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23화 (123/403)

123. 지옥주-양.-3-

약 수십 년 전.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죽음의 다섯 단계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은 죽음을 맞닥뜨린 상황에 처했을 때 다섯 단계의 감정 변화를 거친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부정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사태를 맞닥뜨린 사람은 보통 그 상황 자체가 현실이 아니라 부정하기 시작한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그래! 선생님이 뭔가 착각을 하신 거야! 평가순대로 적어두고 명단을 거꾸로 읽었다거나!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무슨 조장이야 조장은!"

두 번째는 분노다.

현실부정을 되풀이한 끝에 급격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뇌는 이윽고 자신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바깥을 향해 분출한다.

"아니! 이건 아니지! 왜 나야? 보통 너나 백예은이나 안창민처럼 잘하는 애들이 조장이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해를 못하겠네!"

그 두 단계를 거치면,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흥정을 하는 경지에 이른다.

아무리 부정하고 화를 내어봤자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선생님한테 가서 못하겠다고 사정하면 바꿔주시지 않을까? 사실 선생님도 잘못 말해서 고민 중이실 거야. 바꿔달란 말 한 번쯤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부정, 분노, 흥정.

그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끝내 자기 자신을 내려놓게 된다. 이제까지 가슴을 꽉 채우고 있던 감정이 마개를 빼 버린 것마냥 흘러나오고, 빈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감정뿐이다.

"인생 부질없다…… 하, 하하……."

그 속에 맺힌 감정마저 전부 쏟아낸 마음은, 끝내 공空으로 돌아간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오히려 마음에 무언가를 받아들일 여유가 생기는 모순.

사람은 끝내 현실을 수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조장이라고 뭐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닐 거 아냐. 게다가 어차피 2주고."

"…… 쩌네, 이거."

"응? 뭐야?"

"아니야 아무것도."

충격적인 조장 발표 후, 학급을 반으로 갈라 조 원까지 정한 뒤에야 끝난 오늘의 수업.

수업, 종례, 하교.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넋이 나가 있던 철정이 녀석은 기숙사에 돌아오고 나서야 이 모든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듯, 침대에 머리를 박고 기숙사 방을 종횡무진하며 자신의 패닉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말을 허투루 하는 건 아니구나.'

언젠가 본 적 있는 죽음의 다섯 단계를 보고 따라하는 듯 그대로 행하는 철정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놀랐다. 뭐, 저 녀석이 당장 죽는다는 말을 들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넋나간 웃음으로 오디오를 채우던 철정이는 비로소 이 상황을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마음을 먹은 듯 소란을 멈추고 자기 책상에서 가져온 의자를 내 옆에 두고 앉았다.

"넌 이게 무슨 상황인 것 같냐."

"어…… 네가 엿된 상황?"

"맞지만, 그거 말고."

눈빛을 보니 분명 아까보다는 훨씬 제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보여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김철정은 박예휘 선생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당혹감 가득한 얼굴로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끊임없이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과 떨리는 다리가 그 속내를 여실히 비춘다.

"그러게 조금만 더 잘하지 그랬냐. 애당초 왜 라비올리 같은 거에서 실수를 하고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고급중식당을 가업으로 삼은 집안에서 태어나 지금껏 엄청난 공부를 해온 이 녀석에게 왜 양식을 못 만드냐고 타박하는 건 불합리한 이야기지만, 다른 것도 아닌 라비올리라면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라비올리란 두 겹의 밀가루 반죽피 사이에 속 재료를 넣어 한입 크기로 잘라 만드는 파스타의 일종.

눈치가 빠르다면 알겠지만, 라비올리란 쉽게 말하자면 서양식 만두다. 그리고 만두는 중식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음식. 이토록 교집합이 많은 음식을 만들면서 실수한다는 건 그만큼 이 녀석이 집중을 못 했다는 뜻이다.

"……."

자기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아는지 묵묵부답 땅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철정이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튼, 선생님도 무슨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그건 나도 알아. 안 그러면 왜 잘 하는 애들 놔두고 아래서부터 뽑겠어. 선생님 생각이 뭔지, 그걸 모르겠어서 이러는 거 아니냐."

역시 짐작은 하고 있었구나. 얘도 좀 단순할 뿐이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나도 무어라 확실한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몰라서가 아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그건 내일이 되면 알겠지."

"하…… 이젠 나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의도를 알기에 알려줄 수가 없다. 이건 정말로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가 없는 수업이니까.

나는 철정이의 의문에 대한 답을 선생님에게로 미루며, 그저 고뇌하는 녀석의 끙끙 거림을 배경음 삼아 평소처럼 교과목 공부에 집중할 뿐이었다.

***

"여러분이 만약 하나의 주방, 하나의 식당을 운영한다면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일까요?"

다음날. 어제 예고한 대로 두 개의 조를 나눠 실습실 양쪽으로 갈라 세운 우리를 보며 박예휘 선생님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의 반응은 조를 가리지 않고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음…… 잘 모르겠는데……."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보통 힘들 때는 바쁠 때 아닌가?"

하나는 얼핏 감을 잡을 뿐, 확실히 답을 도출해내지 못하는 아이들.

"아, 보통 힘들 때면 그거지?"

"그치. 그게 제일 힘들긴 하지."

다른 하나는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아이들.

이 두 부류를 나누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각 부류 아이들의 가업이었다.

날 때부터 요식업을 집안 내력으로 삼아 자라온, 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예습반'이라고 불리는 아이들. 그 외에도 식당에서 일한 경력이 긴 아이들 등.

현장을 그 나름대로 오래 겪어본 학생일수록 박예휘 선생님의 질문에 감춰진 뜻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나? 물론 후자였다.

"짐작이 가는 학생도,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겠지만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닙니다. 어차피 계속 이 일을 하다 보면 만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니까요."

학생 몇 명이 움찔 몸을 떠는 게 보였다. 물론 선생님이 못 봤을 리 없지만, 그저 못본 척 말을 넘길 뿐이었다.

"여러분이 어디서, 어떤 주방에서 일하든 결코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요식업이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란 거예요. 그렇지 않은 직업이 오히려 적겠지만, 요식업은 사람의 의, 식, 주라는 3요소에 가장 깊게 관여하는 직업이기에 다른 직업보다 조금 더 직접 고객의 감정에 맞닥뜨릴 일이 많습니다."

조금 장황한 설명이긴 했지만, 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요컨대 어느 업장이든 진상 고객이 없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진상.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그 단어. 서비스직에게 끝없는 현타를 안겨주는 저주받은 족속들.

그러나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확실히, 그런 진상을 상대하는 게 힘들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왜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될 수업을 예고하는 문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의 안타까운 의문이었다.

"저도 한 명의 요리사로서, 고객에게 진상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조장이 한 번 대답해보시겠어요?"

갑작스럽게 질문의 시위에 겨눠진 두 조장이 몸을 흠칫 떨었지만, 이내 먼저 침착함을 되찾은 철정이가 앞서 대답했다.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고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과함을 측정하는 기준은 뭘까요."

이어진 질문에 조장 두 사람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고르자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이건 아직 여러분에게는 어렵겠죠. 그 기준이란 바로 비용입니다. 사회에서 비용이란 약속이에요.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약속이죠. 판매자는 소비자에게 '이만큼 값을 치르고 우리 서비스를 이용해주세요.'라고 요구하면, 소비자는 그 값을 치른 만큼의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진상이란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에요."

전적으로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판매란 약속한 값어치만큼의 상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말을 뜻한다. 즉, 소비자는 지불한 값어치 이상의 서비스를 강요할 수는 없고, 판매자는 받은 값어치만큼의 서비스를 세상의 도리에 맞추어 철두철미하게 제공해야 한다.

'다만 세상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게 문제지.'

이미 그런 상황에 맞닥뜨려본 아이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겠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그래서 성심고 교사진은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 당할 거. 그 전에 예방교육 정도는 시켜줘도 되는 거 아닐까?'하고.

"우리는 이 2주 동안 그런 진상에 대한 예방교육을 하는 겸, 가상의 주방을 구현해서 실제로 운영하는 학습을 합니다. 각 조는 하루씩 돌아가며 주방과 고객의 역할을 맡습니다. 오늘은 A조가 먼저 주방을 맡도록 하죠."

진상에 대한 예방교육? 주방과 고객을 나눠?

아이들의 머리 위로 미아핑이 박히는 게 훤히 보였다.

"상황을 설정해드리죠. 시간대는 디너. 첫날이니만큼 오늘은 단일 메뉴로 하죠. 메뉴는 T본 스테이크. 소스는 와인, 당근 퓌레, 바비큐까지 3종. 가니쉬는 자유롭게 하되 고객에게 공지하도록 합니다. A조 조장. 기억했나요?"

"에, 예?"

시작됐다. 사람이 미쳐 버린다는 악명 높은 지옥주가.

제대로 얼을 타고 말을 더듬거리며 되묻는 철정이에게 다시 한번 말을 되풀이하는 선생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철정이 녀석은 당황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선생님의 전달사항을 외웠다.

"기본적인 상황 설정은 여기까지. 10분 드릴게요. A조는 그 시간 안에 주방을 어떻게 사용할지 논의하고 준비하세요. B조는 자유시간입니다."

선생님의 참견은 딱 거기까지였다.

정말로 우리끼리 힘을 모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주방을 구축하라는 뜻.

A조 전원의 시선이 조장인 철정이에게로 쏠렸다. 아이들도 당황하고 있었지만, 헤드 셰프는 철정이라는 것을 명심한 것이다. 결정은 저 녀석의 몫이었다.

"아, 그, 그러니까……."

당황스러운 눈초리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철정이는 이내 각오를 끝낸 듯 어떻게든 1학기 때 배운 내용에 따라 조원에게 역할을 부여하여 파트를 나눴다.

고기, 소스, 가니쉬. 각 요소를 맡을 학생을 어설프게나마 적절히 분배한 건 칭찬할 만했으나, 모자란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내가 나설 수는 없다.

'그게 이 수업을 하는 이유니까.'

각 조가 돌아가며 시행착오를 반복하여 제대로 하나의 주방을 구축하고, 그 과정 속에서 종목에 대한 적성을 찾는 것.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실수조차 하나의 수업. 그걸 내가 나서서 도와주면 그걸 방해하는 꼴이 된다.

10분 후. 철정이의 지시 아래 간신히 구색을 갖춘 파트를 만들어낸 우리. B조 아이들은 자유시간을 받았음에도 그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고 있었다. 좋은 자세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봐야지만 아는 것도 있는 법이다.

선생님은 제법 빠르게 진형을 갖춘 우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부족한 점은 있지만, 그건 배워가며 차차 알게 될 겁니다."

A조에게서 눈을 돌린 선생님이 이번에는 B조를 바라봤다.

"그럼 1학년 1반 식당의 첫 고객인 B조 여러분을 환영하며, 오늘 B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간단해요. 음식을 주문하면 됩니다. 저처럼요."

각 조가 주방과 고객을 번갈아 가며 맡는다는 건 이런 뜻이었다.

……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이 전공탐색 수업에는 지옥주라는 별명 말고도 또 다른 별명이 존재한다.

이 수업은 필연적으로 A조와 B조가 대치구도를 이룰 수밖에 없는 수업. 차라리 운동회 같은 거였다면 그런 두 팀 사이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킬 도구가 존재했겠지만, 이 수업에는 마땅히 걸만한 무언가가 없다.

그 대신, 성심고의 교사진은 앞선 발상에 이어 또다시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서로 얻을 게 없으면, 반대로 서로가 더 잃게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예휘 선생님이 드디어 우리 헤드 셰프를 보고 입을 열었다.

"오더 들어갑니다. T본 스테이크는 등심을 미디움 웰던, 안심을 미디움 레어로 구워주세요. 가니쉬는 전부. 소스는 와인 소스와 당근 퓌레만. 와인 소스는 개별 그릇에 담아주시고 당근 퓌레는 스테이크 아래에 깔아서."

꼬일 대로 꼬인 주문의 나열에 A조 전원이 넋 나간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다. 요리에 대한 주문이라면 이건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범주 안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주문이 아직 열댓 개 이상 남았다는 것이다.

"자, 이런 느낌으로 주문하면 됩니다. 어때요. 참 쉽죠?"

그제야, 1반 학생들은 이 수업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듯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전공탐색. 지옥주.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이 수업의 또 다른 별명은, 바로 '멸망전'.

순수하게 요리에 한정된 오더로 어느 쪽이 더 상대를 빡치게 하느냐를 겨루는 신조차 모독하는 천재들의 두뇌 요리전쟁.

그야말로 자존심 강한 두 천재집단의 자존심 싸움이 지금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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