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99화 (99/403)

99. 낡은 인연.─4─

처음에는 열다섯, 중간에는 둘, 마지막에는 넷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너무 알려져서 식상해진 퀴즈를 베낀 것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싱숭생숭해진 지금 내 기분을 알리기에 이보다 더 나은 말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두 사람은 사람을 끌고 다니며 부려먹기 바빴지만 말이다.

"혁아! 이번에는 고기 말고 다른 거 먹으러 가자!"

"먹다 죽을 일 있냐. 좀 적당히 해라."

"동생! 저거 괜찮아 보이는데, 얼만지 좀 물어봐 주라."

"아까부터 사지도 않으실 거면서 계속 그러시잖습니까. 덕분에 저만 눈총받고 있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마치 애들끼리 서로 가져가려는 장난감마냥 휘둘리는 신세라니.

심지어 이 두 사람은 관심 분야도 서로 다른 덕분에 들어가는 발품은 두 배가 되었다.

'솔로몬 앞에서 양쪽으로 당겨지던 아기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슬픈 점이 있다면 여기에는 내 몸을 반으로 가르라고 말해 줄 솔로몬 왕이 없다는 것이다. 뭐, 있었다고 해도 나를 반갈죽 하라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순 없겠지만.

"…… 너, 그냥 몸을 반으로 나누는 게 어떠냐."

"어, 어? 뭐라고?"

"아니, 그렇게 다닐 거면 차라리 몸을 가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아니, 네가 거기서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되는 거냐.

야시장의 중앙쯤 되는 위치에 있던 널따란 광장에 도착한 뒤에야 간신히 얻어낸 짧은 휴식 시간. 굉장히 알맞으면서도 생뚱맞은 타이밍에 튀어나온 창민이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이 흐트러졌다.

영문 모를 웃음을 지으며 실실 쪼개는 창민이 녀석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방금 사 들고 왔던 정체 모를 캔음료를 이마에 대고 문질렀다. 얼음이 가득 차 있던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된 캔에 남은 냉기가 더위와 노동에 시달린 탓에 오른 열을 식혀주었다.

"하아. 어쩌다 이러고 있는 건지."

"너 때문 아니냐."

"나 때문? 웃기시네. 네 누나나 좀 말려봐라."

질리지도 않고 먹을 걸 찾는 백예은도 백예은이지만, 점포 하나를 못 지나치고 계속 상인을 떠보기만 하는 선배도 만만치 않았다. 나름 통역을 맡은 나에게만 상인의 불평이 쏠린다는 점이 특히.

이건 누가 봐도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그런 내 불평을 들은 창민이 녀석은 '네가 딱하긴 해도 동의는 못 하겠다.'싶은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아니 대체 왜? 어째서?

"애당초 누나가 왜 저렇게 날뛰는 줄은 알고 있어?"

"글쎄다. 모르겠는데."

보통 그런 건 사람 성격 문제 아닐까. 눈이 오면 방방 뛰어다니는 개도 있는 반면, 추워서 집 밖으로 안 나가는 개도 있는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창민이는 툭 쏘아붙이듯 말했다.

"네가 바람맞혔다며. 그래서 저러는 거야."

"그거야 내 잘못이 맞긴 하다만, 그게 이 상황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너 찾는다고 여태껏 구경 한 번 안 하고 내내 돌아다니기만 하느라 참고 있던 호기심이 폭발한 거야. 아마 놔두면 알아서 식을 테니까, 조금만 더 어울려주라."

"뭐? 나 찾느라?"

내 얼빠진 질문에 말도 말라며 의자에 앉아 발목을 주무르는 시늉을 한 창민이가 답했다.

"자리에도 안 보이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니, 별수 있나. 그냥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지. 해산한 곳부터 시작해서 한 블록씩 빙빙 돌면서."

"…… 그거 참, 수색대 같네."

"수색대? 뭐냐 그건."

있다. 그런 게. 아마 너도 조만간 알게 될 거다.

그나저나, 저 말을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돌아다니면서 날 찾은 이유. 그걸 모르겠다. 우리가 무슨 대단히 중요한 약속을 한 것도 아닐 텐데, 뭣하고 그 고생을 하면서 날 찾았던 걸까.

그 의문을 창민이에게 전달하자, 녀석은 자기도 모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쟤랑 16년을 같이 살았는데 아직도 몰라."

"…… 하긴, 그런 게 있긴 하지."

나도 주아 녀석 속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으니까. 창민이 이놈이 제 누나를 막 부르는 걸 본 건 처음이 아니긴 하지만, 뭔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남매의 모습이 생각나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본인은 뭐가 웃기냐는 듯 퉁명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참을 수가 있어야지.

"왜 웃는 거야? 아무튼, 나도 누나 생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이 없는 건 아니야."

"짐작?"

"뭐, 좋은 게 있으면 같이 보고 싶고, 재미난 일이 있으면 같이 하고 싶은 거잖아, 친구라는 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집착한 게 이해가 잘 되진 않는다며 너스레를 떠는 창민이의 모습을 보고, 새삼 느끼는 게 있었다.

나는 친구가 없다.

아니, 없'었'다는 게 지금은 맞는 표현이다. 뭐, 과거에는 배우고 일하기 바빠서 교우 관계가 늘어날 틈이 없었고, 해외에서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이 없었다.

'믿음직한 선후배는 있었지만…….'

뭐라고 할까,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친구라…… 새삼 듣게 되니 어색하기도 하고, 낯간지럽기도 한 애매한 기분이었다.

"뭐, 그럼 나도 친구라고 부를 정도는 된다는 건가?"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반년이나 같이 그 고생을 했는데 아니겠냐 그럼."

그 영문 모를 감각을 떨쳐내려 일부러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넸는데, 돌아오는 건 그보다 더한 말이었다. 저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는구나. 한창 청춘이란 걸 실감하는 나이라서 그런 건가.

말문이 막힌 나머지 밀려오기 시작한 갈증에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사용하던 음료수를 들이켜 봤지만, 애매한 단맛과 신맛, 텁텁함, 그리고 미지근해진 탄산음료라는 용서하지 못할 조합 탓에 오히려 당혹스러움만 늘었다.

그래도 잠시 말을 돌릴 이유가 필요했으니 억지로 꾹 참고 마셨지만, 정말 다신 못 마실 맛이었다. 기억해두자, 이 상표.

"얘들아, 우리 왔어!"

"다음에는 어디 갈래? 광장 근처는 싹 돌아본 것 같은데, 조금 더 깊은 곳까지 가볼까?"

다행스럽게도, 마침 타이밍 좋게 온 친구들 덕분에 더 이상 이 미묘한 음료를 억지로 삼킬 필요는 없어졌다. 갈증도 적잖게 가셨고. 다만, 갈증의 자리를 채운 근질근질함은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

"아아, 아무 탈 없이 끝나서 다행입니다."

"정말로요. 처음에 야시장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말이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 안.

학생보다 훨씬 앞 좌석에 앉은 두 교사, 그리고 가이드들은 오늘 있었던 자유 시간에 맺힌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서로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원래 갖고 있던 자유시간 계획은 보다 폐쇄적인 장소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백화점이나, 혹은 동방명주처럼 유명한 관광명소 등지에서 말이다. 즉, 야시장은 지금이든 나중이든 애당초 갈 계획을 미리 짜놓지 않았던, 원 계획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은 일정이었다.

특히 야시장 같은 경우 변인통제나 인원통제가 다른 곳들보다 비교적 어려운 장소였기에, 막상 그들을 야시장으로 이끈 교사와 가이드도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닐까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노심초사하여 나름 가능한 한 철저히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일까, 다행스럽게도 야시장 탐방을 끝낸 학생들은 어떤 문제도 없이 모두가 무사히 귀갓길에 오를 수 있었다.

체력을 다 소진했는지, 이전에 이동할 때와는 달리 하나같이 잠에 빠진 채 적막한 고요를 유지 중인 학생들을 돌아보며, 차운배 교감은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이렇게 여행지로 학생과 함께 올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말 자는 모습 하나만큼은 다들 천사 같네요."

"일어나 있을 때는 다들 철부지 야생마 같은데 말이죠."

"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다들 한창 팔팔한 청춘들이지 않습니까."

박예휘가 던진 농에 차운배를 비롯한 인솔자 일행은 혹여나 학생들이 깨지 않게끔 숨 죽여 웃었다. 특히 차운배는 올해 막 중학교에 입학한 늦둥이 아들이 생각났는지 남들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웃음을 거두려 애써야 했다.

짧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일행은 다시금 부드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보던 와중, 심권오는 무슨 이유인지 교사들을 향해 죄송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본 차운배가 놀란 눈치로 그를 제지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일어나세요."

"죄송합니다. 제 실수 때문에 선생님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덕분에 저희도, 학생들도 좋은 경험이 됐습니다. 전부 심권오 가이드님 덕분이에요."

차운배 또한 심권오가 사과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단체 여행에 있어서 계획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무리란 덩치가 커질수록 자유를 누리는 데에 제한이 생긴다.

밥을 먹는 것, 어딘가에 입장하는 것, 혹은 그저 이동하는 와중에도 어떤 불의의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 사람 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런 과정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충동적인 계획으로 야시장 탐방을 가게 된 것은 분명 칭찬받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운배도 심권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 그가 나선 것은 그 나름대로 학생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심권오 가이드님은 제안을 해주셨을 뿐이고, 허락을 한 건 저니까요. 무언가 문제가 생겨도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다들 아무 문제 없이 일정을 끝마치지 않았는가. 과정에 살짝 문제가 있었다 한들 학생들이 몸 상한 곳 없이 좋은 경험을 얻었다면 차운배로서는 따질 마음이 없었다.

차운배의 뜻을 들은 심권오는 면목이 없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한 차례 서로 훈훈한 덕담이 오간 뒤, 그들은 복귀에 앞서 내일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호텔에서 조식을 먹은 뒤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들러 학생들에게 역사 교육 겸 관광을 하고, 낮에는 그 유명한 예원 저택을 경유하여 그 근방을 돌아보다가 조금 일찍 호텔로 돌아와 다음 날부터 개최될 푸드 엑스포에 대비해 오늘보다 일찍 하루 일정을 마무리 짓는다.

날씨가 더워 걷는 데 고생은 하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하루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허, 좋구만.'

차운배는 이 일련의 대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조금 과하게 활기가 넘치기는 해도 시킨 바를 잘 따라주는 학생들, 믿음직한 수행 교사, 프로 정신이 투철한 가이드.

천성이 버드나무처럼 부드러우나 담이 작은 탓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상하이에서 아이들을 인솔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으나, 이토록 호사를 누리니 그런 부담스러움마저 눈 녹듯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여행이라면 몇 번이라도 다시 오고 싶군.'

호텔로 돌아와 푸근한 침대에 몸을 뉘이자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침대, 마치 비단처럼 거슬리는 보풀 하나 없이 매끈한 이블, 솜사탕을 벤 것 마냥 푹신푹신한 감촉으로 머리를 받쳐주는 베개. 마지막으로 여름밤의 무더위를 잊게 만드는 선선한 에어컨 바람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는 편안함 속에서, 그는 내일이 오늘만 같기를 바라며 천천히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도 아니고 새벽부터 귀가 찢어져라.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놀란 차운배가 두 눈을 번뜩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화 올 만한 지인들한테는 미리 중국에 간다고 말해놨었는데,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창문을 가린 커튼 틈새로 대강 시간대를 확인한 차운배는 어둑한 방에서 자신의 자리에 놓인 책상을 더듬어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내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교, 교, 교장 선생님? 이 시간에 어찌……?"

전화를 건 이는 다름 아닌 안영길 교장이었다. 전화를 받을 때 얼핏 본 시간은 다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 시간에 직접 전화까지 했다면 분명 보통 일은 아닐 터. 그 사실을 짐작한 차운배는 너무 놀란 탓에 살짝 떨려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전화를 받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보다 다급한 목소리로 들려온 안영길의 말에 의해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전화기를 통해 믿기지 않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들은 차운배는, 학생들이 아직 자고 있다는 사실조차 깡그리 잊은 채 저도 모르게 확성기를 댄 것 마냥 커다래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 시, 식중독이라고요?!"

차운배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의 일정, 숙소의 호사, 맛있는 식사, 즐거운 관광.

그 모든 것들이, 말 그대로 가루가 되어 그의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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