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28화 (128/403)

128. 9월. 연휴를 앞둔 어느 날.-2-

작은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의 일과도 이전과 별로 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바로 기숙사 주방으로 달려가 좋은 자리를 챙긴 뒤 다음 날 있을 수업에 대비해 연습.

우리 일행이야 서로 다른 조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함께 연습하는 편이 재미도, 효율도 더 좋았기에 함께 연습하는 중이다. 덕분에 자리를 잡는 게 힘들긴 하지만. 4명이 쓸 자리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중학교 때는 pc방에서 빈자리를 찾아다녔는데 지금은 주방에서 이러고 있네."

"나는 pc방 가본 적이 없어서."

"뭐? 진짜? 그럼 어디 가서 놀았냐?"

"어…… 당구장?"

"……중학생이?"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몇 번 간 적도 없어. 돈 너무 나가서."

내기 당구에서 이기면 돈 낼 필요가 없어지니 정말 온힘을 다해서 쳤었지. 내가 두 달쯤 연속으로 이기니까 그때 같이 다니던 패거리 놈들도 당구장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딱히 좋은 일은 없던 시절이지만, 질 때마다 분통을 터트리던 그 녀석들의 얼굴을 지금 와서 다시 되새기면 제법 통쾌한 기분이 든다.

"퍼뜩 안 오고 뭐하노."

"아, 미안."

이런, 잡담이 좀 길었나.

앞서 준비를 마친 양희연이 닦달하는 소리에 하던 우리도 하던 말을 멈추고 마저 준비를 끝냈다.

"오늘 연습도 여느 때랑 똑같이 할 거지?"

"그게 제일 나으니까."

"알겠어."

먼저 운을 띄운 나현주의 말에 맞춰 다 같이 오늘 할 연습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가 하는 연습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공탐색 수업의 축소판이라고 할까.

만드는 이가 자기가 무엇을 만들지 다른 세 명에게 알려주면, 세 사람은 그 메뉴를 자기 방식대로 비꼬아서 만드는 이에게 오더를 넣는다. 그리고 그 오더에 따라 음식을 만들면 끝.

규칙은 간단하지만, 천양지차로 차이가 나는 세 사람의 요리를 보조도 없이 혼자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고 난해하다.

그런 걸 요 몇 주 동안 주말 중 하루를 제외하면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계속 하고 있으니, 이러고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오늘 메뉴는 어쩔래?"

"아까 만든 거 있잖아."

"내는 완탕면 만들어가 면 만들기 귀찮은데."

"귀찮다고 안 할 건 아니잖아. 그리고 건면 들어온 거 있더라. 그거 써."

"맞나? 그럼 됐다. 그케 하자."

평소에는 메뉴 선정부터 조금 고생을 하지만, 오늘은 평가를 볼 때 만들었던 메뉴 덕에 금세 결정됐다.

메뉴는 결정 됐으니, 이제 오더를 들을 차례.

다행히 어향가지는 비교적 만들기 쉬운 메뉴니 오늘은 조금 편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지에 통으로 칼집만 깊게 내서 잉어찜 느낌으로. 칼집은 방사형으로."

"그라믄…… 아, 내는 채 썰어가 먹기 쉽게."

"나는 그냥 평범하게. 대신 마무리할 때 육수 넣어서 양념에 푹 졸여줄래?"

…… 젠장.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뱉으며, 나는 녀석들의 주문에 맞춰 조리를 시작했다.

***

연습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대략 두 시간 정도일까. 다들 만드는 것 자체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 요리는 아니었지만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오더를 맞추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이것도 그나마 빨리 끝난 편이다. 저녁도 먹었으니 메뉴 자체를 소량만 만들었으니까.

만든 요리를 각자 시식하고, 다시 한 테이블로 몰아 코스요리를 즐기는 기분으로 다 같이 먹는다.

느낌만 보면 기숙사에서 야식을 시켜 먹는 모양새지만, 직접 만든 걸 이렇게 먹고 있자니 야식이라기보다는 새참을 먹는 느낌이다.

조리대 하나를 둘러싼 우리는 음식 평가에 더해 적당한 잡담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뭔가 맨날 저녁마다 이렇게 호화스럽게 먹는 것 치곤 살이 안 찌는 느낌이야."

"요리 만드는 데에도 나름 칼로리 소모가 심하긴 하니까."

"현주 니는 괘안나? 전에 보니께 운동할라믄 밥도 골라 묵어야 된다매?"

"괜찮아. 프로 보디빌더처럼 몸 만들려고 운동하는 건 아니니까."

"몸 만들 생각도 아니면서 매일 운동하는 것도 대단하긴 대단한데……."

"취미니까."

다시 말하지만, 거 참 살벌한 취미다.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나누던 도중, 철정이 녀석이 뜻밖의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근데 찬혁이 너 계속 우리하고만 연습해도 되는 거냐?"

"응?"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의아함을 담은 시선으로 김철정을 바라보자, 녀석은 먹던 완탕면 그릇을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너 1학기 때에는 맨날 대회반 애들이랑 연습해야 된다고 늦게 들어왔잖아. 근데 요즘은 아예 우리하고만 연습하는 것 같아서."

"아."

그런 뜻이었나. 대회반 공식 일정이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서 모여서 연습할 이유도 없었을 뿐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쪽 이야기를 전혀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하게 생각할만했다.

"지금 대회반이 개점휴업 상태거든. 대회 잡힌 것도 없고, 딱히 부르지도 않아서 그냥 다른 데 집중하고 있는 거지."

"대회가 안 잡혔다고? 왜?"

"그게……."

그건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덤으로 좀 부끄럽고.

김철정에 더해 다른 두 사람의 호기심 섞인 시선을 이기지 못한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아는 것 전부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이야기했다.

솔직히 좀 쪽팔렸다.

아무리 사실을 말할 뿐이라지만 꼭 나 잘났다고 내 입으로 떠벌리며 자랑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짧게 축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길게 이어진 설명을 묵묵히 경청한 일행은, 이윽고 그게 사실이냐는 듯 괴상한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그거지?"

"올해 열려야 될 대회가, 니 때문에 밀렸다고?"

"……어."

"우와."

나현주가 순진하리만치 놀란 얼굴로 탄성을 내뱉은 직후, 다른 두 녀석들에게서 엄청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

"실화냐?"

"이럴 줄 알았다……."

만약 톡방이었다면 한 페이지를 ㅋ으로 통째로 채울 기세로 웃던 녀석들은 들이쉰 숨이 부족할 지경이 돼서야 간신히 웃음을 멈췄다.

사실 나도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엔 웃음을 참지 못했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긴 하다. 내 경우에는 웃긴 게 아니라 허탈해서 웃은 거였지만.

웃음은 멈췄지만, 아직도 눈매가 휘어져 있는 김철정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갈 대회가 없어서 연습을 안 한다 이거지?"

"나갈 대회가 없는데 무슨 연습을 하겠어."

"그것도 그렇긴 하네."

목적이 없는데 수단이 생길 리가 있나.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이지만, 저 묘하게 과장된 액션이 쓸데없이 사람을 열 받게 만든다.

그때, 한 발 뒤로 빠져 있던 현주가 나섰다.

"그럼 2학기 때는 대회 안 나가는 거야?"

"으음…… 글쎄."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하는 문제다.

앞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2학기 동안 주어진 시간을 마냥 낭비하기도 아까운 일이니까.

"개인이 대회 출장하는 건 학교에서 지원해준다고 했는데,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대회에 출장하는 것도 커리어를 쌓기 위한 일이니만큼, 되도록 이름 있는 대회에 출전하고픈 욕망이 있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니까 문제지.'

나라고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다.

효민 선배와 대담을 나눈 뒤, 나름 올해 하반기에 개최하는 대회가 있는지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봤다.

'그런데 결과가 꽝이야.'

대회가 아예 전부 취소된 건 아니었지만, 선배가 말한 대로 굳이 출전해서 크게 득 볼 게 없는 대회이거나, 아니면 이미 개최 시기가 빠듯하여 참가가 어려운 대회, 혹은 참가 요건이 맞지 않는 대회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해외 대회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힘들었다. 돈은 학교에서 대주니 문제 될 게 없지만 미성년자가 출국하려니 보호자니 뭐니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포기했다. 학교를 돌봐야 할 선생님이나 일하시느라 바쁜 어머니의 시간을 뺏을 수는 없었으니까.

방도가 보이지 않는 상황.

내 말을 들은 나현주도 나를 따라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네……."

"아니, 올해는 할 만큼 했으니까 크게 아쉬울 건 없어."

사실 커리어라면 이미 어지간한 요리사가 평생을 바쳐도 못 이룰 성과를 이룩했으니 그쪽으로는 이제 아쉬울 게 없긴 하다.

대회를 나가고 싶은 것도 반쯤은 그 대회장의 팽팽한 긴장감을 잊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크다.

"너무 잘해서 문제라니, 이것도 웃기는 상황이네."

"누가 아니래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철정이의 말에 맥없이 고개를 주억이던 그때, 여태껏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던 양희연이 나섰다.

"마, 류찬혁이."

"응?"

무슨 뒷골목에서 지나가는 행인 붙잡는 말투라 살짝 흠칫했다. 익숙해서.

부름에 답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짐짓 고민스런 표정을 지은 양희연이 내게서 눈을 돌린 채 조리모에서 흘러내린 옆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꼬았다 풀었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건지 무슨 고데기라도 돌린 것마냥 자연스럽게 파마가 되어가는 녀석의 옆머리.

사람을 부르고 아무 말도 없는 양희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찰나, 녀석은 드디어 생각을 정리한 듯 다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니, 대회는 나가고 싶은데 나갈 대회가 없다 이 말이지?"

"어."

지금까지 한 대화가 전부 그 이야기였는데, 지겹지도 않은지 그걸 재차 확인하는 녀석.

"음…… 니 쪼매만 기다려 봐라. 내 전화 좀 하고 오께."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잰걸음으로 주방을 나간 양희연은, 무슨 통화가 그리 길어지는지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미안타. 오래 기다렸나?"

"좀 기다리긴 했는데…… 통화는 다 끝냈냐?"

"어."

자기도 이제야 온 게 마음에 걸렸는지 미안한 기색을 보인다.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투덜대는 것이 통화 상대 쪽에서 말이 길어진 듯했다.

"하여간 말이 많아서, 누굴 데려간다꼬."

한동안 투덜대는 걸 멈추지 않던 녀석이 이제야 날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마, 대회 나가고 싶음 따라온나."

갑작스런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따라가? 어딜?

"……뭔 소리야. 어딜 가려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속내가 궁금하여 미심쩍은 목소리로 묻는 내게 양희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히죽 웃었다.

"부산."

"……뭐?"

그 말에, 나뿐만이 아니라 양옆에 있던 나현주와 김철정의 고개마저 녀석을 향해 홱 돌아간다.

우리 세 사람의 놀란 표정을, 어딘가 음흉한 웃음으로 당당히 받아내는 양희연.

그 당당한 태도에 내 머릿속이 굳는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이 없는 거 아닌가? 하는 말을 내뱉으려던 입술을 간신히 짓씹어 말을 막았다.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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