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류찬혁 크랩.-2-
앞서 말했다시피, 이 대회의 시간제한은 한 시간. 참가자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 총 세 가지의 메뉴를 만들어 제출해야 한다.
척 보기에는 복잡할 것 없는 규칙. 하지만 그 속에는 무시할 수 없는 자그마한 함정이 숨어 있다.
크게 대단한 함정은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단순한 사실.
그건 바로 '60분 안에 요리를 만들어 제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말로 60분을 다 써서 음식을 만들든, 10분만 써서 음식을 만들어 제출하든 아무래도 괜찮다. 아마, 함정의 규모로 치자면 발목이 간신히 묻히는 구멍함정 수준에 불과하다. 함정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영역.
하지만 이 함정의 무서움은 그 뒤를 이어 다가오는 훨씬 치명적인 두 번째 함정을 위한 포석이라는 데에 있다.
이런 대회와는 연이 없는 평범한 일반인이나, 대회 경험이 적은 요리사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60분을 줬으니 그 시간을 전부 써서 공들여 요리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지?'
물론 이 생각도 맞다. 다만, 이게 평범한 1:1 형식의 요리 대결이라면.
현재 치러지고 있는 이 대회는 10팀의 개인전.
다시 말해 심사위원단은 열 개의 팀이 제출하는 서른 가지의 요리를 먹어야만 한다. 아무리 적은 양을 먹는다 한들, 비슷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그만큼이나 먹으면 누가 됐든 질리기 마련.
공정한 평가를 내리겠다고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몸은 솔직하다. 눈은 다채로운 색상에 무감각해지며, 코는 천변만화하는 향기의 군무를 제대로 잡아낼 수 없을 만큼 둔중해지며, 제 위에서 씹을 때마다 변화하는 맛을 느껴야 할 혀는 지쳐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쉽게 말해 요리를 제출하는 순번이 뒤로 밀릴수록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이 생길 확률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음식을 제출하는 것 또한 묘책은 되지 못한다. 요리란 보편적으로 시간을 들일수록 맛을 더해나갈 수 있는 것. 속도만 신경 쓰다가 맛은 뒷전이 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우스운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 각 팀 사이에서는 좀처럼 눈치채기 힘든 신경전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누구인가. 누가 가장 먼저 나서서 첫 번째로 심사를 맡을 것인가.
너냐? 아니면 우리가?
조리 완료를 선언해야 하는 각 팀의 팀장들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이 오간다.
어느 팀의 후발주자로, 혹은 어느 팀의 선발주자로 나가느냐에 따라 점수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모르는 일.
서로의 팀이 만드는 요리가 무엇인지 서로가 말없는 견제를 이어나가던 그때, 갑자기 무대 한쪽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가벼운 폭죽이라도 터진 것 마냥, 아니. 실제로 주최 측에서 각 팀마다 설치한 조리가 완료되었다는 신호.
그 소리를 들은 참가자들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돌아갔다.
각 팀의 주방 뒤편에 설치된 국기봉.
하지만 아까까진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아 모두가 '저건 무슨 기둥이지?'라며 존재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했던 그 기둥 중 하나에서 펄럭이는 다른 팀의 국기를 본 그들이 '아.'하고 외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저것은 일종의 완성신호. 관객과 심사위원단에게 자기 팀의 요리가 끝났다고 알리는 것.
그것을 알아차린 다른 이들도 심사대열에 최대한 빨리 합류하기 위해 요리하는 속도를 높인다. 앞서 말했다시피, 메뉴를 제출하는 순서는 중요했으니까.
최소한 마지막 차례는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요리사들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게 점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행사장의 분위기에 전혀 따라가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니…….
"……."
다름 아닌 찬혁과 그 일행. 한국 팀이 바로 그러한 이들이었다.
"…… 슬슬 끝나가네."
똑. 딱. 똑. 딱.
찬혁의 머릿속 타이머의 초침이, 점점 그가 직접 그어두었던 결승선을 향해 다가왔다.
그 결승선이야말로 찬혁이 용납할 수 있는 최저한의 커트라인이었다. 무엇에 대한 용납이냐고?
'이 간장게장이 완성된 것이냐 아니냐를 용납하는 기준점.'
간장게장이란 절이는 요리. 양념이 제 몸에 배어들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건 필수불가결한 과정.
"다른 팀도 하나둘 심사를 받기 시작하는데."
"…… 괜찮은 거 맞지?"
"괜찮대도요."
자신들보다 한발 앞서가는 다른 팀을 보며 최여린은 작게 불안감을 표출했다. 하지만 찬혁과 일행은 서로 메뉴를 정할 때부터 이미 모든 이야기를 끝내뒀었다. 이 요리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또 그로 인해 얻을 불이익은 무엇이 있을지.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페널티라는 건 맞는 말이야.'
찬혁 일행도 심사를 늦게 받았을 때 생길 페널티 정도는 이미 한참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성심고의 대회반. 그것도 3학년이라 함은 여태껏 전국구 요리대회 정도는 질리도록 나가본 인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굳이 이 길을 골랐다는 건…….'
요컨대,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 정도 패널티를 감수하더라도, 제대로 된 성적을 받으리라는 자신감이.
찬혁은 완성된 간장게장을 꺼내어 접시에 플레이팅을 하기 시작했다. 등딱지가 빨갛게 익은 게가 접시 위에 앉아 있는 모양새로 꾸몄고, 그러는 와중에도 한 팀이 나가 심사를 받았다.
『자! 이것으로 9번째 팀으로 나온 일본팀까지 심사를 마쳤습니다! 이것으로 남은 팀은 단 하나! 이번 박람회에서 온갖 파란을 일으켰던~! 한국 팀입니다! 과연 이번에도 젊은 피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뭐야, 벌써 마지막이야?"
찬혁은 혀를 차며 더욱 서둘러 손을 놀렸다. 이미 60분을 거의 꽉꽉 눌러서 알뜰살뜰하게 사용해 버린 상황. 더 늦었다간 심사위원단도 그들을 좋게 보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찬혁 일행은 앞서 심사를 늦게 받을 때 생길 페널티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는 어떠한 문제가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으나, 문제가 생기리라는 걸 알았다면 응당 그 해결법 또한 논의하는 게 인지상정.
오랜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논의했던 그들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나온 해결 방안은 의외로 간단했다.
"교장 선생님이 야밤에 고생을 좀 해주시긴 했지만……."
찬혁이 제안한 페널티 대처법.
그 정수가 지금 찬혁의 손에 들린 물건에 담겨 있었다.
"…… 내가 살면서 이놈 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머리 위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맞아 반짝이는 투명한 초록빛 병.
냉장고에서 이제 막 꺼내 싸늘한 냉기를 흘리는 그 병의 빨간 뚜껑을 돌려 깐 뒤, 적당히 있어 보이는 술잔 다섯 개에 그것을 나눠 담는다.
예로부터 금연과 음식 불감증에 최고의 특효약이라 알려진 그것이 담긴 병에서, 응결 현상으로 생긴 맑은 이슬 한 방울이 똑, 하고 흘러내렸다.
***
『드디어 오늘 대회 마지막 주자의 등장! 한국 팀의 심사가 곧 시작됩니다! 환영의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
"……."
음,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모처럼 사회자가 저렇게 말해 주고 있는데, 영 반응이 별로네요."
"그러게. 박수 소리가 좀 작네…… 아, 저기 우리 애들 있다."
"어디? 아 저기 있구나."
심사위원단 앞에 음식을 내어놓기에 앞서, 무대와 심사위원석을 잇는 일종의 교두보 같은 무대 위에 잠시 멈춰선 우리는 몇 안 되는 박수 소리가 들리는 장소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물론 플레이팅이 흔들리지 않게끔.
'고작 전기밥솥 좀 썼다고 그렇게 밉상으로 보였나.'
요리할 때엔 안 들리는 척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적의가 섞인 수많은 시선을 적당히 흘리고 있자니 제법 욕을 많이 먹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교두보를 건너 도착한 심사위원석. 그들 앞에 멋들어진 플레이팅이 가미된 세 메뉴가 담긴 접시와 요리를 덜어 먹을 개인접시. 그리고 이제 막 밥솥에서 푼 소량의 밥과 비장의 음료가 담긴 잔까지.
그 모든 세팅을 직접 끝마치고 뒤로 물러서자, 비로소 우리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던 심사위원단이 한마디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물론, 옆에 붙어 있던 통역사를 통해서.
『요리를 설명해 주세요.』
음. 어차피 통역사도 있겠다 굳이 중국어까지 써가면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
"저희가 준비한 요리는 왼쪽에서부터 참게로 만든 간장게장, 게간납, 마지막으로 게국지입니다."
뒤이어 설명을 위해 나서는 것은 교장 선생님. 한식에 대한 지식이라면 전 세계를 뒤져보아도 교장 선생님만큼 뛰어난 사람을 찾긴 어려울 터.
교장 선생님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각 요리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현대에 오며 어떻게 그 요리가 변형되어 왔는지 상세하면서도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마치셨다.
"그리하여 본래 참게로 담그던 게장은 꽃게로 변형됐고……."
"게국지의 경우, 본래는 게장의 부산물로만 만드는 요리이기에 게는 들어가지 않지만……."
"게간납은 현대에 들어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요리 중 하나로……."
'역시 교장 선생님.'
심사위원단의 호기심을 해소하면서도 음식이 식거나 하는 일이 없게끔 짧게 설명을 마무리 짓는 실력과 지식, 언변은 역시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훈화할 때도 좀 저렇게 해주시지.
…… 아무튼,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심사위원단이 수저를 들었다. 그들도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 먹는 방법을 굳이 가르쳐 줄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의 표정 근저에는 쉬이 알아보기 힘든 지루함이 옅게 깔려있었다.
좋아, 지금이 바로 내가 나설 때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먹는 순서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흠?』
앞으로 나선 나의 말에 잠시 '이건 또 뭐야.' 싶은 표정을 지은 심사위원단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들었던 수저를 탁상 위로 내려놓는다.
다행이다. 내 말을 안 듣고 그냥 멋대로 먹기 시작하면 어쩔까 싶었는데. 심사위원답게 요리사의 제안에 따라줄 마음가짐 정도는 가진 듯했다.
"우선, 잔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심사에 앞서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온 고국의 술입니다."
『술? 뭐야, 이거 물이 아니었나?』
『아무런 향도 안 나기에 영락없이 물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뼈아픈 소리를.
그야 공장식 소주가 원체 이렇다 할 향미가 없는 술이기는 하지만, 이걸 면전에서 들으니 꽤 마음이 괴롭다.
'하지만, 그래서 좋은 거지.'
마음속으로 작게 웃은 내가 그들에게 건배를 권했다.
"더운 날씨에 맞춰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게 식혀봤습니다. 한 번에 쭉 들이켜 보세요. 고국에서는 꺾지 않고 한 번에 마시는 게 올바르게 마시는 방법입니다."
『흠…….』
심사위원단은 이 술을 그냥 마셔도 되는 것인가 싶은 눈빛을 서로 교환했으나, 식전 드링크를 마시는 것 정도는 대회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내 말에 따라 얌전히 물컵보다 살짝 작은 사이즈의 술잔을 입가로 가져다 대고선, 그대로 잔을 기울여 꿀꺽꿀꺽 술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일부러 혀에 술을 충분히 닿게끔 하며 마시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마실 줄 알고 있었다.
『…… 크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한잔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술을 입속으로 넘긴 심사위원단이 하나같이 보기 익숙한 반응을 보여준다. 하, 중국 쪽 술을 생각하면 그렇게 도수가 센 편은 아닐 텐데, 엄살이 좀 있구만.
심사위원단은 그대로 비운 잔을 내려놓고, 내게 말했다.
『이거 말입니다.』
좋아. 말해라. 내가 기다렸던 말을 해.
『맛이 그다지 좋다고는 못하겠군요.』
그래. 그게 바로 내가 기다린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