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요리의 마법.-1-
넓고, 밝고, 많다.
이 장소를 요약하는 데에는 그 세 단어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타원형 홀의 테두리를 따라 콘서트 무대를 좌우로 쭈욱 늘려놓은 듯 설치된 무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천장은 중심부가 높이 솟은 돔 같은 모양새. 그 아래로 사방을 가로지르는 철골 구조물 아래로 주렁주렁 매달린 기백 개의 조명은 꼭 무성한 나뭇가지 아래로 제 몸을 늘어뜨린 탐스런 과일의 향연 같다.
그리고 그런 조명 아래에 선 수백 수천을 넘어 가히 만 명은 될 것 같은 군중들.
아직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임에도 앞에서부터 차곡차곡 테트리스라도 하듯이 빈자리를 채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드문드문 굽이치는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인파人波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거기에 더해 좌우로, 아니. 9위라는 이름으로 배정받은 자리는 참가자용 무대의 양극단 중 한쪽이니 고개는 우측으로 돌리기만 해도 족했다.
시선이 향한 자리에는 우리 팀이 서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구성을 가진 가설 주방이 무대의 곡선을 따라 나열되어 있다.
그 주방을 지키는 건 다름 아닌 요 이틀 동안 경쟁을 펼친 쟁쟁한 셰프와 그 휘하의 팀원. 다시 봐도 손이 떨려오리만치 굉장한 인물들이 저렇게 도열한 모습을 보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디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푸드 엑스포.
그 3일차. 마지막 행사.
수많은 나라에서 바닷길, 하늘길을 가리지 않고 단 사흘의 행사를 위해 달려온 요리사 중, 마지막 날에 무대 위에 설 권한을 가진 이는 1할 이하.
우연인지, 기적인지, 아니면 운명인지.
그 이유가 뭐든 간에 내가 그 1할에 들어가는 요리사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증명해내야만 한다. 내가, 우리가 이 자리에 설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적어도 꼴사나운 모습만큼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내심 굳은 각오를 다지며, 슬슬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전광판 속 시계를 힐끗 쳐다본다.
시합 개시까지 앞으로 10분.
긴장하여 굳은 팔다리를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풀어주고, 거의 끝자락까지 차오른 관객석의 이동 추이를 살폈다. 음, 슬슬 출입구 쪽에서 들어오는 관객의 흐름이 드문드문 끊기기 시작하는 걸 보니 대회 시작이 임박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5분, 3분, 1분.
시간이 지나갈수록 관객의 웅성거림이 점차 소리를 높인다.
고조되는 흥분, 기대, 설렘, 긴장.
그 모든 것이 섞이고 섞여 마음속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감정의 덩어리를 눈사람마냥 굴린 끝에,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쿵!
출입문이 닫히고, 모든 조명이 꺼지기가 무섭게 단번에 입을 걸어 잠그는 관객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내리깔린 그때, 여러 줄기의 스포트라이트가 동시에 무대 위를 비춘다.
우리의 등 뒤편의 벽을 도화지 삼아 알아보기 힘든 궤적을 그리던 불빛이, 이번에는 우리 전원을 크게 우회해서 한 장소를 비추었다.
무대 중앙에 위치한 계단과 심사위원석 사이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는 그야말로 빛으로 만들어낸 빛의 징검다리. 커튼이 쳐져 있던 무대 뒤에서 걸어 나온 심사위원 일행이 그 빛의 징검다리 위를 지나쳐 심사위원석에 하나둘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마지막 차례로 나온 한 손에 큐시트, 반대쪽 손에는 마이크를 잡은 말끔한 여름철 양복 차림을 한 사회자까지.
요리사, 심사위원, 사회자. 관객.
대회를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4박자가 갖춰졌다.
대회 시작 1분 전.
다시 한번 중구난방 흩어졌던 스포트라이트가, 이번에는 사회자의 머리 위에 모여 하나의 점이 되고, 비로소 행사가 시작된다.
기대감과 초조함이 뒤섞여 땀까지 삐질삐질 나올 지경이 됐을 때, 일행 중 가장 앞으로 나서 계시던 교장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힘냅시다. 여러분."
작은 목소리, 짧은 말. 변변찮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격려.
하지만, 우리는 그걸로 족했다. 살살 떨려오던 손을 꾹 말아 쥐고,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차례 암전했던 행사장이 다시금 밝아진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낮은 밝기. 그러나 무대 위만큼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조명이 집중되어 밝기를 더한다.
시작은 무대의 중심. 첫째 날 푸드쇼 행사에서 1위 자리를 차지한 중국팀부터.
사회자가 독점하고 있던 스포트라이트가 중국팀에게로 향하고,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온 카메라의 플래시라이트가 극적인 광채를 더한다.
잠시 소외되어 있던 사회자로부터 중국팀의 소개가 흘러나오고, 그와 동시에 각 나라의 언어로 통역된 자막이 각 전광판마다 서로 다른 언어로 흘러 지나간다.
소개는 이어진다.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미국, 영국 등등.
각 나라를 거쳐, 드디어 빛이 우리에게로 쏘아져 내린다. 찬란한 조명이 우리를 비추는 그 속에서, 부디 다른 나라의 셰프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당당하게 선 모습으로 보이기를 바라며, 두 어깨와 가슴을 활짝 펴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본다.
『아, 이번 박람회의 파란을 몰고 온 돌풍 같은 팀이죠. 한국팀을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기분 탓인지, 앞선 나라들을 소개할 때보다 박수 소리가 조금 더 힘찬 느낌이 들었다.
『한국팀을 이끄는 팀장, 안영길 대가입니다! 이 자리를 찾아주신 여러분처럼 요리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분이죠! 여러분 또한 작년에 열렸던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을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세계제전의 왕자王者! 안영길 대가가 직접 이 엑스포를 찾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죠! 눈치가 빠르신 분이라면 이미 알아보셨을 겁니다. 놀랍게도! 그런 안영길 대가가 이끄는 팀의 멤버는 전원이 학생! 세계의 내로라하는 프로페셔널만이 모인 이 박람회에서, 이들은 오로지 학생과 교사의 힘만으로 개천에서 솟아오른 용과 같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야말로 수풀 속에 웅크린 호랑이처럼臥虎! 발톱을 감추고 똬리를 튼 용처럼藏龍!』
『과연 이들은 첫째 날의 기적을 다시 한번 재현할 것인가! 한식의 미래를 보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 이 팀을 주목하십시오!』
…… 어우, 야. 과하게 손발이 오글거리는 소개 탓에 폈던 어깨가 원래보다 더욱 쪼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젠장, 혹여나 요리를 망치면 그건 전부 사회자 탓이다.
***
『조리이이!! 개시이이이!!!』
사회자의 쓸데없이 뜨거운 스타트 신호와 함께, 모든 주방의 인원들은 신호탄 소리를 들은 단거리 주자가 크라우칭 스타트를 하는 것 마냥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찬혁 일행, 한국팀 또한 마찬가지.
개시 리허설을 위해 미리 이곳에 들렸던 그때. 그들을 비롯한 각 팀의 요리사들은 이미 이 주방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들의 여건에 맞추어 모든 시뮬레이션을 끝내둔 상태였다.
요리사에게 있어 주방이란 전쟁터. 주방에 들어선 그때부터 그들은 임전태세를 갖춘 병사나 마찬가지.
팀 전체가 한 몸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각 팀의 모습을 보며 사회자가 열기에 가득 찬 함성을 내지르자, 뒤이어 관객의 하나 된 함성이 메아리치듯 그 뒤를 쫓는다.
『빠릅니다! 너무 빨라요! 이토록 가까이서 보고 있는 저조차 이들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관객을 위한 해설이라지만 이 넓은 홀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분명 요리하는 데에 있어 방해일 터.
하지만 요리를 시작한 그들은 그런 소음 따윈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그런 관객과 사회자의 환호성을 압도하는 성량으로 서로의 진행 상황을 체크 하며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많고 많은 게 요리 중에서, 하필이면 간장게장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찬혁 일행은 그야말로 마라톤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 질주할 기세로 스퍼트를 올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 흡!"
찬혁은 거칠게 입을 열고 튀어나오려는 호흡을 억지로 다문 입 사이로 끊어가며 내뱉었다. 제한시간 한 시간. 그 60분을 전력으로 달리기 위해서는 체력안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체력고갈로 조리 과정에 실수라도 했다간 그걸로 끝.
아무래도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는 않은 모양인지 살짝 숨이 찼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찬혁은 팔을 높이 들어 올려 교차오염이 가장 적은 조리복의 어깨 부위로 눈가를 타고 흐르던 땀을 닦아냈다.
'찜기 준비 ok, 쌀 준비 ok.'
오늘, 찬혁이 주도하여 맡은 요리는 그가 팀에 제안했던 간장게장과 쌀밥.
쌀밥을 쫀득하면서도 너무 차지지 않게 짓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쌀의 상태, 살을 씻는 방법, 사용한 물의 종류와 온도, 그날의 온도와 습도, 가열한 시간, 뜸을 들인 시간, 심지어 그 장소의 기압에 이르기까지.
정말 제대로 된 밥을 만들기 위해선, 이 모든 것을 숙지한 숙련자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공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찬혁은 그 과정 중 일부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맡겨 버린 것이다.
'너만 믿는다.'
바로 찬혁이 이 대회에 참여한 주된 요인인 이것, 꾸꾸 전기밥솥에게.
일부러 관객석과 카메라 앵글의 베스트 포지션을 상정하여 선정한 위치에 떡하니 놓인 전기밥솥. 그 속에 불린 쌀을 그대로 집어넣어 취사버튼을 누르는 찬혁의 모습을 본 관객과 사회자, 그리고 심사위원이 경악한다.
『아아! 한국팀! 여기서 실수가 나오나요! 일본팀은 전통 돌솥과 풍로, 참숯을 이용하여 밥을 짓고 있는데! 한국팀! 망설임 없이 전기밥솥을 사용합니다!』
사회자의 경악 섞인 해설. 그 순간, 모든 전광판이 찬혁의 방금 행동을 그대로 되감아 보여준다. 일부러 수돗물이 아닌 말통에 챙겨온 물만을 사용하여 공들여 쌀을 씻는 곳까지는 모두가 대단한 솜씨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하필 마지막 순간에 등장한 전기밥솥을 본 대부분의 사람이 인상을 찡그리며 야유를 퍼부었다.
『에이! 저게 뭐야!』
『일본 좀 봐라! 저렇게 전통 방식으로 공들여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웬 전기밥솥이야?!』
『하여간 어린놈들은 전자기기가 항상 최고인 줄만 알지! 나 때는 말이야!』
기껏 잘 해놓고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욕을 먹는 불합리한 상황.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흥,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늙은이 같으니. 이젠 전통이 한물간 시대가 됐다. 그나저나, 류찬혁 저 친구. 생각보다 우리 밥솥을 제대로 다루는데.'
고영태. 찬혁 일행에게 광고를 맡겼던 꾸꾸 전자의 과장인 그는 방금 찬혁이 보여주었던 자그마한 행동거지를 움찔거림 하나조차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감탄.
찬혁은, 고영태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완벽하게 저 밥솥을 다루고 있었다.
꾸꾸 2020KM-10의 특기할 만한 기능 중 하나인 내외 완벽차폐기능. 그 속에는 꾸꾸 전자에서 온갖 인력을 갈아내어 개발한 특수차폐 기술의 정수가 녹아들어 있다.
밥솥의 외부에 붙은 센서가 읽은 대기 정보를 밥솥 내부의 시스템이 검토하고 판단하여, 언제 어디서든 꾸꾸의 연구진이 개발한 최고 품질의 밥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자동으로 내부에 조성하며, 알아서 취사 시간을 조절한다.
즉, 해당 제품에서 정해 준 쌀과 물의 비율을 정확히 맞추면 맞출수록 완벽한 밥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방금 찬혁이 한 행동이 딱 그러했다. 그야말로 기계처럼, 모든 것을 완벽히 조율하면서도 쌀과 물의 퀄리티를 최상급으로 맞추어 제품의 퍼포먼스를 극대화한 것이다.
'고작 제품을 실제로 받아본 지 하루 만에 사용법을 저만큼이나 터득했다. 이건가.'
거기에 더해 대회장의 모든 전광판에 광고 제품을 노출 시키는 저 능력이란!
찬혁의 천성적인 어그로꾼으로서의 재능에 고영태가 감탄하고 있던 그때, 찬혁은 이 대회에 있어서 가장 난항이 예상되는 요리를 눈앞에 두며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쯧."
간장게장. 분명 맛있지만, 잘못 만들었다간 심사위원들에게 그저께 식중독 트리오가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게끔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요리.
다른 팀원이 솔로 박박 닦아 전달해 준 참게를 구석구석 꼼꼼하게 다듬은 찬혁이, 각오를 굳히고 참게가 가득 담긴 볼을 들어 올렸다.
'간장게장, 평균 조리 소요시간 약 보름.'
보름에 달하는 조리시간을, 단 한 시간 이내로 줄이는 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
'그렇다면 해줘야지.'
찾아왔다. 찬혁이 마법을 부릴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