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이기는 요리.-2-
떠나가는 이들을 배웅하는 퇴장식과, 그 안타까움을 단박에 도로 집어넣을 만큼 웅장한 도열식이 끝난 후, 다시 한번 강백동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관중의 환호 속에서 2라운드가 시작했다.
참가자와 관중의 분위기는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초가을 찬바람이 점점 불기 시작하는 사직구장을 온통 뜨겁게 달굴 지경이었다.
"대단한 열기입니다. 지금 날씨가 정오인데도 살짝 찬바람이 불어서 외투를 챙겨 입었었는데 이제는 벗어야 할 것 같아요. 기세가 불같다는 말을 종종 쓰잖아요? 지금 관중 여러분을 보면 그런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아요!"
"동감입니다. 부산 분들은 성미가 좋고 나쁜 걸 가리지 않고 불같다고 하시던데, 저도 이번 기회에 그걸 느끼네요."
그 화제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어느 의미 태평한 감상을 읊는 두 심사위원과는 달리 진영배는 좀처럼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그, 그러네요. 하하……하."
두 사람의 말에 동의하는 척 이마 위로 배인 식은땀을 닦아낸 진영배는 지금으로부터 약 십수 분 전. 휴식 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
"화장실을 리모델링 했다더니, 그나마 다행이구만."
사직구장의 외진 화장실.
되도록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을 찾던 진영배가 끝끝내 자리를 찾아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그 화장실의 대변기 칸이었다.
그가 때아닌 화장실까지 두 발로 직접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바로 그의 핸드폰으로 온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십시오.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라는 발신자 불명의 문자 때문이었다.
발신자 불명……이라고는 해도, 그저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였을 뿐이지만. 그 문자를 본 시점에서 진영배는 이미 그 문자를 보낸 이가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기실, 그에게 굳이 남몰래 대화를 나누자는 소리를 할 사람은 장담컨대 이 좁고도 넓은 부산 바닥에서 채 손 한 짝도 채우지 못할 테니까.
화장실 안과 다른 칸을 살핀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에게 문자를 보낸 번호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마 대포폰이겠지.'
철저한 남자다. 굳이 발신자 불명 전화 같은 수법을 써서 의심을 받느니 돈을 써서 대포폰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 그 남자다운 행동거지였다.
신호가 몇 차례 채 가기도 전, 미리 전화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금세 전화를 받았다.
"……여보쇼."
─아, 회장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습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 얼마 전 들었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가 예상한 대로, 정체불명의 문자를 보낸 장본인이 자신이 예상했던 그 인물이 맞다는 것을 깨달은 진영배의 눈가가 날을 세웠다.
쯧.
김종권, 그 독사 같은 웃음을 떠올린 진영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능청은 됐고, 휴식시간 길지도 않은데 용건만 빠르게 정리합시다. 문자는 뭐하러 보낸 거요?"
─……회장님 뜻이 그러시다면 저도 수고를 덜 들여서 좋죠. 별거 아닙니다. 부탁이 하나 있어서요.
"부탁? 당신이 처음 부탁한 것도 제대로 들어줄지 말지 결정도 안 했는데, 무슨 염치로 가짓수를 늘리겠다는 건가?"
진영배는 며칠 전 요정에서 김종권과 독대했을 때 그가 청한 부탁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그의 제안대로 행동했을 때 모가지가 남아날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진영배 자신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그런 마음을 품은 진영배와는 달리 김종권은 한 차례 깨문 그를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뭐요?"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그 심사위원이 선수 중 누군가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하면, 그건 꽤 큰일 아니겠습니까?
"이, 이보게!"
진영배는 가슴 깊은 곳부터 솟구친 기함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그런 짓을 하면 당신도 멀쩡하진……?!"
─생각해 봅시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이런 메일을 받습니다. 부산 요식업회 회장과 모 음식점 사장이 대회 전날 은밀한 밀회. 요즘 기자 중에서 팩트체크 같은 거 신경 쓰는 사람 몇 없습니다. 조회수만 올릴 수 있다면 다른 나라 대통령도 죽일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모 음식점 사장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시간을 쓴다? 그럴 리가 없죠. 바로 대서특필 될 겁니다.
혹시 모를 그 상황을 상상하며 진영배가 부르르 몸을 떨자, 김종권은 기세를 타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첫 타자로 대중의 몰매를 맞는 건 회장님이시겠고……. 회장님이 앞으로 나서 바람막이가 되어줄 동안 뒤에 숨어 있던 그 누군가는 유유히 빠져나가고도 남죠.
"자네,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내가 죽자고 같이 터트리면? 응? 그때는 같이 끝장이야!"
─회장님이 폭로를 하신다고요? 설마요. 가만히 몰매를 버티고만 있으면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는 없어지고, 뒤이어 등장한 어떤 기자가 '해당 기사는 탈락한 어느 식당의 사장이 날조한 것이다!'라는 기사를 써줄 텐데요? 잠시 몰매를 맞고 누명을 쓴 의인으로 재기하던가, 아니면 다 같이 끌어안고 아주 가라앉던가. 그 2택에서 후자를 고를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뭣보다, 후자를 고른다고 해도 혼자 외로이 가라앉게 될 테지만요. 라며 실소를 머금고 말을 마무리하는 김종권의 행동에, 진영배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수그리며 답했다.
"……그래,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좋겠습니까."
사실상의 항복선언이었다.
***
김종권의 요청은 그가 말한 대로 간단했다.
지금 어느 한 팀에 심사위원, 관중을 가리지 않고 주목도가 너무 높아져 있다. 티 나지 않게 나서서 그 주목을 헤쳐 달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간단한 요청이었다. 어느 한 팀이라고 해봐야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팀이 있었고, 주목을 헤치는 게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2라운드에 참여한 팀이 열다섯. 조리시간이 한 시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각 팀을 균등하게 포커싱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4분에 불과한데, 그 시간을 초과해서 너무 한 팀만 주목하는 상황은 주최측에서도 피하고 싶은 것이었으니까.
다만, 이 요청을 받은 진영배는 참으로 죽을 맛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내가 뭐가 잘났다고 이런 데에 나와서…….'
이전 김종권과의 대화에서 진영배가 스스로를 빌어 '아무런 실행능력도 없는 단순한 명예직'이라 말한 것은 한치의 가감도 없는 사실이었다.
음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최근 2030 세대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박종원.
존재만으로 관중의 열렬한 환호성을 이끌어내는 부산이 낳은 천하장사 강백동.
그에 비해 진영배 자신은 그다지 내세울 만한 특기라는 게 없다고 스스로 자조했다.
'내가 한 거라고 해봐야…….'
막 한국이 성장의 태동을 이루기 시작한 그때부터 부산 토박이로 오랜 세월 가게를 운영하며 인맥을 쌓은 게 전부.
요식업회 회장이 된 것도 점점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고 가게를 정리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다른 상인회에서 추천을 받아 올랐을 뿐이다.
요식업회 회장이라고 해봐야 그다지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다. 식약처에서 내려오는 공문을 대표로 받아 상인회에 배부한다든가, 회비를 잘 챙겨 명절날 선물세트를 준비한다든가, 그 외에도 방송국 등지에서 촬영을 나올 때에 자영업자와 방송국 사이에 껴 완충제 역할을 하는 정도일까.
사실, 제법 다양한 일거리를 처리하며 어느 식당이든 알게 모르게 몇 번은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외부에서 나올 만큼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요식업회였으나, 진영배는 그런 자신이 하는 일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 두 사람 신경을 돌리게 하냐고…….'
그러나 진영배가 한탄할 틈도 없이, 두 심사위원은 벌써 시선을 둘 곳을 정한 지 오래인 듯 진영배보다 앞서 행동에 나섰다.
"오호라, 1라운드 때도 이목을 모았던 B조 3팀은 돼지 안심을 저미고 있네요."
"무슨 요리를 하려고 하는 걸까요? 선생님은 아시겠나요?"
"글쎄요……. 일식에서 돼지 안심을 사용하는 요리라고 하면 보통은 돈카츠겠죠."
"돈까쓰요? 왜 김밥천당이나 경양식 식당에서 파는 그거요?"
"그건 한국식 돈까스고, 그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저 돈카츠라고 하는 겁니다. 돈카츠라는 게 어떻게 생겨난 요리냐면요……."
'이런.'
상황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목은 이미 이전 라운드에서도 어린 나이에 훌륭한 솜씨를 보여줬던 찬혁 일행에게 쏠려 있었고, 그 집중을 깨트릴만한 소재를 진영배는 갖지 못했다.
'뭔가 방법이 필요해.'
이대로 가다간 또다시 찬혁 팀의 독무대가 될 터. 그러나 우연인지 행운인지, 그런 상황 속에서 진영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화르륵!
"오, 뭐죠?"
"와! 불길이 엄청나게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한참 고기만 자르고 있던 찬혁 팀의 모습이 슬슬 질릴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일까, 타이밍 좋게도 전광판 위로 웍을 휘두르며 불쇼를 하는 어느 차량의 모습을 송출했다.
가정용보다야 화력이 강하다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푸드트럭의 화구에서 토치까지 사용해가며 혼신의 불쇼를 보여주는 팀.
그 차량에 꽂힌 깃발을 본 진영배는, 지금이 바로 기회임을 직감하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저 팀은 동구에서 유명한 중화요리점인 만선반점이네요."
"만선반점이요?"
"재미있는 이름이네요? 많이 유명한 곳인가요?"
'됐다. 물었다.'
자신이 던진 미끼에 모여드는 두 심사위원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진영배.
그 스스로는 몰랐으나, 이것이야말로 박종원과 강백동 같은 다른 두 심사위원은 갖지 못한 진영배만의 장기였다.
수십 년을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부산에서 음식장사를 해오며 살아온 덕분에, 부산에 있는 음식점 중 나름 이름이 있는 곳이라면 과장을 조금 보태서 그가 모르는 곳이 없었다.
그 증거로, 이번 대회에 출전한 25팀 중 진영배가 모르는 식당은 단 한 곳도 없을 만큼.
그 본인은 모르겠으나 진영배의 그 장기 아닌 장기는 다른 심사위원은 물론이요 관중의 이목마저 한데 모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만선반점은 과거 개점 이후로 어부 어르신들이 자주 찾던 식당이었습니다. 새벽에 열어서 이른 오후에 닫지만 푸짐한 양과 좋은 맛, 빨리 나오는 음식은 새벽 일찍 배를 몰고 나가셔야 하는 어부 분들에게는 발을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게 만들었죠. 요즘에는 어부만이 아니라 하교하는 학생이나 근방에 사는 주민에게도 굉장히 인기가 좋다고 들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발붙일 곳이 없어서 줄을 서는 곳이에요."
"아하, 그럼 인기가 없을 수가 없겠네요."
"예. 특히 이 집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메뉴로 꼽는 게 삼선짬뽕입니다. 갓 잡은 오징어를 한 마리 통으로 올려주시는데, 오징어를 안주로 소주 한 병을 비운 다음, 칼칼한 짬뽕으로 바로 해장하는 맛이 정말 죽여줍니다."
"와……. 그거 진짜, 한 번 꼭 먹어보고 싶습니다."
이 심사에서 박종원이 순수한 요리 솜씨를 강조하고, 강백동이 처음 식당을 맞이하는 고객으로서의 입장을 강조했다면, 진영배는 그 모든 집의 단골로서 처음 온 이들에게 그 식당의 장점을 말해주는 이야기꾼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관중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어질 진영배의 말을 기다릴 만큼.
기세를 탔다. 그렇게 느낀 진영배는 뒤이어 바뀌는 전광판 속 가게를 하나씩 짚으며 그에 알맞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가게는 동구에서 돼지국밥 하면 빠질 수 없는……."
"여기는 밀면으로 유명한……."
"이곳은 소갈비가 참 맛있는……."
마치 올튜브의 맛집 소개 영상을 보는 것 마냥 쓱쓱 지나가던 전광판 화면 속, 마침내 잡힌 김종권의 가게, 무라쿠모의 깃발을 본 진영배의 입담이 잠시 잦아들었다.
솔직히 말해 어느 특정한 참가자를 방해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이렇게 저 이름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그래도 어쩌겠어.'
여기서 말을 멈추면 정말로 편파가 되고 만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 예. 이곳은 부산 시민 여러분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이죠. 단일 규모로는 부산 최대. 아니, 전국 최대인 고급 일식당 무라쿠모입니다."
"아, 여기 기억나네요. 회 뜨는 기술이 진짜 엄청났어요."
"선수로 참가하신 분도 외국인 분이신 것 같던데요."
"예, 맞습니다. 무라쿠모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바로 실장급 인사를 거의 전원 현지인으로 채웠다는 건데요, 그만큼 부산에서 일본의 맛 그 자체를 가장 현지와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평판이 자자합니다."
심사위원단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침 타이밍 좋게도 무라쿠모의 도마 앞에 서 있던 요리사가 생선을 한 마리 꺼내 들었다. 그 기술을 초대형 화면으로 견식할 좋은 기회라 여긴 이들의 눈이 그곳에 몰린 그 순간, 그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잠깐만요. 저거 설마……?"
비늘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꼭 고무 같은 질감의 껍질.
마치 바람이 가득 들어간 풍선 마냥 빵빵하게 부푼 몸.
그리고 그 커다란 앞니를 비비면서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까지.
누군가는 알아보지 못한다 하여도, 심사위원단만큼은 모두가 그 생선의 정체를 눈치챘다.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무, 무, 무라쿠모 식당! 복어! 복어를 꺼냈습니다!"
먹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생선.
그러면서도, 그 목숨을 거는 게 아깝지 않다는 온갖 기록이 가득한 생선.
복어가, 그들의 도마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이런 뜻이었나.'
시선만 한 번 돌려주면, 나머지는 자기네가 알아서 하겠다던 김종권의 아리송한 말을, 진영배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