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젊은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1-
김종권이라 자신을 소개한 아저씨가 떠나고 난 뒤, 각 팀의 참가자를 포함한 진행요원들이 현장정리를 끝내고 자리에 합류했다.
인원이 인원인지라 자리를 찾아 앉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곧 모두가 우리 맞은편에 서 있던 진행요원을 바라보며 조용히 경청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목을 가다듬었다. 진중한 얼굴과 가슴팍에 흘림체로 쓰인 추석특집 요리대회! 라는 문구가 전혀 매치가 안 되어 살짝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전달에 앞서 통제에 잘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가벼운 전달사항이라고 한 만큼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첫째는 대회 시간표. 1, 2 라운드를 60분씩, 마지막 결승 라운드는 90분. 사이사이 휴식시간을 넣어 총 행사시간을 4시간 정도로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행사는 1시경에 시작하여 5시경 폐막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참가해주신 매장의 저녁 장사에 차질이 없게끔 할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아무렴 우승하고 가게에 갔는데 밥 먹으러 오는 손님이 아무도 없으면 말짱 꽝이지!"
"……이상의 내용은 행사 진행 상황에 따라 변경될 여지가 있으니, 이 점 숙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오. 훌륭한 무시 능력.
김치국도 아니고 배추 절인 소금물을 대야 째 들이켜던 아저씨가 똥 씹은 표정이 됐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번째는 행사 진행 순서라는데, 우리가 할 일이라곤 적당히 개회식 인사 때 오와 열을 맞추고 서서 아침점호 뛰는 예비군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지정받은 차량으로 돌아가시면 각 참가자 여러분이 요청하신 디자인대로 깃발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확인하시고 챙겨주시면 됩니다. 위치에 관해선 차후 리허설 때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깃……발?"
세상에. 훈련병 때도 기수는 해본 적이 없는데 애먼 부산에서 기수를 다 하네.
이 나이에 전쟁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깃발을 들고 수많은 사람 앞을 거닐라 하니 좀 심각하게 쪽팔렸지만, 어쩌겠는가.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조리 시 지켜야 할 간단한 주의사항에 대한 이야기였다.
1. 조리 시 이용 가능한 공간은 오직 푸드트럭 내부뿐. 식재료나 조리도구 등을 갖고 트럭 바깥으로 나와 조리하지 않는다.
솔직히 비좁은 곳에서 요리하다 잠시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따지는 이도 있었지만, 볼일이 있는 경우 몸만 나오는 건 언제든 가능하다며 반박을 일축했다.
2. 가져온 조리도구를 쓰는 건 제한을 두지 않지만, 미리 준비해 둔 식재료는 육수와 소스, 양념류만 사용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는 조금 낭패감과 득 본 기분 양쪽을 함께 느꼈다.
부산의 명물을 꼽으라면 돼지국밥이 빠질 수 없다. 그런 만큼 오늘 본선 진출자 중에서도 돼지국밥 가게가 여러 곳이고.
그런 국물 요리의 핵심은 육수인데 그 육수를 처음부터 끓이려면 시간이 보통 들어가는 게 아닐 터. 그런 의미에서 미리 만들어놓은 육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합당한 조건이지만, 경쟁자가 강력한 메리트를 갖는다는 건 마음에 걸린다.
'물론 우리도 그만큼 득 보는 게 있긴 하지만.'
일식은 육수가 갖춰지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굉장히 많아지거든.
그 외에도 자잘한 규칙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요리하면 어지간해서는 지킬 수 있는 규칙이었으니까.
그 외에도 자잘한 설명 몇 가지를 끝으로 모임도 종료.
리허설 전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쓰라는 말에 각 팀이 분주히 움직였다. 아마 푸드트럭이라는 생소한 환경에서 직접 연습을 해볼 요령이겠지.
"우리도 가자. 연습해야지."
"응."
물론 우리도 연습할 필요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방금 벤치에 있을 때 분위기는 가벼웠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인물 중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다.
다들 그토록 양희연이 투덜대던 예선전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올라왔을 터. 과장을 조금 보태서 여기 모인 요리사는 부산의 top20 식당의 주인이거나, 그 식당의 실세.
'이 바닥에서 적어도 십수 년은 굴렀을 프로와 완전히 동등한 조건에서 하는 대회라…….'
그게 쉬울 리가.
하지만 어려울수록 생기는 재미라는 것도 있는 법.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나도 저들과 같은 프로.
군필남고생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마.
***
연습, 리허설, 간단한 식사.
개막식까지 이어진 간단한 일정을 처리하고 있자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분명 여기 도착했을 때에는 이른 아침이었는데 벌써 개막을 앞두고 있다니.
터널 같은 복도 안에 있는 탓에 바깥상황이 잘 보이질 않는 와중, 옆에 서 있던 양희연이 미묘한 얼굴로 끙끙대고 있는 게 보였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이다."
아무것도 아니긴, 손발을 가만 못 놔두는 걸 보니 잔뜩 긴장했구만.
"혹시 화장실 급하냐? 말을 하지. 빨리 다녀와."
"그런 거 아이라고! 진짜 미쳤나 니?!"
"아니면 아닌 거지 사람을 때리고 있어."
맨날 수kg짜리 쇳덩이를 휘두르던 팔 힘으로 사람을 때리면 얼마나 아픈지 아는가.
그래도 이게 좋다. 아니, 내가 맞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어때, 이제 좀 괜찮냐?"
"뭐? ……어라."
아까까지만 해도 수전증이라도 온 것 마냥 떨리던 녀석의 팔다리가 지금은 제법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았다. 본인도 신기한지 손목, 발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제 상태를 확인한다.
"긴장될 때는 한 번 힘을 꽉 줬다가 푸는 걸 몇 번 반복하면 훨씬 나아져. 기억해둬."
"……니 참 별걸 다 안다."
별걸 다 알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훨씬 나아진 표정으로 잔잔하게 웃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듯 두드린 뒤,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깃대를 꽉 쥐었다 놓기를 몇 차례.
안 그런 척 가장하고 있긴 하지만 나도 조금 긴장한 건 마찬가지라서.
양희연 몰래 몸에 쌓인 긴장을 풀어주던 그때, 입구 쪽에서 상황을 살피던 진행요원이 달려와 우리 앞에서 외쳤다.
"A조 입장 끝났습니다! B조 참가자 여러분 입장 준비해주세요!"
드디어 우리가 입장할 차례구나.
긴장도 적당한 수준으로 풀려서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깃대에 매달린 깃발도 살짝 잡아당겨 주름진 곳이 없도록 펼친다. 첫인상은 중요한 법이다.
"입장하겠습니다! 리허설대로 진행할 테니 잘 따라와 주세요!"
우리를 비롯한 B조 참가자 일행이 줄을 맞춰 앞으로 걷는다.
가을에 맞춰 살짝 서늘한 기운이 감돌던 복도를 지나 햇볕이 새어 들어오는 입구로 향할수록 서늘함 대신 따스한 공기가 발목과 목덜미를 스친다.
그리고 마침내 입구를 지나 구장으로 들어섰을 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제법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 사람, 사람.
정면, 좌측, 우측, 배후를 가리지 않고 구장의 관중석에 사람이 한가득.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이 관중석을 메우고 있다.
"……야, 이거."
웃자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다큐가 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이거 만약 1라운드 탈락이라도 했다간, 정말 개 쪽이겠구나.
절대 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
홈 베이스 바로 뒤쪽에 설치된 간이 천막 아래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다.
부산 요식업회 회장 진영배.
부산에서 태어난 씨름선수 출신 연예인 강백동.
마지막으로 사업가이자 요리연구자로 유명한 박종원.
오늘 요리대회를 위해 케이블 방송사와 연계하여 특별히 초청한 게스트이자 심사위원인 세 사람은 참가자에 대한 소개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B조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수십 년 동안 국민MC 자리를 지켜온 끼는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일까.
우람한 덩치에서 나오는 커다란 성량은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도 대단했다. 그 커다란 사직구장에 가득 찬 관중의 성량을 한 차례 찍어 눌렀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관중의 텐션을 끌어올리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는 것이 바로 강백동의 장점. 그의 호통에 가까운 외침에 자극받은 관중 사이에서 커다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윽고 찬혁을 비롯한 B조 선수들이 아침에 했던 리허설대로 자리를 잡고 깃발을 번쩍 세우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훑는 카메라가 촬영한 영상이 실시간으로 거대한 전광판에서 송출됐다.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전광판에서 나올 때마다 경기장 한쪽에서 크게 울려 퍼지는 환호성. 참가자와 친분이 있는 관객, 혹은 참가자의 가게의 단골인 관객의 성원이었다.
그 뜨거운 열기에 놀랐다는 듯 호들갑을 떠는 강백동의 커다란 얼굴이 뒤이어 전광판을 꽉 채우자 관중석에서 자지러지는 웃음이 쏟아진다.
존재만으로 관중의 호응도를 불러일으키는 스타성. 비싼 값을 톡톡히 해내는 모습에 PD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정말 대단한 열기입니다. 누가 보면 진짜 홈경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홈경기는 홈경기죠. 다 부산 소재 식당이잖아요. 여기가 홈이 아니면 어디가 홈이겠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건 청백전인 거네요?"
"팀 숫자만 보면 20색 크레파스전이죠."
가벼운 농담에 다시 한번 관중이 웃고,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토크가 이어진다.
"그런데 선생님, 듣자 하니 이번 B조, 아니 대회 전체를 두고 봐도 특이한 팀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눈치 빠른 분이라면 벌써 보셨을 겁니다. B조 3팀이 그렇죠."
박종원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참가자를 향해 있던 카메라맨이 잽싸게 찬혁 일행을 포커싱한다.
전광판 가득 담기는 앳된 소년, 소녀의 모습. 단정하게 차려 입은 조리복이 어울리면서도 아직 어색하다.
부끄럽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이 전광판과 카메라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30대, 많으면 60대에 이르는 참가자 속에서 눈에 띄게 어린 고등학생이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니까.
"B조 3팀. 일식당 스즈 대표로 참가한 두 선수입니다. 류찬혁 선수, 양희연 선수."
"와, 굉장히 젊은 선수들입니다."
"아무렴 고등학생인데요. 이제 1학년인데 저건 젊은 게 아니라 어린 수준이죠."
"고등학생이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번쩍 뜨는 강백동. 놀라움과 함께 노련한 어른들 사이에서 고생할 학생들을 향한 걱정이 담긴 말투였으나 박종원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 선수를 만만히 보면 안 됩니다. 심사위원석에 앉기 전에 프로필을 쓱 훑어봤는데, 대단한 친구들이에요. 양희연 선수는 어릴 적부터 참가한 식당의 오너셰프인 어머니에게 요리기술을 배워 지금은 국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심조리고등학교 학생이고, 이미 예선에서부터 실력을 보였죠."
그 말과 함께 전광판에 스치는 몇 장의 사진. 양희연과 성미설이 함께 예선전을 치르는 모습이 담긴 사진 속에는 프로 저리가라 할 매서운 눈빛으로 생선을 다듬는 희연의 얼굴이 가깝게 찍혀 있었다.
"와, 대단합니다."
"그리고 다음, 류찬혁 선수. 이 선수는 더 대단한 선수에요. 아마 관객분들 중에서도 젊으신 분은 아실 겁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양희연 선수와 같은 성심조리고등학교 재학생입니다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한 번 보세요."
신호를 받은 PD가 영상팀을 움직여 전광판 위로 몇 개의 영상을 송출했다.
사신수와 황룡을 표현한 푸드아트가 장식된 신선로를 중심으로 전시된 궁중요리, 철판 위에서 순식간에 완성되는 전병, 게로 만든 음식이 가득한 밥상.
영상으로만 보아도 놀라운 기교에 관중이 탄성을 흘린다.
약 30초 정도의 시간 동안 송출된 편집 영상을 본 강백동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게 다 뭐죠?"
"바로 저기 있는 류찬혁 선수가 직접 대회에 나가 만든 메뉴입니다."
"예?"
"류찬혁. 17세. 성심조리고등학교 1학년 재학. 출전 경력, 서울시 배 U-20 전국요리대회 전시부 우승, 2020 세계 음식 박람회 푸드쇼 9위, 대회 3위."
짧게 암전한 전광판이, 이번에는 어느 잡지의 표지를 스캔한 사진을 화면으로 띄웠다.
표지 가득 자리 잡은 찬혁의 사진과, 그 아래로 깔린 [한국 요식업계를 이끌 황금세대]라는 거창한 부제.
관중, 참가자, 심지어는 찬혁 본인마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전광판을 바라볼 때, 박종원이 말을 잇는다.
"나이는 어리지만, 참가자 중에서 가장 세계적인 경험을 한 선수입니다. 여태껏 세간에 보여준 모습만 봤을 때엔 한식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일식을 주제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제가 생각하는 이번 대회 최고의 다크호스 중 한 명인데, 어떻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네요."
전광판이 다시 한번 찬혁의 얼굴을 잡았다.
굳은 얼굴, 꿈틀거리는 눈가. 카메라를 향해 소심하게 손을 흔든 찬혁을 향해 수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놀라움, 대견함, 시기심, 경계심.
전자의 경우에는 관중들의, 후자의 경우에는 같은 참가자들의.
그 수많은 시선의 과녁이 된 찬혁이, 뻣뻣한 고개를 돌리며 속에서 응어리진 한숨을 헛바람과 함께 삼켰다.
"젠장. 엿 됐다."
본질이 어그로인 남자가, 뜻하지 않게 많은 적을 만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