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류찬혁 크랩-3-
사람들이 이르길 맛있는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입에 그 여운이 감돈다고 하였다.
이 여운이라는 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기억? 감동?
뭐, 사람마다 이래저래 하는 말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여운이란 단어를 해석하려 애쓴 적이 있다.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사람의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줄을 타듯 그 뜻을 파고들며 탐구한 결과, 내 결론은 어느새 과학적인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과학적…… 이라고 말해도, 결국 유사과학이나 야매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그 결론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여운이란 유분油分이다.
다시 말해 기름. 즉, 어느 음식의 맛이 담긴 기름이 입속에 일종의 막을 형성하여 물이나 음료를 마셔도 쉬이 지워지지 않는 맛과 향을 계속 남기는 것이다.
그 맛을 매개로 떠오른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거듭 리플레이 되는 현상.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여운이라 부르는 감각의 참모습이 아닐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매우 개인적인.
아무튼, 평상시에 우리가 느끼는 그런 여운은 즐거운 기억을 오래도록 되새길 수 있는 좋은 현상이었겠으나, 아쉽게도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서두른다고 서둘러보긴 했지만, 역시 우리 순서가 제일 늦었어.'
불퉁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는 심사위원단의 눈치를 슬쩍 살핀 나는 내 예상에서 한치도 빗나가지 않은 저들의 모습에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준비한 게 허사는 아닌 것 같네.'
지금도 냉장고 깊숙한 곳에 박혀 있을 초록빛 유리병을 떠올리며 나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고심 끝에 내놓은 해결책은, 바로 술이었다. 그것도 심사위원단이 맛있게 먹었다는 말 하나 나오지 않는 별 대단한 것 없는 싸구려 술. 이슬이란 이름을 가진 한국에서 가장 흔한 소주.
맛이라고는 알코올의 씁쓸함과 미약한 단맛밖에 나지 않는 투명함 하나만이 장점인 그 술이,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아마 심사위원단도 곧 눈치를 채겠지.'
이 단 한 잔의 소주가 그들의 심사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즉각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하나둘 오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 심사위원단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소주의 진정한 효능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음?』
『어라, 이거……?』
앞서 말했다시피 여운이란 유분. 입에 남은 미약한 기름막이 입속에서 지속적인 향미를 남기고, 그 여운은 포만감과 더해져 그다음 음식을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해물이 된다.
그런 그들의 입속에 소주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소주는 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소비량을 보이는 것 치고는 제법 강한 도수를 자랑한다. 여러 브랜드의 소주가 있지만, 내가 이번에 준비한 소주는 약 20도.
다량의 알코올이 함유된 그 액체는, 평범한 물로는 쉬이 닦이지 않는 기름막에 순식간에 균열을 만들며, 그 결합을 찢고 분해한다.
그와 동시에 씁쓸함이 강한 뒷맛과 특별할 것 없는 향은 비강에 맴돌던 향을 단번에 자신의 향으로 물들이고, 그대로 깔끔하게 물들인 향과 함께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난다.
여태껏 게 요리를 먹고 입속에 남아 있던 고소함, 비릿함, 짭짜름함, 매콤함, 기타 등등. 수많은 맛의 여운이 마치 물청소라도 한 것 마냥 심사위원단의 입속에서 씻겨져 내려가고, 남는 것은 오로지 공장식 소주의 미약한 향취뿐.
그러나 그마저도 유분과는 달리 몇 모금의 물만으로 깔끔하게 사라진다.
특별한 향취가 없는 만큼, 그 과정은 아주 신속하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이다.
『어째 아까보다 냄새가 더 잘 맡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게다가 뭔가 입속이 텁텁하던 느낌도 없어진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삼겹살을 먹다 너무 느끼해서 고기가 잘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을 때 소주를 한 잔 마시니 입이 개운해져서 더 먹을 수 있게 됐다던가, 회를 먹고 입에 남은 비린 맛이 소주 한 잔에 깔끔하게 사라졌다든가 하는 것처럼.
이 상황도 그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아니.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었다.
피로에 절어 예리함을 잃은 혀와 코를 세척하여 잠깐이나마 날카롭게 세우는 것.
아무래도, 나의 첫 번째 노림수는 정확하게 맞아 들어간 듯 보였다.
'슬슬 다음 단계로 나갈 준비가 된 것 같은데.'
다른 이들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순위 하나에 평균 수천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 걸렸다. 그런 만큼 요리도, 심사도 전력을 다해서 임할 뿐.
긴장으로 굳은 우리의 시선 저편에서, 심사위원단이 수저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
"먼저 이쪽 게간납부터 드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로소 시작된 한국 팀의 심사.
심사위원단은 안영길의 안내에 따라 세 개의 메뉴를 순차적으로 시식했다.
시작은 게간납.
게간납이란 게의 등딱지를 몸통에서 떼어낸 뒤, 속에 있는 내장을 전부 긁어내고, 빼낸 게의 내장과 다진 쇠고기, 숙주, 미나리, 두부 등을 함께 양념하여 반죽한 것을 내장을 긁어낸 게딱지에 다시 채워 넣은 뒤 달걀옷을 입혀 기름에 지진 요리이다.
궁중요리에서도 명나라 사신을 대접할 때에나 만들던 굉장히 귀한 요리인 이 게간납은 양념을 비교적 삼삼하게 하여 내장과 게딱지에서 흘러나온 게의 농후한 맛을 더욱 깊게 즐길 수 있게끔 만든 요리이다.
하지만, 그런 요리인 만큼 이 대회에서는 취약한 부분이 존재했다.
게 맛을 깊이 즐기는 요리일수록, 여태껏 수십 가지 이상의 게 요리를 연달아 먹은 심사위원단의 혀로는 그 진정한 맛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 사실.
하지만 찬혁이 발휘한 기지 덕에 오히려 얼마 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갈린 혀의 감각을 되찾은 심사위원단은 게간납에 숨겨진 참맛을 왜곡 없이 그대로 맛볼 수 있었다.
『호오. 한국에서 이것과 비슷한 형태의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표고버섯 안에 거의 똑같은 속재를 채운 요리였죠. 그래서 이 게간납이라는 요리도 비슷한 맛이 나리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군요.』
『게 내장이 안에 섞이니 특유의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게끔 세심한 간 조절을 했어요. 간장과 마늘, 요리주 특유의 향이 살짝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게 게의 풍미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게의 맛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그리 강하지 않은 간 덕분에 무리 없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맛. 심사위원단이 훌륭한 요리라며 고개를 주억이는 사이, 안영길은 다음 요리를 준비하여 그들 앞에 내놓았다.
단,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단품이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구성입니다.』
『꼭 한 상 차림 같군요.』
심사위원 한 명마다 쟁반이 하나씩.
말끔한 검은 옻칠 쟁반 테두리로 붉은색이 돋보이는 쟁반 위에는 찬혁이 만든 간장게장과 그 간장으로 만든 게국지가 담긴 뚝배기, 마지막으로 방금 막 밥솥에서 푼 하얀 흰쌀밥이 놓여져 있었다.
찬혁 일행이 그 쟁반을 들고 절도를 갖춰 심사위원단이 앉은 자리에 각각 쟁반을 내려놓자, 안영길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국의 주식은 쌀입니다. 그만큼 밥과 함께 먹기 위해 발달한 요리가 많죠. 특히 게로 만드는 음식의 경우 그 대부분은 간이 강하고, 그만큼 밥과 함께 먹는 게 가장 어울리는 반찬과 국 종류의 요리가 많아졌습니다. 이 두 가지 요리는 그런 반찬, 국 종류의 게 요리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죠. 평소에 식사하시듯 드셔주시기 바랍니다."
안영길의 설명이 끝난 직후. 심사위원단은 '올게 왔다.'라는 표정을 짓고는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속에 서린 미묘한 불신감, 미심쩍음, 의심.
그런 부정적 감정이 한국 팀이 내온 요리에 쏠린다.
'이게 한 시간 만에 완성한 간장게장…… 먹어도 괜찮은 거 맞나?'
'고작 전기밥솥으로 한 밥이라…… 별거 없을 것 같은데.'
그 두 가지 음식은 분명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네 쌍의 다리와 한 쌍의 집게발을 다소곳하게 모은 참게는 껍질이 붉은빛으로 익어 간장국물이 가득 담긴 대접 안에 제 몸을 푹 담그고 있었고, 마치 눈 내린 산봉우리처럼 봉긋하게 솟은 하얀 쌀밥은 밥알 하나하나에 윤기와 광택이 가득한 것이, 절로 찬사를 자아냈다.
『음…….』
하지만, 밥은 둘째 치더라도 역시 간장게장에 먼저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던 심사위원단.
결국 그들의 손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겉보기로는 가장 안전한 게국지 쪽이었다.
게국지는 다른 음식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김치찌개다. 무와 우거지 등을 비롯한 국물용 채소를 겉절이 양념하듯 빨간 양념에 비벼, 그것을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끓이는 국물요리.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게국지는 처음 양념을 만들 때 평범한 간장이 아닌 간장게장을 먹고 남은 간장을 사용하여 양념을 만든다.
온갖 향신채와 게의 맛을 달이 지나가도록 제 몸에 품으며 게의 깊은 맛이 밴 간장으로 만든 게국지는, 겉으로만 보면 김치찌개와 비슷한 그 외관과 달리 맛은 전혀 다르다.
심사위원단도 그 특이한 맛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치찌개는 본토에서도 여러번 먹어봤지만 이건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맛이 나네요.』
『분명 그릇 안에 게는 보이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굉장히 진한 게 맛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꼭 돼지 뼈 육수로 끓인 고기 없는 김치찌개 같아요. 돼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맛은 확실히 나는…….』
『제법 랄辣이 강하네요. 간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감칠맛이 엄청나서 숟가락이 멈추질 않아요.』
평가를 하며 연달아 수저를 움직이던 그들은 이내 입이 소금 소태처럼 되고 나서야 숟가락을 멈출 수 있었다.
마음으로는 겟국지를 조금 더 맛보고 싶었지만, 짠 국물만 먹어서 그런지 혀가 물을, 혹은 짠맛을 중화시켜줄 무언가를 바랐다.
'밥을 먹으면…….'
'그러면 좀 더 먹을 수 있는데…….'
그들이 고작 밥을 먹을지 말지로 이토록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준 미달한 밥맛 탓에 모처럼 먹는 맛있는 음식 맛을 버릴까 하는 의심 탓이다.
밥 한술 뜨기를 한참 동안 망설이던 심사위원단은, 결국 하는 수 없이 젓가락을 들고 그릇을 들어 밥을 입안으로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래! 올 테면 와라!'
'설령 못 만들었대도 밥은 밥이지!'
그런데, 그들로서도 정말 생각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 뭐지?』
『어라?』
『뭐야 이거? 왜 맛있어?』
『밥맛만 따지면 아까 일본팀이 한 육수밥보다 더 나은 것 같은데?』
호평. 생각지도 못한 대호평이었다.
처음에는 순식간에 씹어 넘길 작정으로 우적우적 밥을 씹어 삼키던 심사위원단의 입이, 마치 자동차 기어를 한 단씩 내리듯 천천히, 천천히, 그 속도가 내려간다.
허겁지겁, 우적우적에서 우물우물로, 그리고 지금은 오물오물, 입을 최대한 적게 움직이는 저작운동으로 최대한 밥알 하나하나에 담긴 맛을 최대한 끌어내려는 움직임으로.
그 광경을 본 찬혁은 이제야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어젯밤 시험 삼아 해본 밥도 일행 사이에서 굉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밥을 먹는 방식이 다를 심사위원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었기에 노심초사하던 찬혁이었다.
『뭐지? 고작 전기밥솥으로 만든 밥이 그렇게 맛있나?』
『저 게국지라는 건 그냥 풀떼기 밖에 안 들어간 전골 같은데…….』
『간납이라는 건 제법 맛있어 보여.』
심사위원단의 분위기가 진중해지니, 관객들의 반응 또한 덩달아 그 기세를 타고 올랐다. 학생들의 행진을 비웃던 이들마저 지금은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오직 군침만을 삼키고 있었으니까.
술렁임만이 가득하고, 묘한 침묵이 자리한 대회장.
그런 고요한 대회장 속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꺼냈다.
『그래서 저 간장에 잠긴 따자시에大闸蟹 같은 건 언제 먹을 생각이야?』
그 맛을 짐작하지 못해 궁금해 미칠 지경이던 한 관객의 호기심이, 그 주변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먼 관객석에서부터 행사장 중앙의 심사위원석에 이르기까지.
마치 문장 전달 게임처럼 사람을 전파탑 삼아 이동한 그 메시지가, 이윽고 심사위원단의 귀에 도달했다.
『…….』
『…….』
심사위원단도 내심 직감하고 있었다.
처음엔 과연 안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일부러 시식을 피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의심이 깨진 지금, 두 번째 의심거리 또한 그 의심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판단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재차 고개를 주억인다.
미지의 요리에, 이번에는 그들이 도전할 차례가 됐다.
『아, 잠깐만.』
"?"
『시식 전에, 아까 마셨던 술을 조금만 더 마실 수 있겠습니까? 신기하네요. 분명 그렇게 맛있는 술은 아닌데…… 이상하게 이걸 먹고 있으니 계속 끌려요.』
"…… 아, 예."
그중에서는 약주를 취하는 방법을 깨달은 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