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부산행.-1-
덜컹덜컹.
덜컹덜컹.
시트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기차소리.
소리란 몸이 공기의 떨림을 읽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몸에서 공기의 독자讀者 역할을 맡은 것은 고막 하나뿐일진대, 이상하게도 몸은 이런 곳에서 그 떨림 전체를 몸으로 받아내는 듯하다.
비단 공기만이 아니라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바닥의 덜컹거림, 등과 엉덩이를 통해 느껴지는 시트의 가냘픈 떨림. 창틀에 괸 팔꿈치로 느껴지는 창문 너머 공기의 와류渦流. 그 감각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그리움이 겸연쩍다.
분명 아직은 머리로만 갖고 있는 그리움일 텐데, 묘하게도 몸마저 그 그리움을 달가워했다.
몇 개의 길고 어둑한 터널을 지나, 또 몇 개의 푸른 하늘 아래 새하얀 구름이 그리는 선을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눈 앞에 펼쳐진다.
"오."
산과 논밭 너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도 시리도록 푸른빛을 간직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포근한 녹빛이 섞인 드넓은 바다.
그 너머로 빛의 띠를 두른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되고 만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인 부산역에 도착합니다.』
"어, 벌써 왔네."
차량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을 들은 난 흠칫 몸을 떨었다. 애수에 잠겨 경치 구경만 하고 있다 보니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쩐지 점점 눈에 보이는 건물이 많아진다 싶더라니.
안내방송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행렬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는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뭐든지 빨리 해치우자는 한국 사람의 성미를 가장 잘 실감할 수 있을 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덜컹거리던 소음이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 같은 거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멎어들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 우르르 좁은 문을 비집고 나가는 사람들.
무거운 짐을 이고 힘겹게 그 물줄기에 편승하여 밖으로 나서니, 마치 처음 어머니 바다로 섞이는 샘물을 환영하는 듯 소금기 섞인 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린다.
"오랜만이네."
부산역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국내 최대의 항구인 부산항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의 감촉이 얼마나 거친지는 아마 겪어본 사람만 알겠지. 거친 바닷바람이 부산 사나이를 키운다는 말이 영 허풍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나저나, 결국 와 버렸구만."
부산釜山.
대한민국에서 서울 다음가는 도시를 꼽으라 하면 결코 세 손가락 바깥으로 빠지지 않을 대도시.
꼭 산의 모양山이 가마솥釜을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을 가진 이 도시는, 정말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금정 산맥을 따라 높이 솟아오른 봉의 높이는 어언 700여 미터를 넘고, 그 높이에 지지 않을 만큼 수없이 솟은 산언덕은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한국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산 옆으로 다닥다닥 이웃 지은 거대한 도시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규모의 항구에 무색하지 않은 바다와 하나 된 경관을 보고 있노라면 이름난 바닷가 도시 그 어느 곳과 비교해도 겹치지 않는 부산만의 특색을 느낀다.
"……."
그런 모든 감각이 익숙한 건지, 어색한 건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기묘한 기분을 받으며, 나는 날 여기까지 오게 만든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를 향해 나른한 발걸음을 옮겼다.
'연락은 미리 해놨으니, 슬슬 도착해 있겠지.'
탑승구를 빠져나와 대합실을 거쳐 1번 출구 방면으로 나가면 길 건너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이름의 카페가 하나 있다. 그곳이 녀석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다.
9월 말이 되어 점차 가을이 깊어지는 날씨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여름은 아직도 반도 끝자락에 달라붙어 때늦은 더위를 선사했다. 덕분에 챙겨온 손수건만 마를 날 없이 고생할 뿐이다.
쏟아지는 햇볕을 피해 황급히 들어온 카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들어서자마자 어떤 인물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
"어."
날 이곳까지 불러낸 장본인. 양희연의 두 눈이 날 보고는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었다.
***
처음 양희연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그때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뭐?"
"가자고. 부산."
왜?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사람이 말할 때는 육하원칙이라는 걸 제대로 지키는 게 중요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설명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혼동 없이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 이 녀석의 말은 그 설명이 하나도 되질 않아 오히려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남자가 와 이리 유유부단한데. 그냥 알겠다 하믄 안 되나?"
"아니, 설명을 하라고 설명을. 보이스 피싱도 그것보다는 좀 더 공을 들이겠다."
"뭐꼬. 내가 사기꾼 같다 그거가, 지금?"
예. 굉장히 그렇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의 시선까지 의심스러운 기색을 띄기 시작하자, 그제야 설명할 마음을 먹은 듯 양희연이 입을 열었다.
"길게 나불댈 필요 있나. 니 대회 참가하고 싶다매, 마침 우리 동네에서 열리는 대회 하나 있다. 거 나가자."
"대회? 부산에?"
그거 참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녀석이 하는 말은 내가 조사한 것과 괴리되는 사항이 있었으니까.
하반기 열리는 대회를 찾을 때, 내가 서울 다음으로 조사해본 개최지가 다름 아닌 부산이다.
부산은 동북아의 해양수도라는 거창한 별명을 주저 없이 사용하는, 한국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항만 산업의 최전선을 달리는 도시.
주거 인구, 이동 인구, 관광객 등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찾는 곳인 만큼 당소에서 열리는 행사 또한 평균적인 규모가 굉장히 크다.
'요컨대 주목을 끌기 쉽다는 거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 인지도는 지금 그야말로 호랑이 입에 블루불을 꽂아둔 것처럼 커다란 날개가 돋은 상태. 모처럼 고생해서 부풀려놓은 이 거품이 죽어 버리기 전에 버블을 언빌리버블로 만들고 싶다는 게 내 바람이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그런 부푼 꿈을 안고 조사해본 부산 내 대회 상황은 이전에 말했다시피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내가 나갈 수 없거나, 나가봤자 의미가 없는 대회 밖에 없었으니까.
"뭔가 착각한 거 아니냐? 나는 부산에서 대회 열린다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그건 니 정보력이 부족한 기다. 마, 이거 한 번 봐봐라."
녀석은 그 한마디로 내 반론을 일축한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내게 내밀었다. 켜진 화면에 무언가 화려한 포스터 사진이 비추고 있다. 포스터의 내용은…….
"부산시 배 추석 특집 요리대회?"
뭐지, 이런 게 있었던가?
앞서 조사할 때 이런 건 못 봤었는데?
의아함이 담긴 눈빛과 함께 핸드폰을 돌려주자 양희연이 말을 이었다.
"처음 보나? 내 이랄 줄 알았다."
"뭐야 그거? 저번에 찾을 때는 그런 거 못 봤는데."
"엄마야가 그러는데, 이거 현지에 있는 식당만 모집한 거라 하더라."
오호라. 과연. 그럼 못 찾을 만도 하다. 현지 요식업자만 참여할 수 있는 로컬 대회. 관객 몰이를 위한 홍보라면 몰라도 참가할 수 있는 대회에 대한 정보만 모으고 있던 내가 이런 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리가 없지.
그런데 나한테 이걸 보여줘서 어쩌겠다는 걸까. 나는 모집요건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서 내가 거부 못 할 제안을 하나 할게."
"뭔 말이 거창하냐."
"다물고 들으라. 이것도 제법 큰 대회라 안카나. 그래서 나름 심사도 있고, 대회 예선도 쪼매 힘든 게 아이다. 그래가 내 방학 때 엄마야랑 같이 고생 좀 했다."
"호오."
"결과는 뭐, 예선은 통과 했고, 이번 연휴 때 본선만 치름 되는디, 이게 문제인기라."
"문제라니?"
내 물음에 잠시 입을 우물거리던 녀석이, 간신히 부끄러움을 무릅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사람이 읎다."
"…… 뭐?"
"니 부산이 연휴에 얼마나 바쁜 줄 아나? 관광객은 천지삐까리지, 맨날 아침부터 밤까지 꽉꽉 찬다. 근데 그거 비우고 한가하게 요리대회나 할 수 있겠나."
과연, 이해했다.
요컨대 이건 기획 단계부터 살짝 방향성이 잘못된 대회다.
부산시의 속셈은 대충 '추석 연휴 때 요리대회를 열어서 부산의 식당을 홍보하자!'라는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부산 같은 관광명소에 있는 식당에서 연휴 시즌은 놓칠 수 없는 성수기일 텐데, 대회 같은 데 출전하려고 인원을 빼는 것 자체가 장사에 부담이 되는 일이다.
업장 자체 규모가 커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만큼 요리를 잘하는 직원을 조금 빼내도 문제가 없는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개인 자영업자 수준에서 그런 규모를 바라는 건 무리가 있을 터.
"그래서 나한테 용병을 해달라고? 식당 이름 달고?"
"맞다. 마, 이거 방송도 타고 다 한다. 니도 잘 나가는 대회 나가고 싶다매. 예선은 다 끝내 놨고 본선만 하면 된다."
그렇긴 한데 말이지…….
솔직히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연휴까지 이제 며칠 남았다고 대회 연습을 하고, 일해본 적도 없는 남의 가게 대표로 나가 대회를 치르라니. 이제 고작 일주일 남은 시간, 메뉴도 다 못 외울 게 뻔하다.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내게, 드디어 당당함을 벗어던진 양희연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마, 함 해 주면 안 되나?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응?"
"…… 야, 너 속담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녀석은 괜한 소리 말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법 진지하게 감탄한 거였는데…….
뭐, 아무튼.
앞서 말했다시피, 이건 평범하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보통 받아들일 사람은 없겠지.
근데 말이다.
'내가 평범하지가 않거든.'
일해본 적도 없는 가게? 이미 5년은 거기서 일했다.
메뉴를 외우지도 못할 거라고? 개뿔, 미래에 나올 메뉴와 사라질 메뉴까지 죄다 외운 지 오래다.
처음에는 쿡쿡 팔뚝을 찌르던 손길이 이제는 숫제 지건을 날릴 정도가 됐을 때쯤,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하아, 그래. 오냐. 해주마. 대신 조건 좀 붙이자."
"…… 뭔데?"
최대한 웃음을 숨기면서.
"상금 나오지? 상금은 가게랑 나랑 n빵. 하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정말 땡 잡은 것 같다.
***
그것이 내가 짧은 추석을 가족과 함께 보내자마자 시급히 부산에 내려온 이유였다.
누구 말따마나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는 제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부산역을 떠나 여전히 산복도로에서 승객을 꽉 채우고 신나게 핸들을 꺾으시는 버스 기사님의 손에 목숨을 맡기고 찾아온 한 식당.
해운대구 외곽, 바닷가와는 살짝 거리가 있는 골목식당이지만, 그만큼 낮에는 고요함을, 저녁에는 시끌벅적함을 즐길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에, 성 셰프의 가게가 있다.
'오…….'
지금 내 나이가 17이니 부산에서 일하기 약 7년 전 정도인가.
이때 이 가게는 이렇게 생겼었구나 하고 감탄이 흘렀다. 세월의 차이를 느낀다고 할까. 회귀 후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일하던 때보다 조금 더 작아진 식당. 바깥 풍경도 어딘가 눈에 익으면서 어색한 것이 기묘하다.
아직 영업 준비 중이었는지, 격자 나무틀에 불투명한 유리가 달린 미닫이문 바깥에는 Close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이것도 나중에는 컨셉 지킨다고 일본어 나무 팻말로 바꿨던 걸로 아는데.
"다녀왔습니다."
달린 팻말이 무색하게 활짝 문을 열고 들어가는 양희연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식당의 내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셰프와 직접 대면하여 앉는 다찌석과 따로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석이 여럿. 전형적인 일식집의 모양새였다.
"어머, 왔나. 온다고 한 아는?"
"여 있다."
"맞나. 정신 좀 봐라. 인사도 안 했네."
그리고, 그런 카운터 뒤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한 여성.
깔끔하게 왁스를 발라 올백으로 넘겨 묶은 머리칼. 그 위로 쓴 짧은 조리모와 맵시 좋게 차려입은 하얀 조리복.
양희연과 판박이처럼 닮은 얼굴이지만 백옥색 피부 탓에 전혀 인상이 다른 여성 셰프. 내 기억보다 훨씬 더 젊은 모습을 한 성미설 셰프, 본인이었다.
안주방으로 이어진 뒷문을 통해 다시 홀로 나온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반갑다. 니가 찬혁이가. 내는 카츠라…… 아니, 미설이다. 성미설. 잘 부탁한데이."
"아, 예. 잘 부탁드립니다."
재빨리 손에 묻은 땀을 닦아내고 그 손을 맞잡아 악수를 나눴다. 회귀 전에 성 셰프와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을 때도 이랬었지.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 다음 이어질 말은…….
"음, 손은 합격. 나이에 비해 손이 다부지네."
"엄마야. 또 그거 하나."
"그라믄 안 할라고? 보자, 여까지 오느라 고생한 건 미안한데, 실력 한 번만 보자."
그래. 이거였다. 성 셰프의 주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했던 일종의 입장컷 테스트. 악수를 하며 손에 남은 흉터나 굳은살 등을 살펴 이 사람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대충 알아보는 작업이라고 했던가.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절로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한 나는, 웃으며 성 셰프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정식 한 상 만들기. 그거면 될까요?"
내 역공을 들은 두 모녀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함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닮은꼴이라, 더욱 웃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