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낡은 인연.-3-
중식의 코스요리 문화는 서양식 코스요리와는 차별되는 점이 있다. 서양식 코스가 잘 짜인 순서대로 메뉴가 나온다면, 중식의 코스요리는 엄청난 양의 음식을 회전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원하는 것을 골라 개인 접시에 덜어 먹는 식이다.
음식이 담긴 접시가 깨끗하게 비는 것이 주최자와 참가자 양측 모두에게 있어 결례라고 여겨지는 문화가 있을 정도니, 그들이 가진 양에 대한 자부심을 알 수 있다.
서양으로 따지면 코스라기보다는 연회 느낌이 강하다고 할까. 그게 중식 코스요리의 재미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와, 이 집 잘한다! 이거 맛있어! 이것도!"
"……천천히 먹어, 천천히."
하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한테 여유를 남기는 식사예절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백예은. 오늘도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이 맹랑한 녀석은 여분의 미보다는 여백의 미를 즐기는 타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른 식사예절은 잘 지키니 망정이지.'
예를 들어 테이블 위 원판을 돌리는 방향이나 식사할 때 젓가락을 두는 방법 같은 것들. 어차피 단체용 별실에 들어와 있으니 남부끄러울 일은 없지만, 지금도 입구 앞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식당 직원분의 난처한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헤매고 있는 게 보여서 가슴이 찔렸다.
아마 요리를 더 가져다줘야 하는지, 아니면 놔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으리라. 사실, 당연한 일이다. 가이드를 합쳐 한 테이블에 7명. 7명이 먹기에는 충분히 과하다 싶은 양을 준비해뒀을 텐데 그게 게 눈 감추듯 사라졌으니까.
'역시, 저쪽은 꽤 남았구만.'
그 증거로 슬슬 식사를 마칠 기미를 보이고 있는 반대쪽 2학년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접시 위에 음식이 제법 남아 있었다. 대체 뭘까, 이 차이는.
젓가락질도, 먹는 모습도 얌전한데 음식이 사라지는 속도는 거의 분홍 찹쌀떡이 빨아들이는 것처럼 빠른 이 녀석 때문이겠지. 직원도 모자라 이 녀석에 대해 잘 모르는 가이드의 혼란스런 눈초리를 한 몸에 받은 이 녀석은 정작 먹는 거에 정신이 팔려서 그럴 겨를도 없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뭐해 혁아? 안 먹어?"
"……먹을 거니까 내 거도 좀 남기지 그러냐."
그 와중에 내 먹는 사정까지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는 개뿔. 가만히 놔뒀다간 내 몫까지 전부 사라질 것 같아 나도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음, 확실히 맛있긴 하네."
상하이 전통요리라고 하면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원재료의 맛을 살린 담백한 풍미의 요리, 그리고 간장, 설탕 등으로 진한 맛을 살린 요리.
전자의 경우에는 그 유명한 상하이 털게나, 아니면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게살완자튀김 정도가 있다. 제대로 만든 상하이 털게찜도 먹고 싶었지만 지금은 제철이 아니기에 메뉴에서 빠졌다고 한다. 아쉬울 따름이다.
후자로는 홍소육이나 동파육 등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큼 유명한 요리고, 이쪽은 그나마 계절과는 관계가 없는 요리기에 당당히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외에도 선어간장조림 요리인 샹요샨스나 어느 영화에서 나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라롱샤 같은 메뉴 등등. 다종다양한 요리에 혀가 절로 즐거워졌다.
4000년 중화요리 역사가 이룩한 미식이란 이토록 훌륭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문제는 그만큼 별 기괴한 재료로 만든 혐오 음식도 만만치 않게 많다는 것이지만. 대체 그들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뭐, 그들의 역사가 어찌 됐든 간에 당장 점심은 맛있게 먹었단 사실에 만족하자.
***
잠시 후. 식후 차로 내준 보이차로 부른 배를 가라앉힌 우리를 한데 모아놓은 교감 선생님은 향후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뭐, 예정이라고 해봤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먼저 호텔로 복귀해서 잠시 휴식한 뒤에 대여한 차량을 타고 엑스포 현장에 잠시 들를 계획입니다. 교장 선생님과 3학년 참가자들이 현장에서 연습 중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학교 인원 말고도 다양한 국가의 셰프들도 함께 있을 테니, 부디 타에 모범이 되는 행동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네!"
박예휘 선생님께서는 응원 겸 현장탐사를 위해 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연습하고 쉬게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중요한 엑스포를 앞두고 후배들의 응원이라니, 뭔가 수능 당일에 학교 앞에서 선배들을 응원하는 모양새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번 엑스포가 수능보다 훨씬 중요한 기회라는 걸 생각하면 아마 비슷할 것이다. 대체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나마 우린 현장체험 핑계로 놀러 온 거니까 다행이지.'
아마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 나였다면 지금쯤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겠지. 그래도 뭐, 응원해주자는 의도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아이들 또한 제법 진지한 태도로 교감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이 엑스포가 3학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기회인지 말이다.
다만, 아이들을 열광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그 뒤에 이어진 교감 선생님의 폭탄발언이었다.
"그 이후로는 예정된 사항이 없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래요. 저녁 식사 이후에는 자유시간이 되겠군요."
폭발.
폭발적인 반응.
교감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의 반응을 묘사하기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는 없었다. 정말로 도화선에 붙은 불이 화약에 옮겨붙은 것 마냥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 잠깐만요. 여러분, 잠깐만 진정합시다!"
순식간에 떠들썩해진 장내를 수습하기 위해 교감 선생님이 진땀을 뺐으나, 아쉽게도 그 시도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누군가 조력자라도 있었다면 보다 쉽게 진정됐겠지만…….
"동생! 저녁에 어디 안 갈래? 이 누나가 좋은 곳 아는데."
안타깝게도 그 조력자가 될 수 있는 양반까지 들떠서 무슨 새내기한테 작업 거는 복학생마냥 능글맞은 목소리로 추파를 던지고 있으니, 통탄할 따름이다.
"가긴 어딜 가요. 말이 자유시간이지 어차피 가이드분이랑 같이 다녀야 할 텐데."
"에이, 그래도! 아까 지나다닐 때 보니까 영어도 웬만큼 통하는 것 같던데, 잠깐 따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주겠지."
나이에 안 맞게 졸라대는 선배의 제안을 나는 하는 수 없이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을 것 같아 나온 결론이었다.
"알겠으니까, 이만 가서 애들 좀 진정시키세요. 이러다 박예휘 선생님 나서면 큰일 납니다."
"약속한 거다? 꼭이야?"
"예, 예."
아무리 잘 나가는 대회반 부장님이라도 성심고 명물 사탄의 아가리는 무서웠는지, 박예휘 선생님 핑계를 대고서야 간신히 떨어져 나간 선배가 교감 선생님을 도와 애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좀 낫네.'
그나마 당장은 조용해진 일행을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핀잔을 넣는 나였다.
***
엑스포로 향하는 미니버스 안.
남는 시간을 십분 활용하여 식당 근방의 관광지를 간단히 순회한 우리는 호텔을 들려 흐른 땀을 간단히 씻어낸 뒤 미니버스에 몸을 실었다.
상하이는 사람이 많은 만큼 차도 많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차가 막힌다는 거지.'
그것도 상당히.
고작해야 차로 20분이면 도착할 곳을 그 배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도록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제법 구경하기 좋았다는 것과, 그 긴 시간 동안 서로와 나눌 화젯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와, 저거 혹시 야시장 준비하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강변도로. 한눈에 담기 힘든 강줄기 너머에 빽빽하게 모인 천막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거리가 먼 탓에 사람이 꼭 개미처럼 자그맣게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미둥지처럼.
그 엄청난 규모에 놀란 눈치로 말하는 여준기의 추측은 제법 정확했다.
'뭐, 누구든 비슷한 생각이긴 하겠지만.'
천막과 천막을 잇는 줄에 한가득 달린 연등과 무엇인지 잘 모를 장식이 하늘을 가릴 기세로 수놓인 장소가 달리 더 있겠는가.
다만, 사이즈가 상상 이상이었다.
거의 축구장 몇 개는 될 만한 부지 전체가 천막으로 가득 채운 믿기지 않는 스케일에 모두가 놀라움을 넘어 질린 눈초리를 보낼 정도였다.
"대륙의 기상이란 게 확실히 괜히 있는 말은 아니야."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말에 모두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그 대화를 엿들은 듯 심권오 가이드가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말했다.
"눈썰미가 좋네요. 거기 남학생분이 말씀하신 대로 저쪽에서 준비 중인 건 야시장이랍니다. 상하이에는 전부 합쳐 열 곳이 넘어가는 야시장이 있지만, 규모만 따지면 저곳에 버금가는 곳이 없죠. 그만큼 유명한 점포도 많이 출자하고요."
"열 곳이 넘는다고요?"
"예."
그의 입에서 나온 야시장의 개수에 관한 이야기에 모두가 놀란 듯 휘둥그레 뜬 눈으로 심권오를 바라봤다.
"저렇게 개활지에 아예 전용부지를 신설한 곳도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도심에 있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관광지 근처에도 있답니다. 특히 요즘은 푸드 엑스포 준비 기간이라 관광객이 많거든요. 그만큼 야시장의 규모도 확대되는 추세죠."
"와……."
"출자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아무래도 야시장은 사람들의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라서요. 그만큼 광고판으로도 손색이 없죠. 상하이에 있는 이름 있는 식당에선 야시장에 식당 이름을 내건 점포를 열기도 합니다. 그걸 출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렇구나……."
호기심 가득한 학생들의 질문 공세에 심권오 가이드는 지친 기색도 없이 차례차례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프로다운 자세였다.
그렇게 야시장에 대한 대화가 오가던 그때, 심권오 가이드가 갑작스레 손뼉을 치더니 우리들의 인솔자인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
"선생님. 학생 여러분이 야시장에 관심이 많은 모양인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녁식사 후 자유시간은 야시장에 가보는 건 어떨까요? 마침 숙소에서 저기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도 않고, 야시장처럼 한정된 공간이라면 어느 정도 개인행동을 해도 다시 모이기도 용이할 것 같은데요."
'오.'
갑작스러운 제안치고는 제법 괜찮은 발상이었다. 어차피 가이드를 따라다녀야 한다면 어느 정도 자유행동이 가능한 야시장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한창 떠들썩하던 버스 내부가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거의 말없는 압박에 가까워진 분위기가 되자, 식은땀을 흘리며 망설이던 교감 선생님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음…… 좋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상의해 보도록 하죠. 대신 여러분. 안전 교육은 확실하게 받도록 하세요. 사고가 일어나면 안 되니까요. 아시겠죠?"
"네!"
제약을 덧붙이기는 했으나, 끝내 교감 선생님의 허락이 튀어나온 그 순간. 마치 압축된 폭약이 터진 것처럼 학생들의 환호성이 버스 안을 가득 메웠다.
"……젊은 게 좋긴 하네."
버스 바깥에서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기세에 깜짝 놀란 나는, 그런 넋두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
3학년 선배들과의 만남은 스무스하게 성사됐다.
사실, 선배들과 얼굴을 마주한 시간보다 엑스포를 구경한 시간이 더 많을 정도이긴 했지만, 짧은 응원과 함께 우리가 미리 준비해온 간식을 선물 받은 선배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서 그런 것 같진 않지만…….'
내가 봤을 때 그건 감사보다는 고통의 눈물이었다. 정신에 날이 바짝 설 만큼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몸까지 힘드니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리라.
교장 선생님도 그걸 눈치채신 건지,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이 꺼낸 야시장 자율행동 계획 이야기에 기꺼이 찬성하시며 그런 말을 덧붙이셨다.
"마침 잘됐네요. 기왕 가는 거, 3학년 아이들도 함께 보내는 건 어떨까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실을 어떻게든 풀어주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였으나, 우습게도 그 책략은 과할 정도로 잘 먹혀들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선배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러겠다고, 아니. 제발 가게 해달라고 빌며 사정을 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웃픈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져갈 때쯤.
점심에 들렸던 곳과는 다른 호텔 근방 식당에서 간단한 요기 정도로만 저녁을 때우고 돌아온 우리는 지금 호텔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서 우리를 태우러 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지품은 간단하게 크로스백에 지갑, 핸드폰, 와이파이 도시락. 그리고 따로 숨겨둔 지권과 비상금 정도. 여행객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있을 수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뭐, 사실이긴 하지.'
한국은 굉장히 치안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홍대 거리에서 한 시간 동안 10분 간격으로 소매치기를 당할 일은 없지 않은가. 이곳저곳 다녀본 내가 장담하는 것이지만, 해외에서는 짐 간수를 정말 잘 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
잠시 후, 가이드의 주도 아래 소지품 확인까지 끝내고 비로소 차를 탑승하러 가고 있던 그때, 갑자기 내 옷 소매를 잡아끄는 힘에 고개가 돌아갔다.
"저기, 혁아."
"뭐야, 누군가 했네."
내 소매를 잡아끈 장본인은 바로 백예은이었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이 녀석은 평소에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사람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으니까. 고작 한 학기만에 그것에 익숙해진 자신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백예은이 다시금 옛날 형광등 불을 켜듯 소매를 잡아당기고는 말을 이었다.
"저기, 혹시…… 오늘, 같이 다니지 않을…… 래?"
평소와는 달리 물기 어린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내 가슴팍 언저리를 향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