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24화 (124/403)

124. 지옥주-양-.-4-

오늘 수업은 딱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처음 보는 시스템에 애들이 당황하고, 어떻게든 방안을 찾아 죽어라 고생하고, 쌓이는 주문을 외우기도 버거운 판국에 팩트를 기반에 둔 선생님의 쿠사리를 사정없이 먹다 보면 사람 멘탈이 바삭바삭 조각나는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초반부까지는 할만했는데…….'

처음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비교적 간단하게 주문을 시키던 B조 아이들이었으나, B조로 들어간 안효민과 백예은 두 녀석이 나서서 한 정신 나간 오더가 그들이 폭주하는 기점이었다.

'눈치챈 거겠지. 이 수업을 어떻게 하는 건지.'

이 수업의 의의는 점점 가팔라지는 오더의 난이도조절에 있다.

과도한 수준의 말도 안 되는 오더는 선생님이 나서서 잘라내니, 그 선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오더로 상대팀을 괴롭히려면 그만큼 고객 측에서도 주방 측의 요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같은 학우에게 인성질을 하기 위해서라는 그릇된 동기기는 하지만, 아무튼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주방 또한 마찬가지.

열댓 가지에 이르는 서로 다른 주문을 처리하고 있으면 싫어도 순발력이 생긴다. 진흙탕 싸움판에서 막고라를 펼치는 것 같은 이 수업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확실히 학생의 인지능력과 판단력을 상승시키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입증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 이 수업이 끝날 때가 되면 다들 몰라볼 만큼 성장해 있겠지.

주아가 보는 격투게임 방송인이 흔히 말하는 맞으면서 배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수업이다. 힘들고 실수 만발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하아……."

"그렇게 기죽을 필요 없대도."

지금 당장이라도 제 묫자리를 만들고 싶어 안달 난 듯 구는 철정이 녀석처럼 침울해할 필요는 없다 이거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나름 위로랍시고 해주는 내 말을 전혀 들어먹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들을 여유가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하긴, 그냥 학생도 그토록 힘든데 엉겁결에 조장 역할을 맡아 버린 이 녀석의 부담감이 오죽하겠냐마는.'

개인적인 감정을 모두 내려놓고 객관적인 시점에서 보자면, 솔직히 오늘 수업 때 보여준 우리 주방의 모습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굽는 일은 나와 나현주가 거의 세 명 몫을 해내어 들어온 오더에 정확하게 부합해냈지만, 정작 우리에게 오더를 전달하는 과정과, 스테이크, 소스, 가니쉬 주방에서 각각 들어온 완성품을 하나의 접시로 합치는 과정에서 잦은 실수가 있었다.

결과는 말하나 마나 박예휘 선생님의 혹독한 질책 엔딩이었다. 첫날치고는 제법 잘 했다…… 라고, 말은 해주고 싶지만 결국 이 업계는 결과로 말해야 하는 곳. 열심히 요리했다는 이유로 맛없는 음식을 돈 주고 사 먹는 고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행의 변화가 극심한 이 업계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

하지만 선생님도 당장 우리가 결과를 만들어내길 바라는 건 아니다. 우선은 먼저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그걸 채워나가면 된다.

조장을 이렇게 선정한 이유도 같다. 남들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서면 더욱 많은 것이 보이는 법. 본 것에서 무엇을 배울지는 그 사람 개인에게 달린 일이겠으나, 선생님은 적어도 두 사람의 조장이 시련 속에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으리라.

지금은 그저 방해 없이 바라봐주는 게, 이 녀석의 미래에도 더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

침대에 누워 이불킥을 반복하던 녀석이, 어느새 잠잠해지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노트와 펜. 한껏 우울함을 표출하던 얼굴 위로 탐구심과 끈기, 호승심이 뒤섞인 진지한 눈빛이 드러난다.

역시. 저 녀석도 하면 되는 녀석이다.

부디 잘 해내기를 빈다.

조장 역할도, 아직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 녀석이 숨기고 있는 개인적인 사정도.

그날 밤. 녀석은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뒤 처음으로 나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

전공탐색 수업의, 아니. 비단 수업만이 아니라 학교, 회사, 사회에 이르기까지. 한 명의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가혹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지구는 돈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일을 진행하는 중이더라도, 주변이 움직이면 뭐가 어찌되든 결국 나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전공탐색이 학업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 말고도 힘든 일은 잔뜩 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 그렇고.'

지금 나는 학교 6층에 있는 대회반 전용 휴게실에서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더위와 습기를 피해 선선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있다.

물론 혼자가 아니다. 옆에는 1학기 때부터 함께 해온 1학년 일행이 함께 있다.

조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지금 우리 일행은 방금 막 2학기 대회반 입부 시험을 치르고 오는 길이다.

결과는 보시다시피. 아무도 변하지 않았다.

한 학기 동안 다른 아이들도 충분히 실력을 길렀지만, 아무리 그래도 1학기 때 온갖 개고생을 하며 함께 절차탁마한 우리만큼은 아니었다. 경험의 순도가 다르다.

다른 일행도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미 시험에 대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서로 막 시작한 전공탐색 수업 이야기에 열중이었다.

"너희는 시작부터 박예휘 선생님이야? 와, 힘들겠다."

"조금? 아직 이틀째라 그렇게 힘들게 시키진 않으셨어. 누구 한 명만 빼면 참 쉬웠을 텐데."

백예은과 송지영의 대화를 쉬는 시간을 만끽하는 척 몰래 훔쳐 듣다가 나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주어는 붙어 있지 않았지만 나를 가리키는 말임이 분명했으니까.

"세상에 어떤 또라이가 식당에서 라자냐 만드는 데 속재료를 하나하나 참견해? 그리고 뭐? 마무리로 오븐에서 막 나온 라자냐 위에 뜨겁게 달군 올리브유 한 스푼? 그것도 강한 향을 느끼고 싶으니까 엑스트라 버진이랑 비율을 맞춰서 넣어달라고?"

"와, 그건 선 넘었지."

이번에는 안창민과 여준기의 대화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냐. 외곽에서부터 야금야금 나를 갉아먹으려 드는 두 녀석에게 울분이 담긴 목소리로 반격했다.

"야. 먼저 친 건 너네 아니냐? 세상에 어떤 놈이 팬프라잉 업장에서 오븐으로 리버스 시어링한 스테이크를 찾아? 그리고 또 뭐, 가지랑 양파, 단호박 가니쉬에 그릴 자국이 나오게 구워줘? 게다가 너네는 둘이서 그랬으면서, 고작 그것 같고 나한테 그러냐."

"말 잘 했네. 우리 오더야 모양새 트집 정도만 잡았지 우린 너 때문에 라자냐 미트소스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어! 왜 소고기랑 돼지고기를 굳이 나누라는 건데?"

"이슬람이랑 힌두교 몰라? 어느 한쪽 고기 못 먹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근데 혁이 네가 못 먹는 건 아니잖아."

"내가 신경을 많이 써준 거야. 충분히 예습되라고. 어때, 고맙지 않냐?"

"…… 죽일까, 안?"

"처리해, 백."

그 뒤로도 대화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대충 이런 말이 오갔다. 하지만 결국 대화가 오가면 오갈수록 피해를 입는 건 저쪽이었다. 어차피 난 오늘 쉬었고 쟤들은 실습 했거든.

하하. 아무리 너희가 인성질을 시도해도 나한테는 안 된다. 성숙한 쿡이 할 수 있는 합리와 불합리의 선을 오가는 농익은 오더. 풋내 나는 뉴비들의 오더와는 인성질의 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 내가 이런 거에서 우월감을 느낄 나이가 아닌데.

뭐 아무튼.

시험도 아무 탈 없이 끝났겠다. 원래 같았으면 진즉 하교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부장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출이라고 해봐야 별 대단한 건 아니라며 교장 선생님은 말씀하셨지만, 글쎄. 이 학교에서 대단찮은 일이라고 말한 게 정말로 그랬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라 조금은 의심스럽다.

그나저나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는 있지만, 어째 우리를 부른 사람이 제일 늦는다.

"야, 창민아. 선배 어디쯤 오고 있대?"

"잠깐만. 어, 거의 왔다네."

그 말과 함께 문 너머 복도에서 들리는 묘하게 경박한 뜀박질 소리. 과연, 부르면 달려오는 호랑이 같은 기세는 여전하구나.

"안녕. 미안해. 좀 늦었지?"

직후, 문을 활짝 열고 등장한 선배는 '나는 뛴 적 없어요. 나는 부장으로서 모범을 보일 행동만 해요.' 같은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근데 어쩌나. 소리도 그렇고, 이제 숨기기엔 늦었는데.

"선배. 부장씩이나 돼서 복도에서 뛰어다니면 어떡해요."

"뛰다니? 무슨 소리야?"

"땀 먼저 닦고 얘기합시다."

땀이란 말에 순식간에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툭툭 찍는 선배였으나, 이윽고 손수건에 아무것도 닦이지 않는다는 걸 느낀 선배가 배신자를 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속였구나!"

"예. 거짓말입니다. 서로 비겼네요."

억울하다고 시위해도 난 꿇릴 거 없다.

잠시 말 없는 대치가 이어졌으나, 이내 먼저 떨어져 나간 선배가 오랜만에 보는 일행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라고 해도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뭐가 그리 반가운지 방방 뛰어다니고 있다.

상황이 좀 진정된 후. 우리를 부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먼저 다들 돌아온 걸 축하해. 대회반은 보통 한 번 했던 사람이 그대로 계속 있는 일이 많지만 가끔 새로운 인원으로 바뀌기도 하거든. 이번 기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시선이 잠깐 동안 내게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길게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다들 지옥주 하느라 지쳤지? 이해해. 그거 할 짓이 못 된다니까. 그러니 바로 전달사항만 듣고 해산하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특히 오늘 고생한 우리반 두 녀석들에게는 더욱 반가웠는지 두 사람이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절절한 이해심이 엿보이는 얼굴로, 선배는 별거 아니라며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부른 건 대회반 일정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음. 이건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가 힘들다고 세상이 멈춰주는 건 아니다. 이번에도 어디선가 열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생을 해야겠지. 그래도 괜찮다. 1학기를 거치며 우리의 팀웍은 탄탄하게 단련됐으니까. 어떤 대회를 들고나오든 당당히 출전하여 상을 쓸어올 자신이 있다.

다른 아이들의 표정에서도 그런 자신감이 엿보였다. 올 테면 와봐라. 얼마든 해치워주마 하는 장군의 기세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선배의 말은 그런 우리의 각오를 단번에 무색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하반기 대회반 일정은…… 없어! 아무것도!"

???

잠깐 선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잠깐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한 몸으로 받은 선배가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 들썩였다.

"올해 하반기에 예정된 국내 대회 대다수가 시기를 미뤘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나가봤자 큰 소득도 없는 작은 대회거든. 그래서 아무데도 참가 신청을 안 넣었대, 할아버지가. 그런 고로 올해 하반기, 성심고 대회반은 공식적인 활동 계획이 전혀 없어."

그렇게 말을 끝낸 선배는, 마치 램프에 갇힌 집요정을 풀어주는 것 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너희는 자유야!"

…… 시즌 몇 호째 번복인지는 나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번에도 말을 좀 취소해야겠다.

가끔은 주변 세상이 멈출 때도 있는 법이었다.

아니 근데 이거 전혀 큰일이 아닌 게 아니잖아. 대회는 학생의 커리어고, 시험까지 봐서 들어온 대회반에서 그 대회 일정을 잡아주지 못한다는 건 직무유기 아닌가?

그런 당연한 불만을 표하자, 선배는 자기야말로 억울하다며 나를 삿대질했다.

"이거 반은 너 때문이란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를 향해 곧게 펴진 선배의 검지에 시선을 향하는 내 두 눈에서 당혹스런 감정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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