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스타 셰프(진).-3-
갑작스런 발언에 내가 충격을 받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영태 과장은 온갖 나라의 언어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회장을 곁눈질하고는 내게 말했다.
"여기서는 조용히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자리를 옮기시죠."
"아, 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그 말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우선 대화는 나눠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럼 난 이만."
"어디 가."
"아 왜. 보니까 할 이야기가 있는 건 너 혼자 같던데."
"일단 있어 봐."
몰래 발을 빼려는 창민이 녀석을 붙들어 다시 옆으로 데려온 뒤, 내게 등을 돌리고 앞서 걷기 시작한 고영태 과장의 뒤를 따르며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업 이야기라……. 대체 무슨 소릴 하려는 거지?'
행사장이 넓은 게 나에게 있어선 다행이었다.
고영태 과장이 말한 '조용한 장소'로 가는 길이 쓸데없이 긴 덕에 생각할 시간이 제법 생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긴 했지만, 우선 가장 큰 의문은 하나였다.
'뭐가 이렇게 갑작스러워?'
기업이 인터넷에 작은 광고 하나만 올린다 하더라도 최소 달 단위의 시간을 투자한다. 근데 그걸 갑자기 엑스포에서 처음 만난 미성년자와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든다?
'좀 쎄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 상황 자체가 굉장히 의심스럽다. 저 사람이 정말 꾸꾸의 사원이 맞기는 한 건지, 내가 지금 사기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지만 나도 허투루 사회생활을 한 건 아니다. 나름 글로벌하게 놀았던 만큼 내 나름대로 아는 것이 있다. 뭣보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지식은 다름 아닌 미래에 대한 지식이지만.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며 침착함을 되찾았을 때쯤, 드디어 우리는 그나마 한적한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맞나?"
"카페는 카페지. 일단은."
사실 카페라고 해봤자 기업에서 출자한 카페 부스 앞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게 전부인 황량한 공간이기는 했지만, 중국답지 않게 정말로 한산한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요즘 들어 워낙 시끄러웠으니.'
사람이 조금 많아야지, 인구 밀집도가 너무 높아 귀에 이명이 생길 지경이던 차에 이렇게 조용한 공간에 오니 마음까지 깨끗하게 닦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잠시 고요함을 즐기고 있자니, 어느새 우리 몫의 음료까지 사온 고영태 팀장이 우리 맞은편에 앉으며 웃었다.
"장소는 마음에 드시나요? 어제 쉴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인데."
"예. 음료수까지 대접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저야 시간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본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우리 둘에게는 아이스 밀크티. 음, 아마 어린 학생들이라 이런 메뉴를 선택한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카페에서 마시는 건 단것보다 쓴 게 취향이라 얕은 아쉬움이 들었다.
'뭐, 쓴 것보다 좋아하는 건 남이 사주는 거지만.'
너무 짠돌이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제대로 한탕 벌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여유가 많지는 않은 몸이라.
"어제 참가하셨던 행사에서 보여주신 솜씨……."
"처음 참가자 목록을 보고 참가자가 대부분 학생이란 사실에……."
"저 대단한 셰프들 사이에서 그토록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역시 성심조리고등학교의 대회반 답다는 말밖에……."
행사장에 빼곡하게 설치된 에어컨으로도 좀처럼 식지 않던 열기를 얼음 가득한 밀크티를 쪽쪽 빨아 마시며 차게 식히는 동안, 고영태 과장은 무어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가며 어제 우리가 보여준 모습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아, 죄송합니다.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그토록 말을 늘어놓은 게 무안한지 빨대도 없이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고영태 과장. 장장 1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말했으니 당연히 목이 타겠지. 무슨 교장 선생님 훈화 보는 줄 알았다. 우리 교장 선생님이야 말을 짧게 끝내는 편이긴 하지만.
'흠…….'
일단 태도만 살피면 제법 호의적이다. 우리 성과를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도 진심으로 보이고. 다만, 칭찬이 진심이더라도 그 근저에 깔린 마음까지 진심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담담한 얼굴로 미심쩍은 시선을 숨기며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고영태 과장은 헛기침을 하며 넥타이를 고쳐맸다.
"궁금하신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너무 사적인 것만 아니면 얼마든 대답해 주겠다며 농담을 섞은 그가 웃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영태 과장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예. 아저씨가 아닌 것만으로 감지덕지입니다. 형이라고 부르셔도…… 하하, 농담입니다."
웃는 낯으로 뒷말을 얼버무리는 고영태 과장을 우리는 황망해진 시선으로 쳐다봤다. 뭐지 이 사람. 진심이고 뭐고 정말 그냥 어벙한 사람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이는데, 저 나이에 과장을 달 정도면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아니야.'
어색해진 분위기 속. 잠시 끊긴 대화에 굳은 웃음으로 화답한 내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저희가 학생이라 시간 여유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혹시 방금 말씀하신 사업 이야기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싶네요."
"아, 여러분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오.'
본론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묘하게 정감 가던 푼수끼가 달군 쇠에 떨어뜨린 물방울처럼 단박에 증발하고, 그 자리를 이지적이고 냉철한 눈빛이 대신한다.
"류찬혁 선수."
그 눈빛에 덩달아 내 눈빛도 싸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내 인생에 그런 속편한 이야기는 보통 있을 수가 없다 이거야.
각오를 굳히고, 그를 마주 바라봤다. 고작 몇 초가 수십 분은 되는 것 같은 긴장감 속. 고영태 팀장이 입을 열었다.
"저희 회사 신제품의 광고 모델, 해볼 생각 없으십니까?"
"……광고 모델……이요?"
"예. 저희 신제품. 2020KM-10의 광고 역할을요."
어라? 아닌가? 혹시 이제야 온 건가? 내 인생의 황금기가?
***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글쎄. 솔직히 너무 속 편한 이야기지 않나 싶은데."
서로 업무와 집합시간을 이유로 고영태 팀장과 헤어진 뒤 행사장으로 돌아가는 길.
우선 잠시 다른 이들과 상담할 시간을 달라며 자리를 물리긴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고영태 팀장이 했던 이야기가 줄곧 맴돌고 있었다.
'2020KM-10이라…….'
고영태 팀장의 제안은 간단했다.
푸드 엑스포 마지막 날에 열리는 행사인 요리 대회에서 해당 제품을 사용하여 대회에 출전해달라는 것.
내일 있을 요리 대회는 사실 그렇게 대단한 대회는 아니다. 아니, 그 안에 걸린 명예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대단하지만, 규모나 기획 면에서 그렇게 대단하게 볼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도 어떻게든 10위 안에 들어간 덕분인가?'
뭐, 대회 기획은 그리 볼 것도 없는 주제다.
평범하게 심사위원이 있고, 상위 10위 팀이 각각 주어진 주제를 갖고 요리를 만들어 심사 받고, 점수로 등수를 판가름하는 게 끝.
'사실 다들 하기 싫겠지.'
이게 좀 애매한 것이, 이미 상위 10위권 이내에 진입한 팀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본인의 경력에 획을 그을 수 있는 사건이고, 각 나라의 홍보라는 역할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열 팀 사이에서 순위를 나눈다?'
어감이 다르다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다.
백여 개의 팀 중에서 10위.
열 팀 중에서 10위.
이미 충분히 잘한다는 걸 증명했는데 그 대회에서 최하위라도 했다간 힘겹게 쌓은 이미지가 훼손될 수도 있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나서기 꺼려진다.
'대신 거기서 3위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 로또기는 하지만.'
이미 룰렛의 공이 들어갈 색을 맞추어 배당금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받은 배당금을 몽땅 숫자 한 칸에 걸어 버리는 건 솔직히 말해 멍청한 짓이다. 이 경우는 반쯤 강제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다들 최선을 다하긴 하겠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그냥. 내일 대회랑, 아까 들었던 이야기."
쭉 말도 없이 계속 걷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안창민이 어깨를 두드렸다.
"광고……라고 했지? 근데 광고는 보통 티비에서 하는 거 아냐? 연예인들 나와서."
"보통은 그렇지."
"보통은? 그럼 이건 뭔데."
"……글쎄."
확실히, 평범한 광고는 TV나 영화, 혹은 올튜브에 짤막한 클립 같은 것으로 넣어서 하는 게 보통 방법이다.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서 유명한 연예인을 기용해서 화면빨 죽이게 찍는 것.
그런데 굳이 그런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쓴다. 어째서일까.
'꾸꾸 쯤 되는 회사가 그럴 돈이 없진 않겠고…….'
노리는 건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일까.
가끔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살펴보며 확인한 결과, 확실히 지금 푸드 엑스포를 겨냥한 대중들의 주목도는 이상할 정도로 높았다.
일종의 밈이 된 건지 내 모습만 찍힌 영상 댓글에는 '쌍수좌', '철판까지 반으로 나눠 쓰는 참쌍수' 같은 댓글이 수두룩했고.
'그러고 보니 주아 걔가 보냈던 톡은 뭐였지.'
반으로 가르면 안 된다고? 녹즙은 무슨 소리야. 가끔 보면 이상한 소리를 할 때가 많은 녀석이라 도통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쉽게 말하자면 내 얼굴을 팔아먹으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뜻이다. 이미 나름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어떻게 퍼트릴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문제는 내가 이걸 먹어도 되느냐는 건데…….'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냥 거절하기에는 좀 아깝지 않아?"
창민이의 말이 맞다. 워낙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에 제대로 된 서면 같은 것도 없었지만 그쪽에서 꺼낸 계약 조건 등을 생각하면 그냥 넘기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있다. 돈도 돈이지만, 뭣보다 인지도라는 게 한 번 겹쳐지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가는 것이니까.
'2020KM-10 모델이 앞으로 쌓을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이 기류에 타는 게 정답이긴 해.'
성공은 성공을 불러오는 법. 모르긴 몰라도 이 기획을 제대로 성사시키면 분명 득이 될 것이다. 다만, 이걸 먹으려면 내 앞에 있는 굉장히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해야 한다.
"하고 싶긴 하네. 그런데……."
"그런데?"
"그 조건, 들어주려면 내가 참가자여야 하잖아."
"……아."
그 팀장님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애당초 난 참가자가 아니거든. 임시 대타일 뿐이지. 이제야 겨우 참가자에서 관객으로 돌아온 사람한테 무슨 부탁을 하는 거람.
"……어쩌지?"
"……일단 교장 선생님한테 말씀이라도 드려보자."
아쉽지만 내가 못 먹는다고 남한테 갈 밥그릇까지 깨부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마, 3학년 선배들한테도 제법 나쁘지 않은 기회가 되겠지. 거기에 나한테까지 기회가 돌아오면 더 좋겠고.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만큼은 평범한 관객으로 남고 싶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