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102화 (102/403)

102. 4가지.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단 반나절 동안 겪은 수많은 사건사고에 피폐해진 상태로 대면한 얼굴을 본 나는 그 고사성어의 신빙성을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만남.

예상치 못한 상황.

무슨 인연인지. 조국에서 만났던 사람을 만리타향에서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릴 정도로.

"총주방장님?"

『류찬혁 주사?』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릎을 고무망치로 때린 것 마냥 곧게 펴진 다리. 그걸 반사적으로 억누르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자에서 엉덩이만 뗀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꼴사나운 모습이라, 마저 몸을 일으켜 나와 마찬가지로 묘하게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장백천 셰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별다른 말도 없이 고개만 숙인 약소한 인사였으나 그는 내 속뜻을 짐작했다는 듯 손을 저으며 답했다.

『오래간만일세. 앉게나. 늙은이 하나 반기자고 젊은이를 계속 세워두면 쓰나.』

"앉아도 된다고 하시네요."

"아, 옙. 감사합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알기에 굳이 통역은 받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친절에 감사하며 얌전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침 시선이 부담스러워지던 참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선생님.』

『그래. 그런데 이들은 어째서 여기 있는 건가?』

아까까지만 해도 태도가 냉담하기 그지없던 운영위원이 순식간에 한껏 공손해진 말투로 내 뒤를 이어 장백천 셰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걸 담담하게 받아들인 셰프가 우리 일행을 의아한 표정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얼굴을 스치는 작은 호기심이 어린 눈빛. 그런데, 그 시선을 보면 볼수록 내게서도 작은 의문이 솟아올랐다.

'…… 뭔가 이상한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것 치고는 그다지 놀란 것 같은 표정이 아니다. 아니, 아주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뭔가 표정 변화가 크지 않다고 해야 할까.

내가 그런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일행의 면면을 살핀 장백천 셰프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교장 선생님의 맞은편에 선 장백천 셰프가 선생님을 향해 먼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상천 한국지부의 총주방장 장백천입니다. 지금은 부족하나마 주사연합의 부름으로 운영위원 고문을 맡았습니다. 서면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안영길입니다. 저번 현장학습 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성의를 다해 저희 학생들을 교육해 주셨다고요. 이번에 숙소 지원도 그렇고, 매번 도움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통역사를 사이에 두고 덕담을 나누는 셰프와 선생님의 대화에서 듣고 넘기기 힘든 소리가 들렸다.

'숙소 지원?'

무슨 지원을 어떻게 해주었느냐…… 는 사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금방 답이 나왔다. 3학년과 교장 선생님이 사용하는 숙소는 엑스포 측에서 제공하는 아파트 식 호텔이라고 들었다. 딱히 지원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끼어들 건덕지가 없다.

그럼 남은 건 당연히 우리뿐. 애당초 같은 호텔 상천이라는 것만 생각해 봐도 다른 답이 있을 리가 없다.

'어쩐지 과하게 좋은 호텔에서 묵는다 했더니.'

설마 그게 장백천 셰프의 조력 덕분이었다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

겨우 의문 하나를 풀어내니 또 다른 의문이 생겼지만, 아쉽게도 이 두 사람은 거기까지 논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하는 수 없지. 몇 가지 궁금증을 해결한 걸로 만족하자.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내 호기심을 충족하는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건 참가 등록. 규정은 그러려니 해도 형편성에 어긋난다며 철벽을 치는 저 꽉 막힌 운영위원의 가드를 뚫는 방법.

솔직히 지금까지는 포기하고 있었지만, 신의 도움인지 무엇인지 그 가드를 단번에 내릴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적어도 사무실에 자유롭게 출입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운영위원이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붙이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과 제법 깊은 친교를 가진 우리.

'이거 잘 하면 장백천 셰프 덕을 볼 수 있겠는데?'

정보가 하나둘 모일수록 점점 방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울창한 정글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손에 나침반과 마체테를 쥐어준 것처럼, 막힌 길을 뚫을 수 있는 도구가 손에 쥐어진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하는 수 없지.'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않은가. 쓸 수 있는 건 써먹어야 한다.

중국에는 꽌시라는 이름의 특이한 문화가 있다.

사실 문화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간단하게 말해서 혈연, 학연, 인맥 등등. 사회적인 연결고리 시스템을 뜻하는 말이다.

깊게 파고들자면 훨씬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풀어쓰자면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는 힘을 합치려 들지 않는 중국인들 특유의 풍습 같은 개념이라고 할까.

이 꽌시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나 기업은 중국 시장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돈을 써봤자 돌아오는 것이 없고, 발품을 팔아도 받아주는 이가 없으니 오죽할까.

그런 꽌시의 비합리적 측면을 직접 체험하여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반대로 튼튼하게 이어진 꽌시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튼튼하게 이어진 꽌시가 가진 힘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광경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런 무도한 자들을 보았나! 그런 놈들은 이 대중화의 인민이라 칭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찌 4000년의 긍지를 버리고 식食으로 장난을 칠 수 있단 말이오!』

『서, 선생님. 고정하시지요.』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주먹으로 책상을 쿵쿵 두드리며 열불을 뿜어내는 장백천 셰프를 어떻게든 말려보려 애쓰는 마량 운영위원의 모습이 애처롭다.

예상한 대로, 우리 일행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상세하게 들은 장백천 셰프는 마치 우리가 낼 화를 대신 내는 것 마냥 좀처럼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표현이 어찌나 격했으면 유정석 통역사가 통역을 포기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나 또한 평범한 대화문만이 아니라 욕설이나 은어에 대한 지식도 제법 된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조차 지금 장백천 셰프가 내뱉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무서울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 일행에게 쏟는 정성이 대단하다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끈끈한 꽌시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다행히 화풀이 샌드백 신세가 된 테이블이 제법 탄탄한 덕분에 재물손괴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장백천 셰프는 분이 덜 풀렸다는 듯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저들에게 중화의 대범함을 보여주긴커녕 필부의 음습함만을 보여주었으니, 구겨진 체면을 어찌 피겠는가.』

『서, 선생님…….』

『이보시오, 안영길 선생.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리다. 류찬혁 주사를 비롯한 학도들이 이번 세계 식품 박람회에 참가하는 데 어떤 잡음도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손을 써둘 테니, 이만 걱정을 접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부터 최대한 연습을 해두는 게 좋을 듯 싶소만.』

얼씨구. 이제는 교장 선생님을 향한 말투가 반쯤 평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우리한테 가장 부족한 건 시간이었으니까. 교장 선생님도 그 말이 정말이냐며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되물었지만, 장백천 셰프는 호언장담을 하며 걱정 말라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이후에 행동은 그야말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거의 쫓아내듯 어서 돌아가 연습에 매진하라며 우리를 재촉하는 장백천 셰프의 말에 따라 축객령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운영위원실을 빠져나온 우리는 그 길 그대로 3학년 대회반이 머무는 숙소로 돌아가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나나 선배, 예은이는 짐이 전부 호텔에 있었지만, 다행히 병원에서 갈라져 먼저 숙소로 돌아간 이들이 짐을 챙겨서 보내준다 하였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사실, 우리의 신경은 짐보다는 다른 곳에 팔려있었던 탓에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무서웠어……."

"저도요……."

"좀…… 그런 면이 있죠. 장백천 셰프."

그야 한 성깔 하게 생긴 외국인이 자기네 나라 말로 1초에 10번씩 욕설을 뱉으며 악을 쓰면 누구든 겁에 질릴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야말로 최선의 결과에 가까웠다.

참가신청도 무사히 됐고, 절차를 준수한다고 쓸데없는 시간을 사무실에서 허비할 필요도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제일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연습.

내일 있을 라이브 쿠킹쇼에서 3학년 팀원에게 결코 누가 되지 않을 만한 성과를 내려면, 이젠 정말 죽어라 연습할 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심플하지만 고된 일정이 되겠지. 밤을 꼴딱 새면서 연습에 매진해야 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렇게 연습을 해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위기다. 그것도 파릇파릇한 청춘남녀 다섯의 꿈이 판돈으로 걸린 위험한 도박판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위기는 곧 기회라고.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없다면 기회는 잡을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기회를 잡는 건 본인의 노력 여하. 지금부터 할 연습은 단순한 요리 연습이 아니다. 잡기 위한 연습인 것이다. 기회를, 쥐어 채기 위한.

또 얼마나 더 노력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막을 길이 없었다.

오늘도 내 손바닥은 뺨 위로 올라가 있었다.

***

라이브 쿠킹쇼.

엑스포 1일차 행사에 치러질 과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라이브 쿠킹쇼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본질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판. 백화점 시식코너와 큰 차이가 없는 행동이다.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좀 깬다."

"그러게요. 혁이는 낭만이 없어."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쉽게도 이 업계에서 살면서 로망이 닳아 없어진 지 오래라. 객관적으로 봐서 난 로맨티스트보다 리얼리스트가 어울리는 녀석이거든.

"어차피 어떻게 말해도 사실은 사실이잖아요."

"봐봐. 저런 점이. 그치?"

"예. 맞아요. 저런 게 꽝이에요."

"시끄러워."

아무튼 요는 그거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야 하는 건 단 하루. 그 하루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뉴의 다양화보다는 단일 메뉴를 그 어느 팀보다 맛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베스트.

그렇다면 그 단일 메뉴를 무엇으로 하느냐. 이것이 우리가 가장 처음 맞이한 문제였다.

"으음……."

"오빠랑 언니는 뭐 생각해둔 거 있어요?"

"사실 우리는 일원화보다는 다양성을 살리려고 했어."

"우리 장점은 이미 익힌 레시피에서 커스터마이징이 자유롭다는 거였으니까."

즉, 손님의 반응을 보면서 그때그때 레시피를 다르게 만들어나갈 생각이었다는 뜻인가.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게 안 된다는 게 문제지.

"그러네……."

"단일 메뉴라…… 오히려 선택지가 많으니까 더 결정하기 어려워."

각자 서로만의 고민에 빠지는 일행을 보며 나도 마찬가지로 턱을 괸 채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때는 요소를 선정해서 소거법으로 지워나가는 거지.'

라이브 쿠킹쇼라는 특수한 제한이 걸린 지금,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요소는 약 4가지.

우선 멋. 만들 때도, 플레이팅을 했을 때도 딱 보고 "와, 저거 맛있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끔 만드는 것.

다음은 유지력. 쿠킹쇼의 요리는 만든 직후 먹는 것보다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을 때가 더 많다. 뜨겁든, 미지근하든, 차갑든. 맛과 모양에 큰 변화가 없이 일정한 맛을 유지할 수 있는 것.

다음은 향. 행사 당일에는 코엑스에서 수백 가지 이상의 음식향이 날 터. 그 향에 묻히지 않게끔 강하면서도 거부감 없는 향을 낼 것.

마지막으로, 휴대성. 무슨 핸드폰도 아니고 웬 휴대성이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시식코너를 예로 들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고객은 어디 가만히 앉아서 먹기보단 음식을 들고 다니면서 먹을 터.

이 네 가지의 항목을 완벽하게 지키는 요리를,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 할 수 있을까……?"

내가 말하고도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빡빡한 조건의 나열에 나는 무심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젠장. 치킨이나 튀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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