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부산행.-5-
성 셰프의 말썽으로 일어난 작은 소동을 마무리한 뒤, 비로소 스즈는 정상 영업을 시작했다.
딱히 대단한 난리를 친 것도 아니었으니 평소보다 조금 준비가 덜 되긴 했어도 오픈을 못 할 정도의 시간 손실은 없었으니까.
이 말은 즉, 애당초 여기 직원도 뭣도 아닌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뜻이었지만…….
"인생, 그렇게 쉽게 풀리면 재미가 없지."
지금 난 여전히 스즈의 뒷주방에 있었다.
"뭘 그렇게 궁시렁거려?"
"아, 아닙니다."
그것도 설거지, 재료손질, 그 외 기타 등등의 잡일을 하면서.
잠시 내게 눈총을 향한 김재훈 쿡은 이내 옅은 날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여기가 안이지 밖……아니, 아무튼. 정식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실수하든 일이 늦든 뭐라고는 안 하겠는데, 대신 네 입으로 하겠다고 한 거니까 너무 빼진 마라. ……이미 잘 하고 있긴 하다만."
"옙."
그 말을 끝으로 손질된 재료를 두 팔 가득 들고 앞주방으로 나가는 김재훈 쿡.
그가 말한 대로, 사실 이건 내 과실이라고 할까,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렸다고 할까. 대충 쌓은 업보가 그대로 돌아온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냥 얌전히 말 들을 걸 그랬나."
성 셰프가 최초 내게 한 제안은 단순한 현장 견학이었다. 홀에 있든 주방에 있든 좋으니 적당히 가게 분위기를 살피길 바란다고 하셨는데, 당장 내일 열릴 대회에 앞서 가게 분위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합당한 제안이었다.
왜,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실 나는 딱히 안 그래도 되긴 했지만.'
여기서 가게 분위기에 더 적응했다간 당장 입사각을 재야 할 판이니까.
그렇다고 그 제안을 넘겨 버리기에는 성 셰프가 무안해질뿐더러 다른 선배들의 볼 면목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승낙했지만, 나도 조건을 붙였다. 견학이 아니라 실제로 하루 동안 일을 시켜달라고.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눈치가 좀 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자기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웬 낯선 사람이 일도 않고 제자리에 서서 자기 일하는 걸 빤히 지켜만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적어도 나 같으면 짜증난다. 보통 그렇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눈총을 받을 생각이 없다. 그럴 바에 그냥 일을 하는 게 낫지.
사실 주류를 파는 식당에서 미성년자가 알바 뛰는 건 불법이지만, 친구 집 일을 잠깐 돕는 게 불법은 아니지 않은가?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어쨌든 그리하여 이렇게 잡일꾼이 된 나였으나…….
'깜빡 잊고 있었단 말이지.'
오늘이 연휴라는 걸.
"이야,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평소보다 훨씬 손님이 많네, 연휴가 힘들긴 힘들어. 사장님한테는 좋은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원철 쿡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현재 스즈에 몰린 고객의 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오픈한 지 한 시간도 안 됐음에도 바깥에 웨이팅이 생길 만큼. 지금쯤 희연이가 웨이팅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주고 있겠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정말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장어라는 생선은 생각보다 냄새가 심한 생선이다. 비린내나 그런 종류의 악취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의미로.
익을 때 풍기는 진한 장어기름 냄새를 맡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데, 소스구이는 또 어떻겠는가.
간장과 설탕, 장어기름이 섞인 소스가 숯불에 타들어 가며 나는 냄새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밥도둑 그 자체. 더군다나 실내에 한 번 그 냄새가 배면 쉬이 빠지지도 않아 장어 전문점 등에 가면 이미 가게 입구에서부터 그 향을 맡을 수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은…….
"아야, 장어 손질한 거 더 가져온나!"
"예!"
내가 바로 그 장어를 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첫 오더부터 마지막에 들어온 오더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메뉴가 계속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10개의 주문이 들어오면 그중 6개에서 7개 정도가 히츠마부시. 이상한 일이다. 애당초 이 가게의 명물은 딱히 히츠마부시가 아니다. 보다 저렴한 런치초밥세트도 있고, 정식이나 덮밥류 같은 여타 단품 메뉴도 상당히 많다.
근데 그중에서 히츠마부시만이 집중적으로 소모되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하필 내가 오픈 직전에 만들었던 메뉴가 히츠마부시였기 때문이다.
소스를 만드는 것부터 굽는 것까지 앞주방에서 한 덕분에 향긋한 장어덮밥 냄새가 홀에 가득 차 버렸고, 가게 문을 연 뒤에도 냄새가 빠지지 않던 상황에서 온 손님이 그 냄새를 맡고 히츠마부시를 주문, 그리고 그 다음 손님이, 다음 손님이.
대충 그 순환이 이어지고, 결국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성 셰프와 이도겸 실장님 두 사람만으로는 그 주문량에 따라갈 수가 없어서 결국 그 역할은 내가 맡게 됐다. 아마 주문이 장어'만'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스즈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메뉴를 중고가로 파는 가게이기에 그러지도 못할 노릇.
결국 사서 고생한 꼴이 되어 버린 나를 보며 원철 쿡이 웃었다.
"고생하네. 그래도 좀만 참아봐. 장어도 슬슬 떨어져 가니까 끝나면 좀 한가해질 거야."
나는 그 위로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만을 끄덕이며 칼을 놀렸다. 장어가 떨어질 그 순간까지.
다만, 이 시점에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면, 그건 바로 이곳이 바다의 도시 부산이라는 것.
다른 도시라면 모를까, 부산의 식당에서 생선이 떨어지는 일은 보통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 커다란 물탱크 안에 장어를 가득 채운 생선운송트럭이 가게 뒷문에 멈춰 선 그 순간이었다.
***
"와, 내 한국 와서 가게에 손님 이리 많은 건 처음이다."
"응? 아. 너 일단 외국인이었지."
"일단이 뭐꼬, 일단이."
"아니, 너무 네이티브 스피커라 가끔 헷갈려서."
"지랄한다. 다중국적이긴 해도 성인 되믄 알아서 바꾼다. 걱정 마라."
저녁장사 전 들어간 브레이크 타임.
개업 후 점심장사가 최고 매출 기록을 세웠다며 지친 상태로 기뻐하는 성 셰프와 다른 직원들을 뒤로 한 나와 양희연은 가게를 떠나 양희연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저녁장사까지 더 도와드릴 생각이었지만, 저녁장사까지 미성년자를 쓸 순 없다는 성 셰프 말에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정말 괜찮냐?"
"뭐가?"
"아니, 너네 집 내가 가도 되는 거냐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일단 계획 자체가 견학, 대회, 휴식 후 복귀라는 2박 3일짜리 일정이니만큼 나도 지낼 곳이 필요했다.
원래는 내 돈을 쓰는 것도 아니니 펜트하우스나 호텔 같은 곳에 방을 잡을 생각이었으나, 연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방이 다 차서 도통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떠오른 유력한 후보가 바로 양희연의 집이었고, 따로 대책도 없었기에 결국 신세를 지게 됐다.
3인 가족이 사는 집에 함부로 들어가도 되는 건지, 아무리 선머슴끼가 있다지만 여자애 사는 집에 내가 들어가도 되는지 아직도 고민이긴 했지만…….
"누가 덮치기라도 하나? 등치만 커가 가슴은 새가슴이네."
"……말을 말자."
정작 고민의 주체인 놈이 이러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녀석은 됐으니 얘네 부모님한테만 폐 안 끼치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우리 집 꽤 크니까 걱정 마라. 남는 방도 있고."
"그건 다행이네."
경사가 제법 심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생각보다 그다지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양희연의 집에 도착한 나는 녀석이 앞서 한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크네."
"그치?"
마당까지 딸린 번듯한 2층 단독주택. 크다고 자신할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낡고 좁은 우리 빌라하고는 천지차이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간 양희연은 집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커다란 목소리로 집 안을 향해 외쳤다.
"다녀왔어요!"
"어, 왔나."
살짝 어둑한 현관 옆,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거실에서 누군가의 화답이 들려온다. 누군가……라고 해봤자 어차피 얘네 아버지겠지만.
당찬 걸음으로 앞서 걷는 양희연의 뒤를 잰걸음으로 쫓아 거실에 도착하니, 복도 쪽을 등진 자세로 TV를 보고 있던 양희연의 아버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희연보다 훨씬 짙게 탄 피부. 수염이 듬성듬성 났지만, 그것으로는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훌륭한 원판을 가진 아저씨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먼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자, 빤히 나를 바라보던 아저씨의 눈이 양희연과 그 옆에 선 내 사이를 몇 번 왕복하고는 앉은 자세 그대로 양희연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가가 가가?"
"어. 아가 가다."
"맞나. 엄마가 갈 거라고 전화하대. 가는 방에 안내해주고, 밥은?"
"아직."
"그럼 짐 정리하고 같이 내려와라. 밥 묵자."
"응."
……뭐지? 암호인가?
그대로 다시 TV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아저씨의 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던 내 심정은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이건 좀 쿨해도 너무 쿨한 거 아닐까. 무슨 말이라도 하실 줄 알았는데.
정작 양희연은 그 태도가 익숙한지 나를 어딘가로 안내할 뿐이었다.
"여기 쓰면 된다."
"오."
사람이 안 쓴 지 조금 됐는지 휑한 느낌이 들긴 해도, 먼지도 별로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하고 널따란 방이다. 전자기기는 보이지 않지만 에어컨도 있고, 책상과 침소로 쓸 요와 이불도 확실히 준비되어 있었다.
"화장실은 문 열고 바로 맞은편이고, 내는 2층 끝방 쓰니까 필요한 거 있음 전화로 불러라."
"알겠어."
"그리고…… 아니, 다른 얘기는 밥부터 먹고 와서 하자."
"다른 얘기?"
"대회. 대충 우리 가게 어떤지는 알았으니, 이제 대회 이야기도 좀 들어봐야지."
아, 하긴. 그게 짧게 끝날 이야기는 아니니 밥 먹은 다음에 하는 게 낫긴 하겠지. 나는 찬성이었다. 내 위장도 찬성하는 중이고.
***
희연의 아버지와 겸상하여 살짝 부담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우리.
자기 방에 다녀온 양희연은 내게 인쇄물을 한 장 주며 말했다.
"그거 대회 규칙이다. 대충 읽어봐라."
"알겠어."
대회 규칙이라고 해도 그리 대단한 건 없었다.
시간 관계상 대진표가 없는 서바이벌 대회. 심사위원은 초청 셰프 한 사람과 연예인 한 사람, 그리고 요식협회장까지 총 세 사람이다.
'이건 또 특이하네.'
전원 단체 심사나 1:1 토너먼트는 몇 차례 경험이 있지만, 서바이벌 제도는 처음이다. 하긴, 이 땡볕 속에서 몇 시간 동안 관광객 관심을 계속 붙잡아둘 수는 없겠지.
다만 규모는 시의 이름을 내건 만큼 제법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다.
지역구 예선을 뚫고 나온 각 업장을 짝지어 2라운드에 걸친 서바이벌로 걸러낸 다음, 마지막에는 실력자들끼리의 진검승부로 만드는 구도인가.
다양한 식당들이 많이 모인 만큼 주어지는 과제는 따로 없는 자유요리 대회라.
"거 참."
힘든 요소는 죄다 갖다 붙여놨구만.
누가 기획한 건지는 몰라도, 그놈 얼굴이 참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