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낡은 인연.─7─
이야기는 약 수십 분 전으로 되돌아간다.
교사들이 의사로부터 막 학생들의 검사결과지를 받고 있을 무렵, 찬혁은 효민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효민은 대회반의 부장. 3학년이 없는, 아니. 설령 3학년이 있더라도 대회반 안에서만큼은 교사 바로 다음 가는 인솔자의 위치에 있는 게 그녀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그녀의 말은 대회반에 대한 일이라면 교사 수준의 권한을 갖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선배, 이거 저희가 해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이었다. 찬혁이 효민에게 독대까지 신청해가며 그런 소리를 한 것은.
"……하다니, 뭘?"
"말 돌리지 맙시다. 아시잖아요."
주어가 생략된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돌리는 효민을 찬혁이 다그쳤다. 사실, 그녀도 찬혁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당장 팀의 출전조차 위태롭게 되어 버린 엑스포. 와병 중인 3학년의 빈자리를 자신들이 채우자는 것이겠지. 하지만─
"……안 돼."
안효민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이외의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단호함에 찬혁의 미간에도 작은 주름이 생겼다.
"왜죠."
"알고 있잖니, 너라면."
이유를 요구하는 찬혁에게 효민이 입을 달싹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성의 없는 답변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건 딱히 설명하기 싫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말한 대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찬혁이라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부차적인 설명을 생략했을 뿐이다.
3학년과 여타 대회반 인원이 가진 기본기와 지식의 차이는 물론이요. 무엇보다 3학년 일행의 연습량은 다른 학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물론 1, 2학년이 연습을 게을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격한 연습을 해왔다. 다만, 무엇을 위해 연습을 했느냐의 차이였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국내 대회.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셰프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명망 높은 푸드 엑스포.
어느 쪽의 중요도가 더 높은지, 그리고 어느 쪽에서 취할 수 있는 명예가 더 큰지는 그야말로 불을 보듯 뻔한 일.
3학년 일행은 요 반년 동안 대외 활동마저 내려놓고 거의 훈련에 가까운 연습을 계속 해왔다. 오로지 고작 사흘 동안 열릴 엑스포를 위해서. 굳은 각오를 다지고.
효민이 보기에, 그들은 이런 세계적인 무대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이전에 부담감의 문제다.
효민 자신은 할 수 있다 쳐도 그저 관광 겸 현장학습을 하러 왔을 뿐인 학생들이 짊어지기에 엑스포는 너무 과분한 짐이었다. 이제 막 뿌리를 뻗기 시작한 자라나는 새싹을 옮겨 심을 만한 곳이 못 된다.
자칫 잘못했다간 짐승의 사나운 투레질에 뿌리가 뽑힐 수도, 다른 거목에 햇빛과 양분을 빼앗겨 삐쩍 말라 버릴 수도 있는 야생에 던져 넣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설명하지 않아도 찬혁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효민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래요. 저도 알고는 있어요."
"그럼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더 이상 말해 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어찌 보면 냉담하게 보일 정도의 반응이었으나, 그건 그녀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 혹시라도 무너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다른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 꾸며낸 냉정함.
어른스러운 대처였지만, 그렇다고 해봤자 열여덟 애송이의 연기를 눈치채지 못할 찬혁이 아니었다. 그 심리를 금세 꿰뚫어 본 찬혁이 효민의 말꼬리를 붙잡는다.
"아뇨. 그만 못합니다. 아시잖아요. 저희는 만약이지만, 3학년 선배들은 확실이라는 거."
"……."
"이대로 가다간 엑스포 참가 여부도 불투명해요."
정원 중 절반이 빠진 팀이 제대로 돌아갈 수는 있을 리가 없다. 설령 안영길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아니면 남은 인원이 어쩌다 그날 1인분 이상의 역할을 하여 빠진 팀원의 자리를 메꾸더라도, 다음 날은? 모레는?
'오히려 그렇게 되면 팀이 무너질 거야.'
억지로 풀무를 밟아 불꽃을 키운 숯은 그만큼 빨리 재로 변하는 법. 손에 남은 숯이 없을 때는 풀무를 밟는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빈손이 아니다. 숯은 없더라도 장작 정도는 있다.
"선택해야 됩니다. 시간 싸움이에요."
이 장작을 당장 아궁이에 넣어 땔감으로 쓰느냐. 아니면 마냥 숯이 오기를 기다리느냐. 그도 아니라면, 장작을 숯으로 변신시키느냐.
제 앞에 놓인 기로에서 효민의 발걸음이 방황했다. 찬혁의 말이 옳다. 골라야 했다. 도전인지, 보호인지. 꿈인지, 미래인지.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효민의 마음에 찬혁이 쐐기를 박듯 말을 더했다.
"선배. 저희 중에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할 못난이는 없어요.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이내 마음을 굳혔다는 듯 가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효민은 결심했다.
"……좋아. 그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하겠다면, 한 번 해보자."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마자 단박에 환해지는 찬혁의 얼굴을 보며 효민이 말을 덧붙였다.
"대신, 희망자 중에서 두 명. 두 명만 뽑을 거야."
"……옙."
필요한 인원은 세 명. 그중에 두 명만 뽑겠다는 소리는, 남은 한 자리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는 포부였다. 그것을 이해한 찬혁이 웃자 효민이 이어서 말한다.
"류찬혁. 지금 바로 가서 애들 모아놔."
"예."
"그리고 하나 더."
"?"
"통과 시험 정도는 봐야 할 거 아냐. 석준 오빠랑 여린 언니한테 내 부탁이라고 시간 좀 내달라고 말씀드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부장 노릇을 할 요량인지, 평소에는 잘 붙이지도 않았던 성까지 붙여 부르는 기합이 바짝 들어간 안효민의 모습에 찬혁 또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야, 한석준. 어떻게 생각해?"
"글쎄다. 뭐든 봐야 아는 거지."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자빠졌어."
찬혁과 효민의 대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거의 대회반 학생들이 대절한 것처럼 보이는 대합실에 모여 배부한 인쇄물을 눈이 빠져라 탐독하고 있는 몇 명의 후배들을 보며 미심쩍다는 듯 말하는 최여린의 발언에 한석준이 담담한 어투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작게 혀를 찬 최여린은 요 며칠간 불면증에 시달려 날카로워진 얼굴로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쯧, 이래 봤자 이제 와서 뭐가 달라져."
"……너무 그러지 마.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지푸라기? 쇠사슬을 잡아도 끊어질까 불안한 판에 무슨……."
그렇게 말하는 최여린의 눈은 그럼에도 가장 앞 좌석에 앉아 인쇄물을 보고 있는 후배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지금, 저들이 읽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엑스포에 대비하여 그들이 고심해서 짠 레시피북이었다.
3일 동안 치러지는 엑스포. 만드는 메뉴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과제가 나오든 대처할 수 있게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게끔 고안한 퓨전 레시피 모음집.
그것을 읽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와병 중인 3학년을 대신하여 하루 동안 자리를 채우겠다고 나선 용감한, 그러면서도 무모한 이들이었다.
'기특하긴 하지만…….'
이젠 방도가 보이질 않는다고 최여린은 생각했다.
몇 분 전. 안효민은 검사가 끝나고 대합실 구석에 앉아 거의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최여린과 한석준을 불러내어 이렇게 말했다.
'내일 라이브 쇼에 나갈 인원을 이 자리에 있는 1학년이나 2학년 중에 뽑힌 인원으로 대신하고 싶으니 여린과 석준이 심사 기준을 정하여 그들 중 합격자를 직접 뽑아 달라.'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여린은 사실 효민이 자기들을 놀리는 건 줄 알고 크게 화를 낼 뻔했다. 다행히 한석준이 제때 말렸기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들을 돕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머리를 식힌 지금조차 여린의 머릿속에는 말도 안 되는 짓이란 생각만이 가득했다.
근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온 팀 대신 다른 아이들과 난데없이 팀이 되어야 한다니, 솔직히 말해 억지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잖아. 저거라도 확실하게 외워두면 적어도 지시가 엇갈릴 일은 없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고 궁여지책으로 꺼내든 방안이 바로 이것, 레시피북 외우기. 확실히 해내기만 한다면 호흡을 맞추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겠지만, 대부분 오리지널 퓨전요리 레시피로 가득한 레시피북은 외우는 데만도 한세월이 걸릴 터.
누군가 저걸 다 외우는 것보다 멍청하게 누워 있는 녀석들이 먼저 쾌차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저기, 선배님."
"응? 왜? 뭐 물어볼 거 있니?"
땜빵조 선발에 나서겠다던 후배 중 안효민을 제외하면 유일한 여학생이 거수하자 금세 반응한 최여린이 답했다.
'뭐, 슬슬 탈락자가 나올 때도 됐지.'
모르긴 몰라도 아마 땜방조 참가를 철회하겠다는 발언이라 생각한 최여린이었으나, 손을 든 여학생, 백예은의 대답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레시피, 다 외웠어요."
"……뭐?"
레시피를 미리 준비한 메뉴가 십 수 개. 심지어 기성 레시피와 관련된 내용이라고는 다 모아봤자 반 페이지도 채우지 못할 고난도 메뉴.
'그걸 다 외웠다고?'
10분도 안 돼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영역에서 그녀를 농락하듯 제 모습을 보였다.
"11번 메뉴."
"쇠고기등심산채말이."
"7번 메뉴."
"배추잎으로 감싸 찐 양념당면."
"세상에, 진짜 외웠어."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대답을 뽑아내는 기계처럼 조리법을 시작부터 끝까지 또박또박 대답하는 백예은의 모습에 최여린이 눈을 치켜떴다.
단순한 소설책이라고 해도 저 정도 분량을 이토록 단숨에 외울 수는 없을 터.
하지만 그런 상식적인 생각이 무색하게도,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스스로를 숨기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천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기 시작한 백예은은 이어진 수차례의 질문 또한 완벽하게 대답함으로써 그 의심을 확고하게 털어내고야 말았다.
'말도 안 돼.'
최여린과 한석범은 심사 종목으로 레시피북 외우기라는 항목을 고르면서, 아무리 일러도 오늘 밤은 돼야 적당히 다 외운 사람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허들을 높인 건 모두 의도적인 일이었다. 너무 어려운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엑스포에 가더라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종종 판타지를 능가하는 법이었다.
"선배님. 저도 다 외웠습니다."
"……또?"
백예은에 이어서, 이번에는 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여린과 한석준을 곧게 바라봤다.
'이 정도 레시피 외우는 건 일도 아니야.'
회귀 전 연회주방에서 업무를 하던 시절에 찬혁이 평균적으로 시즌마다 외우고 다닌 레시피의 개수는 스무 가지를 가뿐하게 넘는다.
그 전부를 한 섹션에서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계절 메뉴가 거기서 거기라지만, 그 모든 레시피를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서는 특수한 방법이 필요했다.
'아직 안 죽었네.'
찬혁의 시야가 순식간에 현실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향한다.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나오는 것은 십수 년을 일했던 주방.
상상 속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마치 직접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현실감은 언제 느껴도 좀처럼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감각이었다.
그 선반에, 조리대에, 도마에, 서랍에, 도구에, 냉장고에.
주방 모든 곳에 찬혁의 단편적인 기억이 심어져 있다.
이른바 기억의 궁전 기억법. 훈련을 통해 익힌 이 기억법은 아무리 많은 수의 레시피라도 결코 헷갈리지 않고 컴퓨터에 입력한 데이터를 끄집어내듯 언제든 자유롭게 넣고 꺼낼 수 있는 능력 아닌 능력을 찬혁에게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모르는 3학년 두 사람의 눈에는 이런 찬혁과 예은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천재로만 보일 뿐이었지만.
순식간에 비어 있던 대타 요원 자리를 채운 찬혁과 예은을 보며, 최여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거, 될지도 모르겠는데."
의심에 절어 있던 아까 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게 된 그녀였다.
***
재빠른 대타 멤버의 선발과 교장 선생님의 허가.
마치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나아가던 일처리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암초를 만나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좀 어떻게…….』
『저희도 해드리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규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엑스포 현장의 사무실.
교장 선생님과 원래 교장 선생님 일행의 통역사를 맡고 있던 유정석 통역사, 그리고 나를 비롯한 대타 멤버 일행은 현재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놓고 엑스포 측 운영위원과 격한 토의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혁아,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어…… 이거 좀 귀찮아질 것 같은데."
지금 우리는 새로운 인원의 참가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운영위원을 만나러 온 참이었다.
아무리 대타라고는 하지만, 정식으로 엑스포에 참가하는 이상 서면으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개최 하루 전날 오셔서 이러시면 저희도 굉장히 곤란합니다.』
살짝 후덕한 모습에 안경을 쓴 키 작은 운영위원은 연신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의 서류를 반려해왔다.
이유는 대단치 않았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것이다.
'우리라고 이럴 줄 알았나.'
유정석 통역사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식중독 탓에 단 하루만 대타 인원으로 참가할 수 없겠느냐고 거의 애걸복걸하듯 물었지만, 운영위원은 그저 곤란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미리 보결 인원으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면 모를까, 완전히 외부 인원을, 그것도 개최 바로 전날에 들이시면 저희도 어쩔 방법이 없어요.』
『불미스런 사고 때문 아닙니까. 내일 단 하루만이라도 참가할 수는 없는 겁니까?』
『당국에 참가 인원의 신원을 조사 요청해서 다시 돌아오는 데만 사흘이 걸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 와서 갑자기 참가 신청을 한다고 하십니까. 운영위원으로서 신원 불분명자를 함부로 참가시킬 수가 없어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돌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호하기가 거의 단호박 수준이다. 생긴 것도 단호박처럼 생겨서는……!
하지만 생긴 것이 어떻든 하는 말은 정론이다.
비자를 받아 중국에 오기는 했지만 이런 큰 행사에 갑자기 외부인을 내부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 사정도 조금은 생각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애당초 이 나라의 비양심 상인 탓에 이 사달이 난 건데.
결국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 있다 보니 지지부진한 대화가 끊이질 않아 절로 두통이 밀려온다.
"선생님.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신원조회가 완료되어야 참가를 받아줄 수 있다는데 그게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네요."
"신원조회 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아무래도 한국과는 근무 풍습이 다른 것 같습니다."
"허어, 이걸 어찌한다……."
모처럼 그 어려운 과정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참가신청을 못하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 아닌가.
아, 스트레스. 뒷목이 뻐근해진다. 왜 나는 이런 사건이랑 연이 깊은 걸까. 전생에 죄라도 졌나. 회귀 전을 전생이라고 치는 건가.
열이 쌓이니 별 쓸데없는 생각만 머리에 쌓이는 느낌이었다. 선배와 백예은도 중국어는 못할지언정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이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란 것을 알고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다시 한번 시작된 운영위원과 통역사 사이의 설전.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사무실에서 의자에 곧게 앉아 일이 어떻게든 해결 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복도로 이어진 문이 열리며 누군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이보게, 마량. 오늘은 왜 또 이렇게 시끄럽게…… 응?』
"……어?"
그런데, 이 목소리, 어딘가 낯익다.
듣고 있으면 짜증 나는데 묘하게 그리운 기분이 드는 말투. 미묘하게 익숙한 강조.
그 요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려 사무실로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이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장백천 총주방장님?!"
『류찬혁 주사! 자네가 왜 여기 있는 겐가?』
호텔 상천. 한국지사 총주방장 장백천.
낡은 인연과의 뜻하지 않은 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