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27화 (127/403)

127. 9월. 연휴를 앞둔 어느 날.-1-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느 한 사건을 기점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 같은 순간.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그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세간에서는 이것을 터닝 포인트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자신의 길이 회전하는 기점이라는 뜻이겠지.

'그게 몇 도나 돌아갈지는 사건의 크기와 본인의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

물론 나에게도 있었다. 말해 무엇하랴. 당연히 사장님과 만났던 그날 밤이 그러했고, 또 사장님을 떠나보낸 그 여름이 그러했다. 뭐, 후자는 이미 사라진 일이지만.

아무튼, 터닝 포인트는 그 사람의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데. 아무래도 내 친구 김철정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이때인 듯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다들 힘내자!"

"아직 과목이 세 개나 더 남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오늘 하면 주말은 쉰다. ……바로 다음 주부터 다른 수업이겠지만."

개학 후 첫 번째 주말을 맞이하던 그 날. 철정이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뒤로 녀석은 무슨 대오각성이라도 한 사람마냥 점점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마치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씩씩함과 어른스러움을 두루 갖춘 늠름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야, 류찬혁! 수 셰프가 헤드 말에 대꾸도 안 하냐?"

……물론 그렇다고 장난기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예, 예. 캡틴. 분부대로 합죠."

녀석의 얼척없는 말에 대충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장난스럽게, 혹은 대충대충 이 수업에 임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이렇게 잠시 쉴 틈을 찾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새삼스럽게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배우고 있다.

고작 2주라는 시간이 사람을 얼마나 성장하게 만드는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목적의식을 가지면 얼마나 노력하게 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써도 되겠네."

그 목적의식이 굉장히 불순하지만,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도 재료만 자기 부담하면 밤 전까지는 얼마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실습실과 기숙사의 주방이 연습하러 온 학생으로 가득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이 수업의 효용성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실습실을 가득 채운 우리 1학년을 보던 선배들이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지.' 같은 애수 어린 눈으로 볼 때면 그마저도 무색해지긴 하지만.

안 그래도 자라는 아이들에게 너무 경쟁의식만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질타를 받는 게 요즘 교육계인데, 이건 경쟁 수준이 아니라 숫제 전쟁이다. 그것도 대를 이어서 하는.

연습을 실전처럼 하라는 말도 있다지만 실전도 실전 나름이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사태를 가정한 연습을 하는 건……. 참, 심신이 쇠약해지는 일이다.

모든 손님이 실력 있는 요리사인데 그 전원이 진상 고객이라. 흠. 그날로 주방에 불 지르고 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옛말에 틀린 말 없다던가. 실제로 그런 연습을 거친 우리는 이 수업 이전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단하네요."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박예휘 선생님이 먼저 나서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만큼, 우리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선생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하다.

취급 메뉴 4개에 세부 사항은 거의 제한을 풀어 버린 정신 나간 조리 난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에 이를 때쯤이 돼서는 양쪽 모든 조에서 실수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정도니까.

'그리고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시점에 이렇게나 많은 메뉴를 완벽히 소화해낸 기수는 처음입니다."

역시나.

박예휘 선생님의 경탄 섞인 말에 내 입꼬리가 살그머니 위로 솟아올랐다.

물론 아직 우리가 최고치를 경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승세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두말할 것도 없는 신기록.

'그리고 이 기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아마 우리 반의 마지막 전공탐색 과목으로 예정된 일식 수업 때에는 정말로 최고기록 경신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작년 기수가 기록했던 9가지 메뉴. 마의 두 자릿수. 과연 그 벽을 우리가 깰 수 있을지 어떨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마지막 과목이 가진 특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여기서 기록을 경신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

하지만, 애당초 내가 요리사가 된 이유는 나의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다. 그럼 이번에도 자기만족을 위해 고생 좀 더 한다고 나쁠 건 없잖아?

입에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뜻없는 실소가 주방의 소란에 묻혀 사라졌다.

***

양식 전공탐색 수업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매일매일이 그야말로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야 그럴 수밖에. 할 일이 워낙 많았으니까. 당장 양식 직후 이어진 한식 전공탐색 수업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래도 한 번 서로를 제대로 겪고 다들 요령이 생겼는지 반 아이들도 점점 원숙해진 모습을 보여주어 수업도 제법 순탄하게 진행됐다. 물론 사건사고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학생은 사고 치는 게 일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다지 특필할 만한 사건은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몇몇을 제외하면 아이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몇 가지 있긴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조원 재분배. 조장이야 매번 다시 뽑을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던 아이들도 조 원을 서로 뒤죽박죽 섞어 재배치하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솔직히 당연한 거긴 하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A조와 B조의 인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유지하면 반 내부에서 균열이 생긴다. 일정 수준의 경쟁의식은 향상심을 위한 원동력이 되지만, 그 골이 깊어지면 서로를 배척하는 원인이 될 뿐이니까.

또한 주방 환경 적응을 돕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여타 업무가 그렇듯이, 요리사도 인원교체가 없는 직종이 아니다.

한번 주방에 사람을 들이면 그대로 오랫동안 같은 팀으로 일하는 주방이 있는 반면, 분기마다 사람을 돌려가며 다양한 업무를 익히게끔 인사를 다루는 주방도 있다.

오너가 어떤 지향점을 갖고 사람을 다루느냐에 따라 케이스가 갈리긴 하겠지만, 나는 두 종류의 주방을 둘 다 겪어본 적이 있다.

전자가 양희연의 어머니인 성 셰프나 예전에 신세를 졌던 루이스 셰프의 업장이고, 후자는 마지막으로 일했던 호텔 주방이 그랬다. 후자는 3년 내내 분기가 올 때마다 제발 연회주방만은 싫다고 빌었더랬지. 결국 정착한 곳이 연회주방인 걸 보면 운명이란 게 참 기구하다 싶지만.

뭐 아무튼,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내일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극한상황을 견뎌낸 우리들은 드디어 전공탐색 수업의 세 번째 과목인 중식을 앞두고 있었다.

"와, 다들 눈빛 살벌한 거 봐."

"그만큼 조장은 사양이라는 거겠지."

전공탐색 수업을 제대로 시작하기 전 연례행사를 치르듯 행해지는 단품요리 평가.

이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자의와 상관없이 조장을 해야 한다는 걸 앞선 두 개의 과목을 건너오며 충분히 깨달은 학생들이니만큼, 최하점이라는 오점을 피하기 위해. 조장이라는 책임이 과도한 자리를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조리에 임할 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넌 꽤 여유만만해 보인다?"

"나? 알면서 그래."

"……하긴, 딴 과목이면 몰라도 네 중식은 걱정할 필요 없겠지."

남들이 보면 자신감이 과하다고 질책할만할 모습이었으나, 이 녀석은 적어도 중식 하나만큼은 당장 상급생들과 맞붙여놔도 꿇리지 않을 놈이다.

"아깝네……."

"응? 뭐가?"

"있어. 그런 게."

만약 중식이 전공탐색 마지막 과목이었다면 또 한 번 지옥을 맛봤을 수도 있었을 텐데. 친구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직관할 기회를 놓치는 건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너 왜 사람을 그렇게 보냐."

"뭐가."

"아니, 낚싯줄 끊고 도망가는 생선 보는 표정이야 너 지금."

……티 났나?

***

이변은 없었다.

나는 어향가지, 철정이 녀석은 마라탕 국물에 딤섬을 샤브샤브처럼 살짝 데쳐 먹는 요리를 내놓아 조장 자리를 회피했다.

다만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 둘이 다른 조로 갈라졌다는 것일까. 덤으로 양식에서는 같은 조. 한식에서는 다른 조였던 나현주는 이번에도 연달아 다른 조가 됐다.

"알겠지? 아까 말한 대로 서로 원망하기 없기다?"

그런데 철정이 녀석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조가 갈라진 뒤부터 계속 저 약속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자신감의 근거는 대체 무얼까.

"나야 괜찮지. 근데 너는 괜찮겠냐? 나 하는 거 봤잖아?"

"윽……!"

최근 들어 우리 반에서 나의 악명은 시시각각 높아져만 가고 있다. 물론 수업 때 하는 인성질 때문이다. 양식은 회귀 전 경험으로, 한식은 안가람, 엑스포에서 공부한 지식으로.

그 모두를 활용해서 양식, 한식. 두 과목 전부 상대 팀에게 악몽을 선사해주었으니까. 한식 때는 나도 제법 당하긴 했지만, 사람은 때린 것보다 맞은 게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 몇 번이나 보복성 오더를 넣고도 아이들은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나는 되로 받고 말로 주고 있으니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지만.

"이번에는 살살 부탁해."

"그쪽이 먼저 봐주면 생각해볼게. 이번엔 내가 후공이니까."

"아하하……. 글쎄, 좀 어려울 것 같은데."

평소의 그 침착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웬일로 약한 소리를 뱉는 나현주. 내 대꾸를 듣고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걸까.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긴, 내 업보가 깊기는 하지.

'그나저나 철정이에 현주, 거기다 이번에는 대회반 동료인 창민이와 예은이 녀석까지 죄다 저쪽 팀이니…….'

와오. 거의 드림팀인데.

아무리 추첨이라지만 이 말도 안 되는 팀 운에 무심코 군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진짜 나한테는 희연이 너밖에 없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양식, 한식, 그리고 지금 중식에 이르기까지 다른 녀석들은 우리 조, 상대 조를 오갔지만, 양희연 만큼은 항상 나와 같은 조였다.

그것을 이제야 새삼 깨닫고 무심코 한 말.

그런데, 뭔가 주변에서 내게 박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

"……."

"뭐야? 왜?"

이상하다. 철정이와 현주 두 녀석이 굉장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깜짝 놀라 째려보는 느낌의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여러 감정이 미묘하게 섞인 눈빛.

영문을 모르겠어서 그 얼굴을 멍한 눈길로 마주보던 그때. 갑자기 뒤에서 따라오던 양희연이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성량으로 내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무, 뭐라카노?! 니 정신 나갔나?!"

깜짝 놀라 뒤를 돌자 보인 것은, 보기 좋게 탄 옅은 구릿빛 피부 위로 훤히 보일 만큼 홍조가 든 양희연의 얼굴. 녀석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온 것 마냥 사방으로 흔들린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혹시 지금 무언가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일단 사과라도 해야 하나?

"어, 그……. 미안?"

"사과하지 마라 또라이야!"

아니 왜. 뭐. 왜 그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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