 살 수 없는 게 있음을 안다.

아무튼, 그런 금전적인 노력이 더해진 덕분에 대회의 주도권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이 주도권을 끝까지 쥐고 갈 수 있느냐가 문제. 김종권은 저 무뚝뚝한 이치로라는 남자에게 과연 그런 센스가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한 듯했다.

관중의 이목이 가장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금. 이치로가 꺼내든 물건은 김종권의 고민을 저 멀리 날려 보낼 위용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참치를?"

감히 말하길 생선의 왕. 초밥 재료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참치의 등장에 김종권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자신이 구상한 그림과 아주 흡사했다. 시합이 시작되고 약 20분. 관중이 지쳐 흥미가 점점 떨어져 갈 때쯤 나오는 강렬한 한 방.

거기에 더해 마치 사극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모양새를 한, 날만 50cm의 길이를 자랑하는 전문가용 참치칼까지 튀어나오자 관중의 반응은 뜨겁다 못해 폭발할 듯 불타올랐다.

현지에서도 때가 맞지 않는다면 좀처럼 보기 힘든 참치 해체쇼를 약식으로나마 직관하게 됐으니 오죽할까.

기대한 것보다 더욱 훌륭하게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이치로를 보는 김종권의 얼굴에 깊은 만족감이 서렸다.

***

"젠장."

아주 쇼를 하는구만.

뭐, 실제로 참치 해체쇼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중이긴 하지만.

"와, 쟤네는 진짜 별 게 다 있다. 저런 거 쓰는 사람 우리 할아버지 밖에 몬 봤는데."

"할아버지?"

"진짜 가끔 새해 첫날에 쓰시드마. 니 새벽경매라고 아나? 이게 막 몸무게만 톤짜리 참치가 갈고리에 주렁주렁 매달려가 한 마리만 살라캐도 돈이 억대로 들어간다 아이가."

"…… 그러냐."

그거 참, 실제로 보면 대단하겠는데.

"뭐꼬. 반응 심심하네."

뾰로통한 얼굴로 내 팔뚝을 툭툭 찌르는 양희연. 너무 긴장감 없이 풀린 거 아닌가 싶겠지만 자꾸만 리듬을 타듯 앞꿈치를 들썩이는 양희연의 발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닌 척하지만 이 녀석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방법으로 만드는 음식을 대회용으로 준비하는데 떨리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태연한 나는 비정상인 건가? 당연히 그렇진 않다.

식초로 불린 다시마를 물로 씻어 다시마 속에 과도하게 밴 신맛을 적당히 뺀 뒤 키친타월로 꾹꾹 눌러가며 물기를 제거한 후, 스프레이에 청주를 담아 다시마 한쪽 면에 골고루 뿌린다.

그리고 이렇게 처리한 다시마로 앞서 손질한 생선 중 흰살 생선을 골라 빈틈이 없게끔 감싸고, 랩으로 꽁꽁 싸매어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처치. 이것을 조리대 아래 있던 냉장고에 넣었다.

"너 기억 나냐. 왜 학기 초에 손 다쳤을 때."

"…… 그건 또 와."

"그때도 초밥이었잖아."

초밥의 네타. 즉 위에 올라갈 횟감으로 사용하기 위한 숙성 작업을 하고 있자니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참 골 때리는 상황이긴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넘기긴 했지만, 아마 이 녀석이 그 말을 믿고 있을 확률은 굉장히 적겠지. 오히려 왜 여태껏 안 묻나 내가 궁금할 지경이다.

'굳이 묻지는 않겠지만.'

양희연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다시금 내 등허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알겠다. 그만하자.

지금 내가 선 위치는 관중에게 보이지 않는 푸드트럭의 뒤쪽 조리대.

거기에 더해 일부러 양희연의 그림자에 숨어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 물론 그 이유는 우리가 초밥을 만들고 있다는 걸 굳이 이 타이밍에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똑같은 초밥을 만들고 있다는 걸 관중이 알아봤자 한창 참치 해체를 끝내고 숙성작업을 시작한 저쪽 팀과 비교대상이 되어 초라해지기만 할 뿐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마지막에 짠!하고 공개해서 임팩트를 주는 게 낫지.

아마 우리를 보는 관중은 지금 세 개나 되는 버너 위에서 동시에 조림을 만들고 있는 양희연의 모습이 훨씬 눈에 띌 테니, 이 기회를 이용해야 했다.

"근데 진짜 이거 제대로 된 레시피 맞나? 내는 잘 모르겠는데."

"걱정 마. 내가 먼저 다 연습해봤어."

"…… 연습해다꼬? 이런 걸?"

"어."

"니 진짜 머리 이상한 놈이네."

그래 맞다. 그 시절에는 머리가 이상한 놈이었지.

지금 우리가 만드는 레시피는 분명 초밥이지만, 그 근간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초밥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아마 평범하게 초밥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나? 나도 물론 생각해본 적 없다.

'지금은 말이지.'

이건 앞으로 몇 년 뒤, 내가 어쩌다 '이러면 맛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서 구상했던 레시피다. 정확히는 그 리메이크지만.

당시에는 재료 낭비도 심한데 맛도 소모하는 수율에 비해 대단히 달라지는 점은 없었지만, 다시 리메이크한 레시피는 그때보다 확연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 재료 낭비가 심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오히려 이렇게 비용을 도외시한 적은 개수의 메뉴로 승부를 봐야 하는 대회라는 자리에서는 그 단점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것도 전부 회귀 덕분이라는 것이다. 조금 치사한 짓이 아닌가 싶긴 해도…….

'나는 정면승부를 하겠다고 했지, 정정당당하게 싸운다는 말은 한 적 없다 이거야.'

비겁하다고 하진 않겠지. 일본의 요리사여.

…… 뭐, 아무튼.

과연 이 방법이 먹힐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과거의 성 셰프는 이 요리를 먹고 '당장 팔고 싶을 만큼 맛있다.'고 했다. '지금보다 가격을 한 5할은 올려 받으면'이란 머리말이 붙기는 했어도 맛 하나만큼은 진짜라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대회의 현장 상태에 따른 나의 레시피 조정까지 더해진 이 상황.

질 것 같단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 가슴 위로 빵빵하게 차오르는 기분이다.

"참치 해체를 끝낸 이치로 선수! 이번에도 뭔가를 꺼내는데요? 저게 뭐죠? 아! 문어! 문어에요! 세상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길이가 1미터는 되겠어요!"

"와, 자연산 돌문어 같은데요? 문어가 요즘 제철이라지만 정말 엄청난 식재료를 또 하나 준비한 무라쿠모 팀입니다. 저 크기면 10kg은 나가겠어요."

아니 좀. 작작 해라 진짜!

"아니 씨, 대체 사람 세 명 먹이겠다고 돈을 얼마나 갖다 바른 거야?!"

보니까 카메라맨도 아까부터 무슨 인터뷰 방송 찍는 것 마냥 저쪽에만 붙어 있는데, 아무리 심사위원단의 평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관중의 호응 또한 평가에 영향이 없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런 와중에 관중의 인기를 그야말로 자기들이 독식하고 있으니 이제는 나까지 더 쫄리기 시작한다.

"와? 이제 좀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나?"

"넌 이 상황이 웃기냐."

"지는 아까부터 웃고 있더마. 마! 긴장 풀어라! 내도 이리 멀쩡한데 싸나이가 그럼 쓰나?"

웃기시네. 아까부터 바닥을 툭툭 치고 있던 발이 이제는 거의 탭댄스를 추고 있구만.

'그나저나 진짜 안 좋은데.'

장난은 슬슬 그만두고, 이제 정말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일단 중요한 건 누군가 나서서 맥을 한 번 끊어주는 건데…… 솔직히 그게 가능한 팀이 없다.

저렇게 눈에 확실히 보이는 걸로 사람을 눌러 죽이니 이거 뭐 버틸 수가 있나.

그렇다고 여기서 우리가 초밥을 만들고 있다고 공개하는 건 더욱 안 된다.

분명 체급차이에 눌린다. 안 나서느니만 못하다.

이 상황을 풀어나갈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아 맘고생만 하던 그때, 갑자기 낯익은 소리가 마운드 반대편을 시작으로 거세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빠아아아아앙!

클락션이다. 요리 완성을 알리는 클락션. 소리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벌써?'

결승이 시작한 지 이제 고작 30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90분 동안 치르는 결승에서, 누가 벌써 클락션을 울린단 말인가?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것 같은 뜬금없는 클락션에 관중의 시선과 카메라의 렌즈가 돌아간 자리.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이미 의연한 태도로 완성된 음식을 푸드트럭 앞으로 내어놓고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기, 김가네 돼지국밥! 김가네 돼지국밥 팀이 결승 시작 33분 만에 요리를 완성해냅니다!"

E조. 돼지국밥집만 세 곳이던 지옥의 조를 뚫고 나온 그들이 바로 클락션을 울린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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