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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03화 (103/403)

103화. 4가지.-2-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는 일행 사이에서 찬혁이 다음날에 대비한 전략을 짤 무렵, 한창 소란이 벌어졌던 운영위원회 사무실은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미안하네, 마량. 내가 좀 흥분했군.』

『아, 아닙니다. 선생님.』

찬혁 일행이 떠나고 대략 10분 정도가 지난 뒤에야 겨우겨우 격분한 마음을 가라앉힌 장백천을 보며 마량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생님 성격은 여전하시구나.'

그가 다니던 난징에 위치한 유명 주사학교에 장백천이 초청교사로 왔을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지만, 그때와 크게 달라진 곳 없는 모습에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중화요리를 으뜸으로 여기며, 합당한 상대라면 누구에게든 배우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누구에게든 가르침을 주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 번 성질이 났다 하면은 불붙은 기름 마냥 도무지 말릴 수가 없는 그 성격을 개인적으로 흠모하기는 했지만, 그런 만큼 이렇게 그 대상이 되었을 때에는 난처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마량의 평가였다.

'그래도 일은 일이니까…….'

『그런데 선생님. 아까 있던 참가자들과는 아는 사이 십니까?』

『음? 아. 자네. 내가 한국에서 일하는 건 알고 있겠지? 거기서 연이 생긴 이들일세. 상천에 현장학습을 왔을 때 안면을 텄지.』

『그랬군요. 그럼 같이 있던 아이들은 혹시……?』

『맞네. 고작 하루긴 해도 내가 가르쳤던 이들이지.』

'과연, 어쩐지 반응이 격하시더라니.'

그제야 마량은 장백천이 저토록 분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리 21세기에 들어 세계가 좁아졌다지만, 바다 건너 있는 먼 타향에서 가르친 학생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인 것이니까. 방금 장백천이 보였던 격정에는 분노만이 아니라 수치심도 함께 섞여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한 때 장백천의 제자였던 마량 또한 그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지금은 스승과 제자가 아닌 푸드 엑스포의 운영위원과 그 고문으로서 만사에 임해야 할 때다. 그리고 마량은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장백천의 발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방금 그 말씀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응? 무엇이 말인가?』

『참가 신청 말입니다. 저희가 왜 참가자를 그토록 많은 절차를 거쳐서 받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찬혁 일행의 참가 신청을 한사코 반려했던 마량이지만, 그건 딱히 그들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당초 엑스포의 참가 신청은 굉장히 엄격하게 진행된다.

그 인물의 대회 수상 경력, 혹은 업무 경력을 일일이 따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이는 가차 없이 떨어트린다.

특히 이번 엑스포에선 심사가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말도 종종 나왔지만, 이것도 엑스포의 품위와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심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이들을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장담하다니, 납득 할 수 없는 처사다.

만에 하나라도 그자들이 행사의 위신을 떨구는 행동이라도 한다면 대체 어떡할 요량인지, 마량은 부루퉁한 얼굴로 불만을 토로했다.

굶주려도 체면을 세우길 우선한다는 중국인다운 태도가 배어 있는 마량의 말에 장백천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할 뿐이었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아무렴, 위신에 상처가 날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토록 큰 행사를 망치면 국가 자체의 망신일 테니 말일세.』

『잘 아시는 분이 왜…….』

『뭐, 그 부분이라면 걱정 말게. 아무 문제도 없을 게야.』

『예?』

그 이유 모를 자신만만한 태도에 마량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 이야기 제대로 들으신 것 맞나?'

대체 무슨 근거가 있기에 저토록 당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마량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으나,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사자인 장백천은 여유롭게 차가 담긴 포트의 전원을 올리며 웃을 뿐이었다.

『내가 아는 젊은이 중에서 건방지기로는 손꼽히는 녀석이 하나 껴있으니까. 자네도 차나 한 잔 들게. 마시고 오늘 업무나 시작하지.』

『…… 예.』

윗사람이 주는 차를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마량이었으나, 그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다. 앞일이 걱정되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에 장백천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알맞은 온도로 데운 차를 건넸다.

『…… 맛있네요.』

『고맙네. 챙겨온 보람이 있구만.』

심란한 와중에 마신 차가 쓸데없이 맛이 좋아 공연히 화가 난 마량이었다.

***

3학년 팀의 숙소로 복귀 아닌 복귀를 한 우리 일행은 한창 내일에 대비한 메뉴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4가지? 오케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왜 하필 불러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해가 됐다면 다행이네요."

숫자를 세는 방법은 딴 것도 많은데 말이지. 아마 본인은 농담이라고 한 거겠지만.

'뭐, 어떻게 부르든 중요한 건 아니지.'

그렇다고 교장 선생님이 계신 자리에서 그런 말을 쓰는 걸 그냥 놔두기도 뭐했으니 대충 딴죽을 걸었을 뿐이다. 안 그러면 저 사람을 누가 말릴까 싶기도 했고.

"호오…… 단순히 맛만 따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거구나."

"멋이나 향이야 당연하게 생각하긴 했는데, 유지력이랑 휴대성은 미처 생각 못 했어."

묘하게 진지함이 결여된 효민 선배와는 달리, 최여린 선배나 한석준 선배는 제법 진지한 태도로 내가 말했던 네 가지 요소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조건을 맞추기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백예은의 지적. 합당한 의견이었다.

"맛, 멋, 향, 휴대성은…… 응. 할 수 있어. 그 정도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메뉴가 많을 거야. 하지만 유지력까지 생각하면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해."

"그렇지."

나도 백예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나도 방금까진 차라리 치킨이나 튀겨 파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현실도피를 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쉬울 거라고는 생각 안 했잖아?"

"……."

그 말에는 역시 백예은도 답할 말이 없었는지 무안한 표정으로 웃음만 돌려줄 뿐이다.

"어지간히 잘 나가는 양반들만 모이는 곳 아니냐. 그런데서 우리 같은 애송이가 뭐라도 보여주려면 하나쯤은 잘난 게 있어야지."

연습만으로 그 간극을 메우기에 우리는 너무 갑작스럽게 이 자리에 앉았으니, 이젠 젊은 머리로 발상이라도 앞서가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 그럼 그 네 가지를 중점으로 두고 메뉴 구상부터 시작해 볼까!"

"예. 어차피 메뉴를 단일 품목으로 집중하기로 한 이상 연습량은 크게 의미가 없으니까요."

"오, 그것도 노린 거야?"

"조금은요."

한석준 선배는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살짝 분산된 집중력을 한 곳으로 모았다. 이제부터 리더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머리를 맞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잘 생각했군요. 나이답지 않게 노련해요."

다만,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하나.

"아, 할아버지! 어디 갔었어요!"

"미안하다, 아가. 유정석 선생과 이야기를 좀 하다 오느라 늦었구나."

이 일행의 진짜 리더. 교장 선생님이 드디어 얼굴을 비추셨다.

'…… 깜박하고 있었네.'

최근 들어 뭔가 큰일을 하나 벌일 때마다 뭔가 또래하고만 함께 하다 보니 잠깐이지만 교장 선생님이 팀의 일원이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그래요. 통화 도중에 이야기를 엿들었네요. 미안하게 됐어요."

"아닙니다. 당연히 들으셔야 할 이야기인데요."

매번 생각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우리와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항상 경어를 붙이려 노력하신다. 그저 학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대하기 위한 일이며,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하는데. 솔직히 굉장히 과분하면서도 감사한 일이다.

"아무튼, 류찬혁 학생이 말한 건 대체로 옳다고 볼 수 있겠네요. 멋, 향, 유지력, 휴대성.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 쉽게 생각하지 못할 일인데,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경험이 없을 텐데도 대견하다며 날 추켜세웠으나, 회귀 전에 겪어본 사건에서 배운 것을 떠벌릴 뿐이었던 나로서는 겸연쩍은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말이 걸렸다.

"저기, 교장 선생님. 대체로 옳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훌륭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점이 있다는 거예요."

"신경 써야 할 점이요?"

우리의 되물음에 교장 선생님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류찬혁 학생이 말한 네 가지 요소 이외에도 한 가지 더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조리의 간편성이에요."

"간편성?"

"예. 내일 엑스포에서 제공될 부스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조리대, 냉장고, 철판, 튀김기, 오븐, 그리고 화구 네 개. 이 정도가 전부죠. 각 팀에서 가져온 조리도구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아마 콘센트도 두 개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할 테고요."

"…… 정말로요?"

그건 오산인데.

아니, 분명 세계적인 요리 축제잖아? 뭐가 그렇게 규모가 작아?

하나의 주방 구역이라 생각하면 나름 충분한 크기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행사의 규모를 생각해보자면 상상보다 훨씬 작다.

'복잡한 메뉴면 오는 손님도 다 못 받겠네.'

다른 곳도 아니고 중국이니 사람 하나는 정말 엄청나게 많을 것이 뻔한데. 그 정도 설비로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놀라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주최 측에서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푸드쇼는 하루만 진행하는 일정이고 가주방도 그날만 쓰고 다시 정리해야 하는데, 너무 설비를 많이 들였다가는 정리하는 데만도 어마어마하게 시간이 들 테니까요."

"확실히……."

"맞는 말씀이에요."

하긴, 중국쯤 되니까 그 수많은 팀한테 저렇게 하나하나 가주방까지 설치해 줄 수 있는 규모가 되는 거다. 하지만…… 젠장. 이러면 일이 더 복잡해지는데.

맛과 향은 당연히 좋아야 하고, 요리하는 모습이 있어 보이면서 어려우면 안 되고, 유지력과 휴대성이 좋은 음식?

'…… 그게 하루 만에 뚝딱 나왔으면 내가 식당을 차렸겠지.'

나를 비롯한 학생 일행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렵다는 것에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역시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시간이었다. 시간, 그 평등한 놈이 어떻게 이렇게 매번 부족할 수 있을까?

'꼭 사람한테서 이자 떼어가는 것 같네.'

시간을 되돌려줬으니 되돌려준 만큼 조금씩 시간을 뺏어서 남는 시간 동안 고생하라 이건가. 이쯤 되면 정말 알 수 없는 의지가 날 방해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 하는 수 없지. 이대로 있어 봤자 시간이 멈추는 건 아니다. 지금은 일단, 최대한 조건에 맞는 음식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머리로만 고민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결국 몸으로 부딪히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메뉴를 고안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재료는 뭘로 하지?"

"고기요! 일단 고기! 보편적으로 인기가 좋은 식재료잖아요."

"아, 그리고 밀가루. 상하이 쪽에 밀가루 품질 되게 좋다고 들었어."

"밀가루 괜찮네. 뭐를 만들든 휴대성은 괜찮을 것 같아."

"꼬치류는 좀 그렇지?"

"개인적으로는 별로에요. 쓰레기가 크게 남아서 불편할 거예요."

"맛은 어느 방향으로 할까?"

"매운 건 패스하고, 간장 베이스로 하자. 상하이 사람들한테도 그쪽이 더 친숙할 거야."

"간장 베이스 고기 요리? 아, 소불고기! 소불고기 어때?!"

"…… 소불고기……? 사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갈리겠지만…… 그거 괜찮네요!"

난잡하게 펼쳐진 퍼즐 조각을 그러모아 하나하나 맞추는 작업. 밑그림은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난이도가 수직상승한 퍼즐.

하지만 비슷한 또래에서는 그 적수를 찾아보기가 힘든 천재 네 사람과, 겉보기만 학생이지 실제로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나. 그리고 한 분야에 최고봉에 서 있는 대가의 손이 합쳐지니 처음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던 것들이 점점 그럴듯한 모양으로 완성되어간다.

한 시간, 두 시간.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노을빛 손짓을 하며 작별을 고하고, 휘영청 뜬 달이 자기를 무시하냐며 제 둥그런 얼굴을 하늘에 훤히 비출 때까지도 숙소의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결국 우리의 연이은 무시에 삐져 버린 달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다시 새벽녘 햇살이 밝아올 때가 될 때까지 이어진 연습.

하지만…….

"…… 야 이거, 큰일 났네."

퍼즐은, 아직 빠진 부분을 남겨둔 채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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