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96화 (96/403)

96. 낡은 인연.-2-

"진짜 와 버렸네."

"그러게."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마치 궁궐을 연상케 하는 외관을 한 건물 앞에서 중얼거리는 창민이의 말을 내가 받아쳤다.

호텔 상천. 상하이 본점.

꼭 옛 궁궐을 뚝 떼어다가 현대식 빌딩에 박아놓은 것만 같은 그 특이한 외형은 한 번 보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오는 내내 계속 생각해봤는데, 이해가 안 가. 우리 어떻게 여기 온 거냐?"

"나도 모르겠다."

창민이의 넋두리 섞인 한탄을 듣고도 나 또한 무어라 돌려줄 말이 없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하늘길을 날아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생각해봤지만,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그 의문은, 이렇게 남학생들끼리 모여 배정받은 룸에 들어선 지금에 이르러서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와, 전망 끝내주네."

"저기가 어디였지?"

"꼭 아이스크림콘 거꾸로 꽂아놓은 것처럼 생겼네."

더블 배드 하나, 싱글 배드 두 개가 나란히 놓인 디럭스룸. 평수도 널널하고, 위생 상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완벽한 방. 욕실도, 짐을 수납하는 겸 드레스룸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까지 완비된 구성.

고층인 데다가 강가에 있는 덕에 전망도 확 트인 것이, 부지부터가 값이 나간다고 광고라도 하는 것 같다.

'동방명주…… 저게 보일 정도면 보통 비싼 곳이 아닌데.'

아예 침실, 거실 등이 따로 나뉜 스위트룸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호화스러운 실내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던 내가 중얼거렸다.

"우리 학교, 돈이 남아도나?"

"많긴 하지. 알잖아?"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

학생 10명. 교사 2명. 총합 12명이 5성급 호텔에서 5박.

인원이 딱 맞아 떨어진 덕분에 빌린 방은 비즈니스 식 디럭스 룸 세 개가 전부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성급 호텔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시절 물가에 이 정도 설비면 아마…….

'조식 같은 것까지 포함하면 방 하나에 100만 언저리는 나왔겠는데.'

그렇다면 인원 전체의 숙박비만 쳐도 300만. 심지어 이것도 상당히 싸게 잡은 가격이다. 이 이상 가격을 유추하고 싶지는 않다. 금전감각이 미쳐 버릴 것 같으니까.

"살 떨려서 누울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이거."

내 돈으로 하는 여행이었다면 꿈도 꾸지 않았을 장소에 발을 디디고 있으려니 묘하게 긴장됐다. 호텔에서 일해 본 경험이야 많지만, 객실 쪽 하고는 좀처럼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기도 하고.

'그런데 이 녀석들은…….'

전경을 바라보는 것도 질렸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드레스룸에 짐을 짱박고 누가 어떤 침대를 쓰는 게 좋겠냐며 수다를 떠는 안창민과 여준기의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넉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이런 상황 자체가 별로 신기하지 않은 건지. 아니, 저렇게 들뜬 걸 보면 어려서 금전 감각이 적은 것일까. 어느 쪽이 됐든 적응력 하나는 알아줄 녀석들이다.

"나 싱글 쓰고 싶은데."

"나도."

"뭐야, 그럼 둘이 하나씩 쓰면 되겠네."

"그러게."

잠깐 기다려. 왜 너네 마음대로 자리를 정하고 있는 거냐. 이대로 가만 놔뒀다간 내 잠자리가 저 녀석들 손에 정해져 버릴 것 같았기에 재빨리 두 녀석의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야, 야. 기다려 봐. 선생님도 계신 데 그렇게 멋대로 정하면 어떻게 하냐."

"아, 그러고 보니까."

"깜빡하고 있었어."

우리와 같은 방을 쓰기로 한 박예휘 선생님은 현재 교감 선생님과 가이드들끼리 모여 회의 중이시다. 우리가 입실한 지 10분이 좀 넘게 지났으니, 아마 곧 있으면 들어오시겠지.

'정하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 골조는 잡아놔야 나중이 편할 테니 적당히 구슬려서 자리를 미리 배정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좋아, 마침 이럴 때 쓸 만한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공평하고, 미련이 남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방법이.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냐? 선생님이랑 같은 침대에서 자기는 뭐하니까 싱글 하나는 선생님 걸로 빼놓고, 남는 침대를 쓸 사람을 정해 보자고."

"선생님 자리만…… 그건 괜찮은데, 그럼 우리 자리는 어떻게 정하게?"

"공평한 거 있잖아, 공평한 거."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나는 내 손을 펼쳐 보였다.

"가위바위보. 공평하지?"

경험에 의거하여 장담하건대, 내가 아는 의사결정법 중 가장 공평하고 세계적인 방법이다.

…….

잠시 후, 인솔자 미팅이 끝난 뒤 돌아오신 박예휘 선생님이 들어와서 가장 처음 본 것은, 다름 아닌 실의에 빠져 좌절하고 있는 나와 창민이, 그리고 홀로 기뻐하고 있는 여준기의 모습이었다.

***

상하이의 날씨는 굉장히 덥다. 가장 추운 날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고, 요즘처럼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철이면 평균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기도 한다.

거기다 지금은 정오가 막 지나 아직 햇빛이 정수리를 쨍쨍하게 비추는 오후 두 시. 상하이의 더위는 이제 막 시작이라는 듯 태양은 제자리를 벗어날 생각을 않는다.

'아니, 이건 지구 문제인가.'

아무튼 움직이는 건 태양이 아니라 지구니까.

머리 위로 높게 든 부채로 만든 그늘과 모자가 두 겹으로 빛을 막아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가우리만치 내리꽂히는 열기. 뇌를 통째로 구워 버릴 기세로 쏟아지는 초속 30만km의 열선에 시달리는 몸뚱어리는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야속하게 바라볼 뿐이다.

좋은 교통수단을 놔두고 굳이 걷고 있자니, 꼭 쓸데없는 짓을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저러는 거 보면 마냥 못할 일인 것 같진 않네.'

나란히 길을 걸으며 끝도 없이 재잘대는 일행을 보고 있으면 날씨는 더워도 잠깐 걷는 것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닌가 싶었다.

지금 우리 일행은 살짝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예약해두었던 식당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호텔에서 그리 멀리 있는 곳도 아니었던 탓에 이동 자체를 관광 삼아 두 발로 거리를 걸었다.

다른 아이들은 더위 속에서 걷는 노고도 여행의 즐거움에 뒤처져 좀처럼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있지만, 아무래도 나는 거기까지 흥에 취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해외 풍경을 호들갑을 떨며 구경하기에는 쌓인 세월이 있다 보니 참신함이 모자란다고 해야 할까.

'가이드 분들도 대단하네. 이 더운 날에 어떻게 저렇게 쉬지도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지.'

우리를 앞, 뒤에서 인솔하고 있는 두 명의 가이드, 그중에서도 앞쪽에 있던 심권오 가이드는 호텔을 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상하이의 역사나 지리, 유명한 것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지금 저희가 걷고 있는 거리의 이름은 와이탄으로……."

"강을 중심으로 나뉜 건축 양식이……."

"이 특이한 모습의 유래를 따지자면……."

심권오 가이드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었다. 단순한 설명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목해서 본 것, 혹은 지나가고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엮어서 풀어내는 솜씨에 일행 대부분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 만큼.

정작 나는 그 설명에 그다지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아는 거라 꼭 티비 재방송 보는 기분이네.'

회귀 전, 중식당에서 일할 때 상하이 출신 쿡이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은 무슨 자기네 나라 이야기를 한 시라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굴던 사람이었던지라, 같은 섹션에 있었던 나는 정말 질릴 정도로 상하이 이야기를 들었더랬다.

'재밌는 이야기도 많았지만…….'

그걸 년 단위로 매일같이 듣고 있으면 누구든 질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무슨 일기장도 아니고, 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나한테 기록하려 들었던 건지 원.

그 탓에 상하이에 처음 왔을 때도 영문 모를 기시감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용케 그 수다를 버텼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가이드를 중심으로 뭉치다시피 걷는 일행 사이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걷고 있던 그때, 마찬가지로 나와 비슷한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던 효민 선배가 갑자기 내 옆으로 붙었다.

"왜 그리 심심해 보여? 재미없어?"

"그렇게 보이십니까?"

"응."

여전히 이상한 부분에서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선배야말로 그렇게 신나 보이진 않으신데요. 전에 와보신 적이라도 있으십니까?"

"나? 아니. 상하이에는 와본 적 없어. 베이징에는 한 번 가봤지만."

"베이징? 아."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해외 로케가 많은 방송이었으니까. 대부분 그 나라의 수도에서 촬영되었으니, 그중에 베이징도 있었겠지.

내 추론을 대강 눈치챈 듯 선배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무 그렇게 있지만 말고 구경도 좀 하고 그래. 애들처럼 셀카도 좀 찍고."

마치 충고를 주는 듯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말하는 선배를 보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모처럼 상하이까지 와서 넋 놓고 있다 가기에는 돈도, 시간도 아깝지.'

중국에는 그런 말이 있다.

중국의 현재를 보고 싶으면 베이징에 가고, 중국의 미래를 보고 싶다면 상하이에 가라.

그 말대로, 상하이는 굉장히 미래적인 도시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대외창구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보니 온갖 인프라가 단숨에 쏠려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 과도한 발전 속도 탓에 같은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빈부격차가 크게 나는 지역이 고작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는 등 몇 가지 문제점도 있지만, 그만큼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뭐, 함정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현재 베이징. 중국의 미래 상하이.

어찌 보면 낭만적인 이 문장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현재든 미래든 이곳이 중국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 제대로 구경하기도 힘드네요."

"…… 그러게."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정말로. 엄청나게.

언젠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가본 적이 있다. 슬프게도 사적인 업무가 아닌 공적인 업무 때문이었지만, 아무튼 내 평생 그토록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걸 본 적은 논산에 처음 입영할 때뿐이었다. 밀집도로만 따지면 그 이상이었고.

'그 정도 규모면 아마 한국에서 모일 수 있는 인파의 한계치겠지.'

갑자기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 간단하다.

"사람에 가려서 건물이 안 보이긴 처음이야."

"동감합니다."

중국의 인파는 그런 한국의 한계치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서울시의 인구가 대략 천만 명 정도. 그런데 상하이는 그 2.5배인 2500만 명을 가뿐히 넘는다. 그뿐이랴? 중국 전체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은 도시가 상하이다.

'아무리 면적이 열 배여도 결국 사람이 몰리는 곳은 정해져 있으니.'

그 엄청난 머릿수를 두 눈으로 직접 보면, 말 그대로 질려 버린다. 더이상 발도 옮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특히 이런 관광명소는 더욱 그러하다. 사람으로 산을 쌓는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편의만 갖춰지면 이만한 관광지도 찾기 힘든 건 사실이지.'

돈이 있고 소통이 되면 어떤 여행지에서든 없던 편의도 생기는 법.

그리고 다행히, 우리 일행은 그 두 가지를 다 충족하고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이다.

…… 아무래도 지금은 그 편의성을 찾기 힘든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구경이고 뭐고 일행이랑 떨어지면 찾지도 못하겠네요. 어서 따라붙죠. 여기서 길 잃으면 답도 없어요."

내 몸을 방패삼아 사방에서 어깨를 밀쳐오는 사람들의 파도를 뚫으며, 나는 선배의 손목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일행하고 떨어지는 정도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개인 단위로 쪼개졌다간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었으니까.

"차, 찬혁아? 갑자기 이러면……!"

"참아요. 상하이 한복판에서 미아 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 아, 응. 그래."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끌려오는 선배의 얼굴이 묘하게 풀어지는 게 보였다.

척 보기에도 이상한 반응이었지만, 뭐. 인파 탓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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