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04화 (104/403)

104화. 4가지.-3-

고안하고, 실제로 만들고, 또 고안하고 만들어보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내가 주장한 네 가지 요소와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신 조리의 간편성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를 갖춘 메뉴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우리였으나, 도착지를 딱 한 발짝 앞둔 상태에서 좀처럼 모자란 요소 하나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유지력이라는 걸 지키기가 되게 빡쎄네.'

뜨거워도, 미지근해도, 차가워도 맛있는 요리라는 건 기본적으로 굉장히 이치를 벗어난 요리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안다. 알지만, 그게 가능해야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

"메뉴 형태는 거의 윤곽이 잡혔는데……."

"여기서 더 이상 방법이 안 떠오른단 말이지."

고민에 빠진 일행 사이에서 근심에 찬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어진 연습에 피로가 쌓인 탓인지 좀처럼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우리. 끝내 그 상황을 보다 못한 교장 선생님이 다들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말에 한석준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 일단 다들 씻고, 잠깐만 휴식하자."

"옙."

베란다로 향하는 창문을 넘어 조금씩 제 영역을 넓혀오는 햇빛의 족적에 잠시 눈살을 찌푸린 한석준 선배가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여름이라 그런가 해가 빠르네."

"그러게요. 이제 다섯 시 막 넘었는데 벌써 해가 떴네요."

먼저 자리를 떠나신 교장 선생님의 뒤를 이어 자리를 파한 우리들.

남녀로 갈라져 서로의 방으로 가는 길, 함께 걷던 한석준 선배의 넋두리 같은 말에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내가 대꾸하자 선배는 성대가 짓눌린 것 같은 이상한 괴성을 뱉고는 안 그래도 헝클어진 머리를 마구 쥐고 흔들었다.

"아아, 얼마 안 남았네."

"긴장되세요?"

"하하,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 너야말로 괜찮아?"

"저야 뭐,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지만요."

부담감도 부담감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엑스포의 개막식은 9시. 1시간 정도 개막식 행사를 치른 뒤 잠깐의 준비 시간을 갖고 11시부터 푸드쇼 행사가 시작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동시간이나 식사 시간 등을 따져보아도 끽해야 두세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 과연 우리가 미처 풀지 못한 문제를 고작 그만한 시간 안에 해결해낼 수 있을까?

"뭐, 너무 걱정하지 마."

"예?"

상념에 빠진 채 그저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한석준 선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탈의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심지어 손에는 제대로 옷가지와 세면도구까지 들려 있는 것이, 내가 정말로 깊게 고민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까 연습할 때도 그렇고, 너무 살벌하게 하는 거 아니냐? 누가 보면 우리가 아니라 네 인생이 걸린 것 같아. 노력도 좋은데, 너무 자기 깎아가면서 하는 건 안 좋아."

"죄송합니다. 생각이 좀 많아져서……."

"네가 죄송할 게 어디 있어. 오히려 미안한 건 우리야. 나름 팀장이란 놈이 애들 관리도 똑바로 못 해서 이 사달이 난 거 아니겠냐. 그러니까 괜히 너 혼자 너무 고민 안 해도 돼. 못 하면 뭐, 우리 책임이지."

"예?"

이 엑스포에 말 그대로 미래가 걸려 있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보기엔 너무 초탈한 대사에 벙찐 얼굴로 한석준 선배를 바라봤다.

헝클어진 더벅머리. 키는 크지만, 살짝 마른 데다가 두꺼운 뿔테 안경으로 가려진 주눅 든 표정 탓에 믿음직한 인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

그 사람이 사물함에 옷가지를 정리해 밀어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 걸린 건 너희 미래가 아니라 우리 미래니까. 우리 탓에 후배까지 고생하다 탈나면 선배 체면이 뭐가 되냐. 이제 와서 어떻게 될 만큼 남은 체면도 없는 것 같긴 하다만."

"……."

"지금 병원 신세 지고 있는 녀석들도 너무 나무라진 말아주라. 그놈들도 이번에는 반성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한석준 선배의 얼굴은 평소의 나약한 표정 대신, 어딘가 태평하면서도 차분함이 감도는 모호한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은 그보다 나이가 어린 내가 이런 말을 하자니 좀 이상한 느낌이긴 하지만…….

'한석준 선배, 뭔가 나이에 안 맞게 어른스럽네.'

그래도 덕분에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조금 빠진 느낌이 났다. 그래, 지금은 머리를 좀 식히고 고민은 잠시만 미뤄두기로 하자.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짧은 휴식을 만끽하고 나니, 일행 전원이 한 자리에 다시 모일 때가 되니 어느새 분침이 시계를 일주一周해 있었다.

'왜 시간은 느리게 가길 바랄수록 빠르게 흐르는 걸까.'

답지 않게 철학적인 의문이 드는 것도 조금은 머리가 식은 덕분일까. 사람이 너무 전력질주만 하는 것도 좋지 않은 법이기는 하지.

교장 선생님은 우리가 다 모인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미소를 보이며 말씀하셨다.

"다들 아침식사를 하러 갑시다."

"식당이 벌써 문을 여나요?"

"원래는 조금 더 나중에 여는데 오늘은 엑스포 개막일이라 빨리 연다나 봐."

"호."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는 건가. 괜히 공식적으로 제공된 숙소가 아니구나.

그렇게 방을 나서서 식당으로 가는 길목,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저기서 외국인의 모습이 눈에 띈다. 무릇 숙소의 직원으로 보이는 중국인만이 아니라 백인, 흑인, 황인을 가리지 않는 수많은 국가의 사람들.

"저 사람들, 다 참가자겠지?"

"그렇겠죠."

효민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참가자용 숙소니까 당연히 여기 묵는 사람들은 전부 참가자라고 보는 게 옳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나라의 사람을 보니 새삼 푸드 엑스포가 얼마나 큰 행사인지 실감이 된다.

뷔페 형식의 넓은 식당. 빈자리를 찾아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이거, 생각보다 익숙한 얼굴이 많이 보였다.

'저 사람, 분명 터키 출신 셰프인…… 오, 저 사람도 있네?'

방송이나 잡지, 인터넷 등지에서 가끔 보던 유명한 셰프들이 마치 빨간 줄무늬 스웨터를 입은 안경잡이 아저씨처럼 인파 속에 섞여 있는 모습에 살짝 놀랐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선배들도.

"와아, 확실히 크기는 큰 축제구나."

"나 저 사람 직접 보는 거 처음이야……! 소금 퍼포먼스 직접 보고 싶다……."

"우리는 연 없을걸요."

"으으. 하는 수 없지.…… 지금 가서 사인 해달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하지 마라.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야지."

"네엡, 팀장님."

휴식을 한 덕분인지 다들 아까보다 훨씬 풀린 분위기였다. 밤새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으니, 지금은 이렇게 느슨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나저나 얘는 또 어디 갔대."

"누구, 예은이? 아까 밥 가지러 갔어."

"…… 빠르네요."

"다녀왔어."

"아니 진짜 빠르네?!"

자리 잡은 지 고작 5분도 안 지났는데 두 손 가득 음식을 담아온 백예은을 잠깐 질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다시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제법 메뉴가 다양하고, 퀄리티도 괜찮다. 조식이라 그런지 가벼운 메뉴 위주로 짜인 식단이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먹으면 가벼운 것도 더부룩해질 것 같다.

"무슨 음식을 그만큼이나 퍼왔냐."

"배고픈걸. 밤새 간만 봤더니 괜히 배만 고파졌어."

"…… 그러냐. 많이 먹어라."

"응!"

중국에서 흔히 아침 식사 메뉴로 쓰이는 바이저우, 젠빙, 샤오롱바오 같은 걸 가져온 거야 이해하겠지만 아침부터 탕수육은 좀 오버지 않은가 싶은데.

안 그래도 중식은 기름을 많이 써서 아침 식사 메뉴도 더부룩한 게 종종 있는데, 그 와중에 튀김 요리까지 들고 오다니…….

저걸 보니 회귀 전 중식당에서 일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아침에 출근하면 전날 밤에 남은 양념 안 묻은 탕수육을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다시 튀겨서 아침으로 먹곤 했었지.

직원 사이에서는 농담 삼아 재탕수육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던…….

"…… 어?"

잠깐만, 지금 뭔가 중요한 키워드 하나가 머리를 스친 느낌이 들었다.

탕수육, 튀김, 재탕.

"…… 식은 걸, 데워서."

다른 일행이 각자 음식을 가지러 떠난 자리에서 홀로 앉아 있던 나를 백예은이 불렀다.

"혁아, 뭐해? 밥 안 먹어?"

"…… 야, 백예은."

"응?"

"고맙다."

"…… 뭐?"

네 덕분에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그러나 백예은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젠빙을 한 입 크게 베어 물 뿐이었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 제8회 세계 음식 박람회! 지금부터어어! 개막을 선언합니다!』

─퍼어어엉!

풍선에 매단 현수막이 바람에 실려 드높이 뜬 광장에서 우렁찬 뇌명과 함께 터져 나간 폭죽이 새파란 하늘을 도화지 삼아 종이꽃 붓으로 온갖 색채를 그려내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도원경.

100보가 넘도록 떨어져 있음에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엑스포 현장을 앞둔 광장에서 성황리에 끝난 개막식을 바라보며, 마량은 그야말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감상에 젖어 있었다.

'아! 이날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가!'

주사연합의 간부라는 이유만으로 임명된 엑스포 운영위원이라는 자리.

권리는 없고 책임만 가득한 자리에서, 당의 엄중한 명령 아래 이 축제가 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근 한 달을 야근, 야근, 야근!'

이게 정녕 나라인가 하는 물음이 목 끝까지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이 나라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간 어떤 눈총을 받는지 똑똑히 아는 그이기에 그저 묵묵히 밭을 이는 우마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노고도 군중의 환호성을 들으니 마치 한여름에 꺼내둔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에 시작될 푸드쇼의 사후 관리도 관리지만, 사전 점검과 행사 중 사건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순찰 등등, 운영위원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너무나 많았으니까.

'특히 그 팀은…….'

어제 일어났던 사건이 마량의 뇌리를 스쳤다.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난 아직 믿을 수 없다.'

아무리 안목이 뛰어난 장백천이 장담을 한 인재라지만, 마량은 자신의 두 눈으로 그 실체를 똑똑히 파악해야 만이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입장권을 사고 입구 앞에 빼곡하게 줄 선 인파를 뚫고, 입구를 막은 경비에게 운영위원 명찰을 보여주고 건물 내부로 입장한 마량은 주저 없이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丁구역 3번…… 저기로군.'

일자로 길게 나열된 가설 주방 위로 세워진 커다란 국기. 그 사이에서 한눈에 태극기를 찾아낸 마량이 당당히 그곳으로 향했다.

각 팀들은 벌써 음식을 준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관객이 들어온 뒤부터 준비를 하면 늦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찬혁이 소속된 한국팀도 다르지 않았다.

제공된 조리도구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확인하고 있던 일행을 헛기침을 하며 부르는 마량. 그 소리에 가장 먼저 시선을 돌린 이는 다름 아닌 주방의 가장 바깥쪽, 철판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 있던 찬혁이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린 마량은 이윽고 주방 안에 통역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6명으로도 살짝 비좁은 가설 주방 안에 통역사까지 껴 있으면 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잠시 혼란스런 시선으로 '영어라도 써서 대화를 나누어야 하나.'라고 고민하고 있던 그때, 뜻밖에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찬혁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마량 운영위원님…… 맞으시죠?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음? 중국어를 할 줄 압니까?』

『상하이에 오는 게 결정된 날부터 부족하게나마 익혔습니다.』

'호오.'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마량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찬혁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다. 조국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대화는커녕 간단한 인사조차 익히지 않고 오는 이들이 태반인데, 성인도 아니고 학생에 불과한 그가 이토록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확인할 건 해야겠지.'

마량은 잠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지금 이들을 만나러 온 것은, 행사에 앞서 이들이 과연 행사에 참가 할 자격이 되는가를 알아보러 온 것이었으니까.

『한국팀, 혹시 준비가 다 되려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찬혁으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으나,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 조리도구 준비는 방금 막 끝났고, 음식 준비는…… 대략 15분 정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15분?…… 흠.』

마량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5분. 관객들의 입장 시작 시간까지 충분히 여유가 남는다.

『좋습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합시다.』

『예.』

『오늘 한국팀에서 준비한 요리. 제게 먼저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마량의 뜬금없는 제안에 찬혁의 표정이 비뚤어졌다.

'이 양반이 지금 바쁜 사람들 찾아와서 뭐하자는 거야?'

안 그래도 할 일이 태산이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는 음식을 내놓으란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신종 괴롭힘인가?

『…… 』

하지만, 이것을 마냥 장난이라고만 여기기에는 마량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다. 찬혁은 어느새 자신에게 모여든 팀의 시선을 하나씩 마주 보았다. 궁금해하는 눈치.

마량에게 실례를 구한 찬혁이 이제까지 한 대화의 내용을 전달하자 일행의 표정이 찬혁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찡그려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안영길은 그 특유의 눈웃음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군요. 만들어줍시다."

"예?"

"할아버지!"

"아마 저 사람도 확인하고 싶을 뿐일 겁니다. 어차피 한 사람 몫 정도 먼저 만들어준다고 해도 크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안영길의 설득에 일행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량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 일행이 각자 준비해온 도구와 지급받은 재료를 꺼내자, 마량이 기다렸다는 듯 찬혁에게 질문을 건넸다.

『만들 요리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찬혁은 뜸 들이지 않고 담담히 그 질문에 대답했다.

『2겹소불고기총떡튀김이요.』

『…… 예?』

아쉽게도, 마량은 그 메뉴의 이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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