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지옥주-양.-6-
B조 녀석들은 온갖 방향에서 우리를 공격했다. 어떻게든 인성질을 부리고자 하는 놈들의 적의가 정말 온갖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닥쳐들었다.
"까르보나라. 면은 페투치니. 익히는 정도는 알 덴테로. 관찰레 볶을 때 마늘도 같이 넣어서 살짝 마늘 향이 돌게 해줘. 그냥 통후추 대신 백후추로 간해주고 치즈는 살짝 녹여서."
"…… 진짜 내일이 안 무섭구나?"
"내일이 아니라 다음 주야."
"진짜 두고 보자."
안창민도.
"알리오 에 올리오. 왜, 영화에 나왔던 스타일 알지? 이태리 파슬리 듬뿍 넣은 거? 그거에 마르게리타 피자. 칼쵸네처럼 접어서."
"그걸 다 먹게? 우리 점심 먹은 지 한 시간도 안 됐다."
"왜? 못 먹을 것 같아? 피자 한 판 더 시켜줄까?"
"아니다. 금방 만들어줄게. 아니 근데 피자를 칼쵸네로 바꿔도 되는 거야?"
"되니까 선생님도 아무 말씀 없으신 거 아냐?"
"그런가……."
백예은도.
"펜네로 까르보나라. 소스 만들 때 고르곤졸라 치즈 소량 섞어서."
"마르게리타랑 고르곤졸라 하프 앤 하프로 해줘. 꿀은 개별접시에 담아주고."
"나는 까르보나라 팀발로!"
"그건 안 됩니다. 다른 걸로 하세요."
"아, 네!…… 칫."
그 두 녀석을 주축으로 한 다른 녀석들도.
그야말로 고삐가 풀려 버린 녀석들은 마치 선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온갖 괴상한 오더를 쏟아냈다.
물론 중간중간 정말로 선을 넘어 버린 녀석들의 주문은 선생님 선에서 잘려나갔으니 그건 그나마 다행일까.
그래 팀발로. 너 말하는 거다. 어떻게 까르보나라 소스로 팀발로를 만들라는 발상을 하는 거냐. 혀 차는 것도 들었다. 너는 다음 주 공격목표 3순위다.
…… 아무튼.
나조차 놀랄 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인성질을 시도하는 녀석들의 모습에 나는 그야말로 질려 버리고 말았다.
아까까지는 난이도가 올라간 건 선생님의 상황 설정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B조 녀석들의 인성질도 그 수준이 몰라보게 올라가 있었으니까.
'이게 업보인가…….'
사람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생길 수도 있다고 하는데, 아마 어제의 난 세 치 혀를 빛 만드는 데 썼나 보다. 안 그러면 오늘의 내가 이렇게 그 빛을 변제하고 있을 리가 있나.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던 듯 싶다.
그런데 말이다.
웃긴 게 하나 있다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나는 과거의 내가 한 짓을 반성하기보다, 다음 주에 저 녀석들에게 어떤 오더를 내려야 가장 완벽한 인성질이 될지를 먼저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반성이라는 걸 너무 모르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우리 A조의 모습을 본다면 이런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철정아! 11번 파스타 나간다! 알리오 에 올리오 마늘 두 배로 넣은 거!"
"알겠어! 피자 팀! 주문 9번 얼마나 걸려?"
"지금 나가!"
확실히 B조의 매서운 오더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 덩어리처럼 우리를 난타했으나, 그럼에도 우리의 방어는 쉽게 뚫리지 않았다.
사람이 달라진 것 마냥 확 바뀐 철정이의 지시는 칼처럼 정확하진 않지만 믿음직한 나침반이 되어 우리가 갈 방향을 가리켰고, 그런 조장에 감화된 조원들은 놀라운 집중력과 끈기로 그 지시를 수행했다.
물론 실수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실수를 그대로 놔두어 키우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초반부가 지나고 중반부에 들어설 때쯤이 됐을 때엔 A조 전원이 자기 할 일에 숙달되어가고 있었고.
중반부가 지나 메뉴가 하나둘 완성되어 나오기 시작했을 때에는 작은 실수 하나도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무렵. 모든 메뉴가 알맞게 조리되어 자기 앞에 나온 모습을 보며, B조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패배를 곱씹을 뿐이었다.
뭐, 그 찡그린 표정도 맛있는 걸 먹으니 금방 펴졌지만.
***
성공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대성공.
단 하룻밤 새 놀랍도록 성장한 김철정이 보여준 모습에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법.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방법은 장담하건대 책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기숙사로 함께 돌아온 뒤, 나는 잔뜩 지쳐 침대 위로 늘어져 있던 철정이 녀석에게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어떻게 한 거야?"
"응? 뭐가?"
"오늘 말이야. 그저께랑 너무 다르잖아."
"음…… 내 천재성?"
개학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철정이 녀석의 말에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 되게 열 받는 거 알지?"
"아니까 하지."
얘한테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기가 살아난 건지 모르겠다.
'수업을 잘 해내서 기가 산 건지, 기가 살아서 수업을 잘한 건지…….'
아마 후자일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기가 살았다고 사람 다루는 게 익숙해질 것 같진 않은데…….
좋은 일이 생겨서 저러는 거라면 다행이나, 사람에게 있는 호기심이란 놈이 수수께끼의 냄새를 맡고 코를 벌렁대고 있었다.
그런 내 낌새를 눈치챘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김철정이 아까보다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있잖아. 전공을 고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
"뭐라고 해야 할까. 그걸 고르면 내 미래가 변할 수도 있는 거니까. 전공을 고른다는 건 어떻게 보면 미래를 고르는 거랑 같은 거 아닐까?"
평소 단순한 모습만 보여주던 김철정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분명 전문적으로 배운 게 뭐냐에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정해지니까."
아직 학생인 아이들에게 있어 학창시절이란 굉장히 길게 느껴지는 세월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대략 10년 안팎에 불과한 시간이다.
기초적인 걸 배우는 초,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에 들어온 학생은 이윽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때가 찾아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와도 앞으로 50, 60여 년을 넘게 살아갈 인생.
그 기나긴 시간의 주춧돌을 무엇으로 세울지 고민할 시간이 고작 3년. 얄궂은 일이다. 미래를 위해 공부하란 말을 듣고 자랐는데, 정작 미래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너무 적다는 건.
"그런 면에서 나는 나름 운이 좋았지. 집은 유명한 중식당. 할아버지랑 아빠는 한국에서도 알아주는 중식 셰프. 자라면서 저절로 기술도 배우게 됐고, 미래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적어졌으니까. 가게만 잘 이어도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거고."
그리 말하는 김철정의 옆모습에서, 묘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근데 사실, 나 있잖아. 중식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할아버지랑 아빠가 잘나서 나도 따라 하고는 있지만…… 뭔가, 뭔가…… 내 인생을 사는 기분이 아니야. 편하게 자란 놈이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녀석은 누운 채 제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손의 모양새는 엉망이다. 칼자국, 흉터, 화상, 기름 튄 자국. 여태껏 요리를 배운 흔적이 고스란히 그 팔에 담겨 있었다.
"근데 어쩔 수가 없었어. 외동아들이라 가게도 이어야 했고, 뭣보다 내가 갑자기 가게 같은 거 때려치우겠다고 하면 가족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
그나마 요리하는 건 좋아해서 다행이었다며 철정이가 웃었다. 서글픈 웃음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시킨 대로 일하고. 아마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내가 아빠가 되어 있겠지…… 싶었어. 아빠가 할아버지가 된 것처럼."
철정이의 고민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종의 대척점에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장님과 만나 요리라는 걸 알게 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진짜 요리사가 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철정이는 요리사 집안에서 태어나 요리사로 자랐지만, 요리사라는 꿈을 갖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말로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
"……."
침묵이 흐른다.
말이 되지 못한 응어리가 그저 날숨과 함께 입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그런 응어리가 꼭 제대로 된 말이 되어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아빠가 갑자기 기숙사 오는 날에 그러더라고. 내가 싫으면 가게는 잇지 않아도 된다고."
"…… 너네 아버지가?"
"응. 가게는 걱정 말고,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보신 거긴 했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안 들렸어. 이상해, 어른은. 아빠한테 가게라는 건 할아버지랑 아빠가 쌓은 인생 전부잖아. 내가 그걸 안 잇는다는 건 인생이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
"뭔가 인생을 부정당한 느낌이었어. 넌 필요 없다고. 아마 그런 건 절대 아니겠지만. 그래서 좀 상태가 안 좋았던 거야. 집중을 못 하겠더라고."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 철정이에게 나는 별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저 녀석 아버지를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으니 그 속내를 맘대로 헛짚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내 입이 멋대로 열리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아마, 너네 아버지는 너한테서 자신을 본 게 아닐까?"
"응?"
이때. 대화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철정이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땅바닥에서 돈이라도 주운 것 같은 표정.
그 모습이 묘하게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정리되지 못한 말을 이었다.
"네가 너네 아버지한테 할아버지를 본 것처럼, 너네 아버지도 너한테서 자기를 본 걸지도 모르지."
"…… 무슨 뜻이야?"
"너처럼 사실 중식을 그다지 안 좋아했을 수도 있다고."
철정이 녀석의 얼굴이 시시각각 뒤바뀐다.
영문을 모를 표정을 했다가, 놀란 표정을 했다가, 의심스런 표정을 짓다가, 종국에는 뒤통수에 돌이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말도 안 돼. 우리 아빠가?"
"추측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우리 아빠는…… 그럴 리가 없는데……."
"자식이 부모 마음을 어떻게 아냐."
내가 나이를 먹으며 배운 게 있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진정으로 부모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자식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도 부모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그 증거로, 철정이 녀석은 그건 말도 안 된다며 박장대소를 하고 있지 않은가.
"와, 신박한 의견이었어."
"……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마는……."
"아무튼 말이지."
무시하지 마라.
내 마음속 딴죽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내 투덜거림을 무시한 채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조장 일 하려고 공부하다 보니까 계속 아빠한테 일하면서 배운 게 생각나는 거야. 업무를 분배하는 법이나 잘난 직원을 최대한 유용하게 써먹는 법 같은 거. 고맙게 생각해. 네가 그 유용한 직원이었어."
퍽이나 고맙다.
"중식이랑 양식이 많이 다르긴 해도, 사람 다루는 법까지 완전히 다르진 않았단 말이지. 그 사람 특기가 뭔지 알고, 의사소통 확실히 하고, 뭐 그런 것들."
"그야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렇게 계속 공부하다 보니까 알겠더라. 내가 그 가게를 잇는 걸 아빠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내 미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부를 시켜주신 건지."
"……."
"사실 인생이니 뭐니 그런 건 아직 하나도 모르겠고, 아빠가 내가 가게를 이어주길 바란다는 것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분 좋았어. 아빠가 내 앞날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이 날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된 기분이라서."
김철정은 한층 더 밝아진 웃음을 지으며 제 머리 뒤로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러니까 조금 더 고민해보려고. 전공이나 미래나, 그런 거."
"…… 그러냐."
녀석을 따라서 나도 웃었다. 고민과 고뇌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3년은 짧지만, 또한 긴 시간이다. 충분히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게다가 나 중식을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진 않거든. 혹시 아냐. 내가 가게 이을 때는 전통 중식당이 아니라 퓨전 중식당이 될지."
제 딴에는 농담이라는 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끝맺는 김철정이었으나, 글쎄. 그건 그것대로 녀석의 아버지가 피눈물을 흘릴 사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