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젊은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2-
"흠. 저 애들이……."
우렁찬 환호성을 받으며 애써 담담한 태도로 크게 손을 저어 인사하는 찬혁 일행의 모습을 보며 김종권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하던 건 어디가고 웬 꼬맹이가 왔나 했더니, 쯧."
찬혁이 예상한 대로, 성미설의 가게를 모른다고 말했던 김종권의 말은 그저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블러핑에 불과했다.
그는 스즈라는 가게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자세하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부산만이 아니라 전국을 뒤져도 단일 매장 규모로는 손꼽히는 크기를 자랑하는 일식당의 사장인 그가, 과장을 조금 보태어 동네 구멍가게 수준에 불과한 성미설의 가게에 대해 어째서 이토록 상세히 알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김종권은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스즈, 정확히는 스즈를 이끄는 성미설이란 인물을.
'마침 그 여자가 번거로운 참이었는데.'
당초 그가 스즈라는 가게에 대해 흥미를 가진 것은 다름 아닌 서로의 가게가 가진 유사성 탓이었다.
본선에 올라온 식당 중 그의 무라쿠모를 제외하면 유일한 고급 일식당. 안 그래도 우승을 위해 다른 팀의 정보를 수집하던 차였던 그의 흥미를 끌기엔 차고도 넘치는 이유였다.
하지만 조사에 들인 수고가 무색하게도 스즈는 그다지 그가 주목할 가치가 없는 가게였다. 개업기간 5년 미만, 성장력은 평균보다 살짝 낫고, 입지도 평범했다. 그 시점에서 김종권이 스즈에 내린 평가는 박정했다.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김종권은 스즈에 대한 조사를 멈추지 못했다. 이성의 판단과는 다르게, 그의 날카로운 감이 경종을 울렸다.
얼마 후, 그의 직감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김종권이 여태껏 주목했던 부분은 오로지 산출된 데이터 뿐. 그렇기에 그 속에 감춰진 실체를, 그것을 이끄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떤 것이다.
"설마 그 운류의 후계자였을 줄이야."
고급 일식당을 모토로 사업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가게를 가꾼 김종권이 가진 신념이 하나 있다면, 자신의 식당과 같은 고급 외국음식 식당을 찾는 고객은 언제나 현지의 것과 가장 가까운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현지화, 현지화. 한창 그런 열풍이 불어 해외의 음식을 파는 가게가 유행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런 건 한순간의 거품에 불과하다.
진정 오래 남는 식당은 비싼 돈을 들여 해외로 가지 않더라도 해외에서 먹는 것과 같은 유사한 경험을 선사하는 식당. 김종권은 그런 모토 아래 현지인 셰프를 대거 기용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미설의 가게 또한 그 조건에 훌륭히 부합했다. 다만 김종권의 가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수준의 차이다.
"운류, 운류란 말이지……."
운류는 일본의 주방이라 불리는 오사카에서도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최상급 료칸. 그가 고용한 일본 현지의 요리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 봐야 운류라는 이름 앞에서는 달 앞의 반딧불이나 마찬가지다.
김종권 자신도 운류 출신의 요리사를 고용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으나, 수많은 시도 끝에 그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애당초 이미 고국에서 금전과 명예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를 무슨 수로 데려온단 말인가.
심지어 일개 요리사조차 투자 대비 효율이 맞지 않아 고용하지 못한 판국에 후계자라니? 농담도 이런 농담이 없었다. 애당초 지금의 부산에서 순탄하게 가게를 성장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부터 이상하게 생각해야 했다.
장담하건대, 만약 자신과 성미설의 창업 순서가 반대였다면. 아니, 동시기 정도만 됐어도 일식당 창업 따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 김종권은 자조했다.
쉽게 말해서, 스즈는 김종권의 롤모델이자 안티 테제 그 자체였다. 그가 세운 기치의 완벽한 상위호환이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잘 풀리는군. 운이 좋아.'
이미 김종권의 무라쿠모와 성미설의 스즈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의 차이가 생겼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자신은 이미 다져놓은 기반을 딛고 이 대회를 발판 삼아 훨씬 높은 곳을 향해 올라설 것이다. 이미 벌어진 차이는 골짜기를 넘어 계곡이 됐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차이가 좁혀질 일은 없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킬 마지막 기회를 손에서 놔 버렸지.'
만약 성미설 본인이 대회에 나왔다면 아무리 청탁과 용병 같은 수단을 다한 김종권이라도 우승을 장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미설은 고작 17살짜리 고등학생 두 명을 내세워 그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다.
서울시 배 전국요리대회? 푸드 엑스포? 확실히 놀랍다. 대단한 천재겠지. 그러나…….
"세상에는 선이란 게 있다."
앞선 개막식에서 박종원이 말한 대로, 공식적으로 공개된 찬혁의 경력은 전부 한식에 집중되어 있었다. 성미설의 딸인 여학생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한 분야에서 저토록 엄청난 성과를 이룩한 아이가 다른 분야에서도 10년차 일류 프로를 뛰어넘을 실력을 가졌을 리 없다.
'혹시 모르지, 그 재능으로 성미설 사장 아래서 5년쯤 철저하게 배웠다면 기적 정도는 일으킬 수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한 김종권은 이내 홀로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 가능성을 떠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기적은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니까.
비릿한 미소를 숨긴 김종권이 1라운드가 시작된 마운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기 멋대로 경쟁에서 나가떨어진 팀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앞으로는 그저 비싸게 고용한 용병이 제 역할을 다해주기만을 기대하면 될 뿐이었다.
***
우리는 대회가 개최되기 전, 정확히는 어젯밤에 대회에서 어떤 요리를 만들지에 대한 대략적인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런 태그배틀 형식 대회에서는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그렇기에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서로 선택지를 사전에 조율해둔 것이다.
'이를테면 족보를 만든 거지.'
이 족보를 만드느라 어젯밤엔 그다지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평소에 잠이 많은 편이 아니라는 건 이럴 때 다행이었다. 적어도 피곤해서 집중력이 심각하게 떨어지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을 보고도 서로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1라운드. 쨍쨍한 햇볕이 쬐는 뜨거운 날씨. 하지만 한여름처럼 습하고 후덥지근하여 시원하게 땀을 빼고 싶은 뜨거움이 아닌 살짝 건조한 열풍이 부는 초가을의 더위.
이럴 때는 후끈한 이열치열 요리 대신, 시원하고 목넘김이 좋은, 신체에 수분을 가득 채워주는 메뉴가 최고다.
그리고 그런 메뉴라 한다면…….
"그거제?"
"그거지."
그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강백동MC의 우렁찬 시작 선언이 들림과 동시에 우리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재료 냉장고를 향해 달렸다.
재료 냉장고…… 라고, 허울 좋게 부르긴 해도 이것 또한 탑차다. 다만 가구 등을 나를 때 쓰는 거대한 사이즈의 냉동, 냉장 탑차라는 차이가 있을 뿐.
옆쪽 벽이 통째로 올라간 탑차에서 재료를 꺼낼 수 있는 시간은 딱 10분. 이후 탑차는 냉기 보존을 위해 문을 닫기 때문에 열린 시간 내에 사용할 재료를 전부 꺼내야 한다.
거창하게 카트까지 끌고 누구보다 먼저 재료차에 도착한 우리였으나, 우습게도 챙긴 재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밀가루, 계란, 파, 그리고 야채 여럿과 새우 몇 마리.
'너무 적게 챙긴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 대회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결코 음식을 많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라운드 25팀, 2라운드에 15팀, 3라운드에 5팀.
솔직히 말해 밥을 티스푼으로 한 숫갈 씩만 먹어도 저만큼 먹으면 배가 부르다. 물론 중간중간 조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껴 있긴 하지만, 심사위원의 피로도를 생각하면 메뉴의 양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빠릅니다! 빨라요! 시작하자마자 몇몇 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건 이미 대회 시작 전부터 메뉴를 생각해두고 있던 거네요. 준비성이 좋습니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MC의 목소리를 들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빨리빨리 스텝을 밟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
모든 재료를 들고 푸드트럭에 올라탄 우리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나는 바로 반죽 시작할게, 기름 올려서 데우고 다른 재료 밑 준비만 먼저 해줘."
"알았다."
반죽과 튀김. 이 두 조합을 들으면 아마 누구든 예상할 수 있겠지.
우리가 준비하는 메뉴는 바로 우동. 튀김을 곁들인 우동이다.
요리대회에서 꺼내기에는 너무 간단한 메뉴가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도 가오가 있다. 일식당 이름을 달고 나왔으니만큼.
'평범한 우동 한 사발로는 못 참지.'
속성 사누키 냉우동. 그게 바로 우리가 1라운드에 내세울 메뉴의 이름이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밀가루와 물의 비율을 잘 맞춰 반죽한 뒤, 숙성을 거친 반죽을 겹치고 늘리고 면 모양으로 잘라 국물을 부어 고명과 함께 낸다.
이게 끝이다. 정말 단순하다.
하지만,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단순한 요리일수록 제대로 된 일품 하나를 내기 위한 노력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사누키 우동도 그런 계열의 요리 중 하나다. 특히, 이 녀석은 노력 중에서도 아주 단순한 육체 노동을 굉장히 좋아하는 녀석이다.
오로지 물과 밀가루로만 만든 반죽이 글루텐이 촘촘하게 형성될 때까지 죽어라 반죽하는 건 정말 전신의 모든 근육을 다 써야 한다.
족타足打라고 불리는 사누키 우동의 전통적인 반죽법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팔로 하면 정말 더럽게 힘들거든.
"흡! 흡! 흡!"
랩을 씌운 반죽을 조리대 위에 얹고 무거운 철제 냄비를 이용하여 온힘을 다해 누른다. 반죽은 뭉개는 게 아니라 늘리는 것이라던 성 셰프의 말을 속으로 되새기며 계속.
그러나 십 수 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이 짓을 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몸에 힘이 빠진다. 그건 문제다. 반죽을 누르는 힘이 약해지면 마찬가지로 완성 또한 느려진다.
"교대!"
"간데이!"
그렇기에 2인 1조라는 이 특성을 최대한 사용한다.
나와 양희연이 서로가 선 자리를 바꾼다. 녀석은 반죽을 만드는 자리로, 나는 재료를 손질하는 자리로.
지난날 학교에서 했던 지옥주 수업이 빛을 발한다.
서로가 하던 작업이 어느 부분에서 끊겼는지 순식간에 파악하고, 그대로 작업을 대체하는 상황판단력은 지옥주 같은 특수한 수업이 아니라면 쉬이 기르지 못한다.
단호박, 새우, 모듬야채.
각각의 재료를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넣기만 하면 완성되는 지점에서 손질을 멈추고 바로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찜 냄비를 빈 채로 불에 올려 살짝 가열해준 뒤, 조금씩 물을 뿌려 습도와 온도를 적당하게 조절해준다. 대체 빈 냄비를 들고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싶겠지만, 듣고 웃지 마라. 이건 일종의 발효실을 아날로그하게 흉내 낸 것이다.
사누키 우동을 만들 때에는 반죽을 발효하는 과정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이때 햇볕이 들지 않는 환경에서 하룻밤 정도는 재워줘야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방법이지만 이게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아니, 진짜로.
"반죽 발효 시작한다! 온도랑 습도는 내가 계속 볼 테니께 니는 국물이랑 고명 마무리해라!"
"알겠어!"
사누키 우동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면. 국물은 부차적인 요소이기에 중요순위도 낮고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미리 준비해 온 1번 다시에 간장, 설탕, 술, 미링을 적당히 섞어 끓이면 끝이다.
끓인 국물을 얼음물에 중탕하여 차게 식히고 있자니 타이밍 좋게 발효를 끝낸 반죽이 간이 발효실에서 나왔다.
"여기 준비 끝내놨어! 면 내가 마무리할게!"
"알았다."
반죽이 나오자마자 다시 한번 자리를 스위칭. 마지막 반죽은 비슷한 크기로 잘라 층층이 쌓은 반죽을 한 층이 될 때까지 눌러 반죽해줘야 하기에 당초보다 훨씬 많은 힘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왔다 갔다 자리를 바꾸는 이유가 다 있다.
'젠장, 더럽게 힘드네!'
처음 반죽할 때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난 탄력. 청신호다. 이 탄력이야말로 사누키 우동의 진가. 전통방식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그 발끝에나마 닿았다는 것은 분명히 경탄할 만한 일이다.
"10분!"
"충분해!"
반죽을 밀대로 펼쳐 늘이고, 밀가루를 뿌려 두루마리를 말 듯 접어준 뒤, 일정한 굵기로 썰어 미리 불에 올려둔 팔팔 끓는 물에 삶아낸다.
'3…… 2…… 1…… 지금!'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삶은 면을 끄집어내 그대로 얼음물에 퐁당. 전분을 씻어줌과 동시에 면의 찰기를 극한으로 올려주는 과정이다.
나머지는 간단하다. 대접에 면을 정갈하게 담고, 이가 시리도록 차게 식힌 국물을 자작하게 부어준 뒤 쪽파, 어묵, 텐카스 등의 고명을 얹어 채반에 담은 튀김과 함께 준비하면 완성!
이제 마운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심사위원을 부르기만 하면 되지…… 만, 오늘은 보다 더 효과적인 어필 방법이 우릴 위해 준비됐다.
"다 됐다! 눌러!"
그 말을 듣자마자, 양희연이 대답조차 없이 푸드트럭의 안쪽 벽에 설치되어 있던 버튼을 온힘을 다해 짓뭉갤 기세로 누른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앙!
뱃고동 저리가라, 기차화통을 무색하게 만드는 부산 여아의 클락션이 사직구장 전체를 메아리치니, 관중들 또한 질 수 없다는 듯 목청껏 소리를 내지른다.
"와오."
솔직히 그 엄청난 기세에 주눅이 든 내가 살짝 질린 소리를 뱉자, 희연이 녀석이 땀방울이 흐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마! 봤나? 이게 붓싼이다!"
아니, 너 일본사람이잖아.
근데, 신나서 웃는 이 녀석 얼굴을 보고 있자니 딱히 상관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