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12화 (112/403)

112. 스타 셰프(진).-4-

1부 행사가 끝나고 2부 행사가 시작되기 전. 참가자의 준비시간을 겸한 일부 구역의 임시 폐장이 진행되고 있을 때.

어제 참가자 역할을 하며 익혀둔 참가자용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긴 나와 창민이는 잠시 후 있을 시연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던 교장 선생님 일행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도중에 길을 막던 운영위원 한 사람은 적당히 어제 일을 부풀려서 참가자 일행이란 말로 제꼈다.

"해외에서 말이 통하면 편하긴 하네."

"그치? 너도 지금 많이 공부해 놔. 나중 가면 공부할 시간도 없을걸."

"…… 진짜 가끔 보면 우리 할아버지나 아빠처럼 말한단 말이지."

하지만 정말이다. 나중에 일하면서 공부하려 하면 진짜 몸이고 정신이고 남아나질 않으니, 공부는 할 수 있을 때 해두는 게 좋다.

'내 경우에는 아예 맨땅에 헤딩이었으니까.'

현지에서 다져진 실전 압축 회화도 나쁘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체계적인 부분을 먼저 배우는 건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뭐,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넘기고.

갑작스레 대기실로 찾아온 나를 보고 놀라는 3학년 선배 일행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들 뒤편에 앉아 레시피와 도구를 점검 중이던 교장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류찬혁 학생? 창민이도 같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처음에는 놀란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뜬 교장 선생님이었으나, 이내 그 시선이 평소처럼 인자한 빛을 담아 우리를 바라봤다.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교장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 그냥 온 것 같지는 않네요. 무슨 일이라도?"

"그러니까 그게……."

뭔가 눈치를 채신 듯 의아하단 표정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시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 답하려던 나였으나, 그 시도는 누군가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뭐야. 아침에 그렇게 가더니."

"벌써 우리가 보고 싶어졌어?"

"에이 말을 하지. 그냥 집 갈 때까지 우리 숙소에 있어도 됐는데."

더 말할 것도 없이, 이전 식중독에 걸렸던 세 명의 선배들이다. 이쯤 되면 그냥 식중독 트리오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잘 됐다. 졸업 전에 그럴듯한 별명 한두 개쯤은 있어야지.

식중독 위험 수치 그래프에서 따와서 식중독 그린, 옐로, 블랙. 좋네. 바닥에는 더 바닥이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는 별명이다.

"너네는 입 다물자. 제발."

"진짜 한국 돌아가서 봐. 2학기를 뜬눈으로 맞이하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게 해줄게."

한석준 선배와 최여린 선배의 활약으로 끌려가는 세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준 뒤, 다시 교장 선생님에게 시선을 돌린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내 용건을 전달했다.

"저기, 교장 선생님.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걸리는 내용인데요. 혹시 복도에서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그래요. 갑시다."

다행이다. 교장 선생님이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라 살았다.

경쟁하는 건 아니라지만 곧 무대에 올라갈 선배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싫어도 부담이 될 테니까. 안 그래도 지금도 아닌 척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 아니, 저 트리오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저게 어딜 봐서 긴장한 사람의 태도야.

작게 한숨을 내뱉은 나는 먼저 복도로 나가시는 교장 선생님의 뒤를 따르며 한숨을 내뱉었다.

***

"광고라구요? 꾸꾸에서요?"

"예."

고영태 과장이 소개해 줄 때 받은 명함을 드리며 방금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전달 드리자, 교장 선생님은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명함을 받아들고 앞뒤로 살피셨다.

"하반기 출시 예정인 신제품의 마케팅이라……."

"예. 카탈로그 스펙을 살펴보니까 성능도 굉장히 훌륭하고 이미지가 나쁜 기업도 아니니까 이럴 때 인지도를 잘 쌓아두면 선배들이나 학교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확실히, 내일 대회 때 어떤 과제가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류찬혁 학생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나쁠 건 없겠네요."

"예? 아, 예."

묘하게 교장 선생님의 나를 향한 신뢰가 굉장히 깊어진 느낌이었지만, 일단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끼고 턱을 괸 채 시선을 내리까는 교장 선생님. 깊게 생각에 빠진 선생님이 이내 생각 정리를 마치신 듯 고개를 치켜세웠다.

"이건 분명 류찬혁 학생한테 온 제안이라고 했죠?"

"예. 그게 이유가 좀……."

"아하하. 알아요. 헤어진 뒤에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었거든요."

"아, 아하하……."

나이가 늙어 그런 방면에는 밝지 않다며 웃는 교장 선생님 앞에서 나 또한 무안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그러면 고태영 팀장…… 광고주가 원하는 조건은 두 가지군요. 내일 대회에서 자사 제품을 사용해 경기를 치러줄 것. 류찬혁 학생이 팀원으로 함께할 것."

음. 핵심을 콕 집은 정리였다.

하지만 괜찮은 걸까? 식중독 트리…… 아니, 선배들도 몸 멀쩡히 돌아온 판국인데 그 팀에 또다시 내가 끼어도?

나의 근심 섞인 질문에 교장 선생님은 웃으며 답했다.

"물론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예?"

허.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인데.

아무리 한 차례 팀웍을 맞췄다고 해도 반년. 아니, 멤버 변화가 없었다는 3년 동안 함께 팀으로 활동해온 3학년 선배들보다 나을 리가 없다. 그런 상황에 내가 들어가면 민폐가 되진 않을까 하는 게 내 걱정 중 하나였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마 류찬혁 학생도 잘 알겠지만, 일정 수준에 이르면 기본적인 협동력이라는 게 생기니까요. 대회반 여러분을 가르치는 게 제 소관이니만큼, 여러분 실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괜찮을 겁니다."

확실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물론 어느 주방에 신입으로 들어간 경우엔 그 주방에 익숙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숙련도 차이가 있겠지만, 이렇게 아예 모두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주방에 들어섰을 때에는 각자의 실력만 출중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제법 손발을 맞출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떨떠름한 기분을 채 떨쳐내지 못한 나를 위로해 주려는 셈인지, 교장 선생님이 답지 않게 농담을 건넸다.

"뭣보다 광고주가 원하는 대전제를 저희가 나서서 깨트릴 순 없으니까요."

"광고주요?"

하긴, 저쪽이 부탁한 건 시연회 겸 바이럴 마케팅 광고모델 역할이니 광고주라는 말이 꼭 틀린 건 아니겠다.

"이럴 때 힘내라고 대회반이 있는 거예요. 대회반 얼굴이 널리 알려지면 그만큼 우리 학교의 인지도에도 도움이 되니, 싫어도 그러려니 하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 물론 류찬혁 학생이 팀으로 합류하는 건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하……."

교장 선생님 입에서 흘러나온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에 무심코 헛웃음이 흘렀다. 맞는 말이다. 대회반 자체가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대신 학교 이름 알리라고 있는 곳이니까.

"그럼……."

"예. 우선 2부 행사가 끝난 뒤 3학년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 직접 찾아뵙도록 하죠. 혹시 나중에 시간이 나면 고영태 과장님께 전달해 줄 수 있겠나요?"

"아, 예. 물론이죠."

교장 선생님이 돌려준 명함을 받은 뒤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 선생님 또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다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셨다.

닫힌 문 앞. 단둘이서 덩그러니 남은 나와 창민이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이거, 묘하게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솔직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 별로 할 생각 없었는데.

"…… 이거, 규정 괜찮나?"

난 어디까지나 대리 선수였을 뿐, 정규 참가자가 아니기에 멋대로 이런 결정을 내려도 되는 건지 걱정이 앞섰다.

그런 나를 보며, 창민이 녀석이 갑자기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이거 봐봐."

"?"

대회 행사 안내 팜플렛. 난 행사장 지도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기에 건들지도 않았던 것인데, 이 녀석은 용케 챙겨 다니고 있었던 듯 싶다.

"너 있잖아. 아까 그 아저씨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

"어? 어. 그랬지."

"근데 틀렸어. 나도 이상해서 봤는데, 아무래도 착각은 네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소리야?"

녀석이 건네준 팜플렛은 어느 한 페이지에서 펼쳐져 있었다.

선수 소개. 각 나라에서 온 셰프와 쿡의 이름이 중국어와 자국어로 표기된 코너. 마침 눈이 닿은 곳에 있던 태극기 아래 아홉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

…… 아홉?

안영길, 한석준, 최여린, 김해중, 조유빈, 이행찬.

교장 선생님에 더해 3학년 선배들 이름은 여기서 끝인데, 세 사람의 이름이 더 붙어 있다.

류찬혁, 안효민, 백예은.

…… 뭐지? 왜 대리 참가자였던 우리 이름까지 쓰여 있는 거지?

보고 또 봐도, 손에 든 팜플렛에 적힌 이름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너네 대리 참가자로 올라간 게 아니라 정식 참가자로 들어간 것 같다."

아니 대체 왜?

경악 섞인 내 눈빛에 담긴 질문에, 창민이 녀석은 나한테 묻지 말라는 듯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

약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모든 준비가 끝난 무대 위에 올라간 각 나라의 팀들은 서로의 위치에서 슬슬 조리를 시작하려는 태세에 들어가고 있었다.

어제 푸드쇼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총 백여 개에 달하는 부스는 고작 하룻밤 새 전부 사막의 신기루마냥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는 수천의 벤치와 상위 열 개의 팀이 올라가기 위한 무대로 탈바꿈했다.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보던 남자, 같은 회사 사람에게 흔히 박 대리라고 불리는 박인철은 옆에 서 있던 고영태에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이야, 여기가 정말 어제 그 행사장 맞습니까? 그 많은 걸 하룻밤 새 깔끔하게 정리하다니, 대단하네요."

"그게 이 나라에 얼마 없는 장점 아니겠냐. 사람이 많으니 일손도 많지."

"하긴 그렇겠네요. 그 사람들 임금 주는 데만도 돈깨나 썼겠어요."

글쎄. 그렇게 일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임금이나 줬을지. 아직 이 나라의 실상을 잘 모르는 후배의 어리숙한 모습에 고영태는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걔네만 놔두고 와도 괜찮을까요? 아직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들인데."

"행사 때문에 이쪽으로 사람이 꽤 빠졌을 테니 당분간은 괜찮아."

"정말 괜찮을지……."

"아니면 뭐, 교대 시간 반납하고 부스로 돌아갈래? 그렇게 불안하면 직접 가서 보면 되지 않겠냐."

"아닙니다! 저는 부하들을 믿습니다!"

"…… 그래."

박인철의 당돌한 대답에 고영태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어수룩해 보여도 4개 국어로 회화가 가능하며 제법 실적도 괜찮은 일 잘하는 남자의 표본이었지만, 가끔 이럴 때마다 보이는 얄미운 구석이 묘하게 사람 냄새가 나 마음에 들었다.

무대 위에 조명이 잠시 암전되고, 어느새 그 위로 올라선 사회자가 다시 조명이 무대 위를 밝힘과 동시에 행사의 시작을 알린다.

어제는 각 팀의 순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던 전광판이, 지금은 화려한 카메라 워크와 함께 여러 팀이 조리를 시작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확실히, 행사를 열심히 준비한 티가 난다.

'저 촌스러운 자막만 빼면.'

"오. 오!"

각 팀에서 치솟는 불꽃과 현란한 칼놀림에 단박에 매료된 박인철이 요상한 환호성을 냈다. 보러 오자고 한 건 자기지만, 어째 더 즐거워하고 있는 건 부하인 것 같아 고영태가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넣는다.

"조용히 좀 해."

"아, 옙. 죄송합니다."

사실 주변의 소란과 스피커로 들려오는 사회자의 시끄러운 중국어에 비하면 이 정도는 소음 축에도 끼지 못할 소리였으나 박인철은 얌전히 고영태의 말대로 목소리를 죽였다.

5분, 10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각 팀의 음식 전시대에 하나둘 접시가 늘어간다.

과연 세계적인 셰프와 그들이 이끄는 팀다운 솜씨.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학생의 신분으로 전혀 꿇리지 않고 놀라운 팀웍을 발휘하여 음식을 만들어나가는 한국팀의 모습을 보며 고영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면 내일 행사도 기대해볼 만하겠는데."

"내일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말씀하셨던……."

박인철은 2부 행사가 시작되기 전, 고영태가 들려주었던 광고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겼다.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광고 일정은 어차피 이미 찍기 시작한 것도 있고, 해외도 천천히 일정을 잡아가면 될 텐데 왜 벌써…….'

물론 상사의 결정이니만큼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 솟는 의구심은 도저히 가시지 않았다.

"박 대리."

"옙."

"네 생각은 어떠냐."

"…… 잘못 들었습니다?"

"방금 말한 거 말이야. 왜, 쓸데없는 것 같단 생각 안 들어?"

"예? 아, 아닙니다."

그리고, 고영태는 이미 그런 박인철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1차원적인 것만 놓고 보면, 분명 자신이 생각해도 그다지 비용 대비 효율이 좋은 광고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박인철은 아직 그의 속내를 모르고 있다.

고영태는 물론 제품 자체에 대한 광고 효과를 노리고 있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심조리고등학교와의 연결고리'였다.

성심고는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수많은 요식업, 숙박업을 근간으로 삼는 기업에서 투자할 기회를 엿보는 곳. 성심고와 제대로 된 투자채널이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기업 이미지에 상승효과를 준다.

그런 성심고와 이어질 채널에 작은 길을 트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영태가 노리는 바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팀원 자체의 수준 차이가 적게나마 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 내일 대회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솔직히, 고영태는 저들이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보고 있었으니까.

대회에서 높은 성적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아마 이 광고 계획이 체결되더라도 돌아오는 리턴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좋다. 체결하는 것 자체가 미래의 이득을 위한 교두보가 될 테니까.

'…… 하지만.'

하지만 만약, 내일 대회에서 3위, 아니. 5위 정도의 성적이라도 거둘 수 있다면…….

'…… 투자 대비 엄청난 이득을 보겠는데.'

거기다 일본팀까지 다시 한번 앞지를 수 있다면 효과가 배가 되겠지.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긴 했지만.

실없는 웃음을 짓는 고영태를 보며, 박인철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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