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93화 (93/403)

93. 안가람에서의 마지막 휴일.─3─

세상만사에 평등한 것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공평이란 말이 어울리는 것이 하나 있다.

"…… 아침이네."

시간. 그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온다는 것을 나는 새의 지저귐을 화음 삼아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보며 깨달았다.

아니, 적어도 나만은 그 공평이란 말에서 빼야 하긴 하지만.

기왕 빼준 거 지금도 좀 빼주면 좋을 텐데.

"하아……."

집에 가는 날인 건 좋은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이따 백하은 쿡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씻자."

한 차례 마른세수를 한 나는 베개로 삼고 있던 소파 팔걸이에 대고 있던 머리를 올렸다. 딱딱한 걸 베고 있던 탓에 머리가 좀 눌린 느낌이 들긴 했지만, 소파 자체가 제법 푹신푹신해서 잠자리 자체는 편했다.

'비싼 거겠지, 이거.'

이 집에 있으니 아마 그럴 터. 돈값을 하는 녀석이다.

'나중에 좀 넓은 데로 이사 가면 이런 거 하나 사야지.'

잡생각은 여기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어준 뒤 거실 쪽 화장실로 들어가 적당히 세안을 끝냈다.

'샤워까지 깔끔하게 해두고 싶긴 한데…….'

그러려면 옷가지를 챙겨야 한다. 옷가지를 챙기려면 내 방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런데 내 방에서는 지금 백하은 쿡이 자고 있으니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다. 지금은 그저 어젯밤 치약과 세면도구를 미리 챙겨두지 않은 선견지명에 감사하며 그 정도로 끝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거실로 나와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침이 일곱 시를 고작 반보 앞둔 곳에서 점점 느린 발을 옮기고 있었다. 한창 뺑이 칠 시절이었으면 진즉 일어나 취사장에서 아침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슬슬 다들 일어나겠네."

우리 일행의 기상 시간은 꽤 빠르다. 주방의 막내인 만큼 출근도 보다 일찍 해야 해서 그런 것도 있고, 몸에 밴 습관 탓인지 늦게 일어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나에 이르러선 그냥 시간에 맞으면 눈이 뜨이기도 하니. 어찌 보면 직업병이지 싶다.

"흐음."

그나마 오늘은 다들 아침잠이 긴 편이다. 백하은 쿡은 잘 모른다지만 이 시간이면 다들 일어나서 샤워까지 마치고 나왔을 텐데, 말은 안 해도 어제 쌓인 피로가 만만치 않기는 한가보다.

임시 침대로 사용하던 소파에 다시 앉아 어젯밤 충전을 못 한 탓에 간당간당한 배터리로 힘겹게 연명하고 있는 핸드폰을 잠시 손에서 굴리다가 내려놨다. 핸드폰으로 뭘 할 것도 아니고, 게임, 인방을 가릴 것 없이 취미가 없는 나로서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죽이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기도 뭐한데.'

사람들이 다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자니 좀이 쑤시기도 하고.

씁,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향수를 좀 되살려볼까.

이럴 때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다.

"아침이나 만들자."

요리.

지겨우리만치 내 인생을 함께한 동반자가 아침부터 나를 불렀다.

***

잠시 후, 얼추 준비를 마치고 주방에 선 나는 음식을 만들기에 앞서 주방을 먼저 살폈다.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메뉴도 정할 수 있고, 뭣보다 오늘은 이곳을 떠나는 날이니 혹시라도 먼저 써서 없애 버릴 수 있는 재료가 없나 찾아볼 셈이었다.

"이 정도는 아침 먹어서 없앨 수 있겠네."

적당한 재료를 몇 개 골라내고 보니, 저절로 오늘 아침 메뉴 후보가 몇 가지 떠올랐다.

"음……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지?"

양식, 일식, 한식, 중식. 어느 것이든 만들려고 작정하면 못 만들 것이야 없었지만, 아무래도 요 며칠 동안 해온 요리연습의 대상이 죄다 한식이었던 탓에 한식을 만드는 게 제일 편할 듯했다.

좋아, 메뉴를 정했다.

밥솥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은 밥이 없었다. 덕분에 생각했던 메뉴를 그대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시작은 야채 육수를 만드는 것부터. 쌀뜨물에 잘 닦은 양파 껍질, 파뿌리, 멸치, 표고버섯 등이 잔뜩 들어간 냄비가 끓는 동안, 다른 메뉴를 재빨리 준비해 준다.

"♪♬"

어제 노래방에 갔을 때 불렀던 노래가 불현듯 휘파람을 타고 나왔다.

아까 전부터 머리가 살짝 복잡한 느낌이었는데, 요리만 손에 잡으면 화투패를 손에 잡은 도박꾼마냥 머리가 싸악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니, 이건 그렇게 좋은 비유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청순해진 뇌가 짧은 여유를 즐기는 동안, 노동에 익숙해진 두 손은 미리 꺼내두었던 양파와 파를 잘게 다져놓은 지 오래였다. 몸이 요리에 익숙해진 증거다.

필요한 만큼 미리 재료를 썰어두는 동안 슬슬 육수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점차 완성되어가기 시작했다. 멸치 특유의 바다내음과 쌀뜨물과 채소 자투리에서 나오는 고소한 향이 잘 섞인 게 느껴진다. 육수가 잘 뽑히고 있다는 징조다.

"좋아. 이쯤이면 됐겠지."

잠시 후. 육수가 거의 다 뽑혔을 때쯤, 미리 씻어서 물을 빼둔 쌀에 차가운 물에 중탕하여 식힌 육수와 슬라이스한 표고버섯을 넣고 몇 차례 휘저어 잘 섞어준 뒤 밥솥에 넣고 취사.

간이식이긴 하지만 들어간 재료가 제법 훌륭한 육수표고밥이다. 분명 평범한 밥보다 훨씬 감칠맛이 진한 밥이 되리라.

"그리고 또……."

맛있는 밥이 있으면 응당 곁들여 먹을 게 필요한 법.

뚝배기에 기름을 두르고 다져놓았던 파와 양파, 호박 등을 넣어 잘 볶아주다가 양파가 투명해졌을 쯤 된장을 추가하여 기름에 볶아준다.

된장을 볶아 고소함을 배로 늘려주는 방법. 강된장의 조리과정 중 하나다.

"아침에는 역시 산뜻하게 가야지."

어젯밤 먹은 메뉴는 맛있긴 했지만, 너무 기름진 요리였으니, 아침은 육류보다 채소를 중심으로 만들 작정이다.

"육수표고밥에 강된장 비빔밥이면 한 그릇 뚝딱이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된장을 적당히 볶았으면 남겨둔 육수를 부어 중불로 천천히 졸여준다. 이제 얼추 시간을 들여 되직해졌을 때 설탕, 고춧가루 등으로 간을 맞추면 강된장도 완성.

"남은 건……."

당근과 오이를 채 썰어 기름에 볶아주고, 계란은 황백지단을 만들어서 마찬가지로 채 썬다.

여기에 남아도는 봄나물 몇 개를 알맞게 조리해서 준비하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냉장고에 남아돌던 채소를 제법 알뜰하게 비웠다. 스스로 생각해도 훌륭한 메뉴선택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비빔밥이니 반찬도 별로 필요가 없다. 정 필요하면 전날 만들었다가 남은 반찬을 갖다 쓰면 되겠지.

곧 완성될 한상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니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벌써 침샘에 침이 고일 지경이다.

하지만…….

"으음…… 딱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뭔가 산뜻하고, 같이 있으면 비빔밥이 술술 넘어갈…….

"아."

그래, 그게 있었지. 마침 냉장고에 좀 많이 남아 있던 재료가 하나 생각났다.

양이 조금 많아서 아침 메뉴 재료로 써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이 방법이라면 그것도 전부 소모할 수 있을 것이다.

…… 덤으로.

"…… 백하은 쿡한테도 그게 있는 편이 낫겠네."

소맥이 주는 숙취는 제법 심하니까, 분명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

"끄으읏……!"

불이 꺼져 어둑한 방. 답지 않은 앓는 소리와 함께 잔뜩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난 백하은이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윗몸을 일으켜 세웠다.

"…… 아!"

그것은 그야말로 바람 같은 속도였다. 일어나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백하은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출근! 지각하겠다!"

7시 반을 넘긴 시각.

그녀의 평균 출근 시간이 대략 아침 9시가량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아침 준비 시간이 제법 긴 그녀에게는 꽤나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오늘이 안가람의 휴일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맞다. 오늘 쉬는 날이지……."

그제야 그 사실이 기억났는지, 이내 마음을 놓은 그녀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킁, 킁. 아, 어제 술 마셨던가……."

내쉰 숨결에서 맡아지는 숨길 수 없는 술 냄새에 그녀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술도 그리 강하지 않으면서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도무지 멈추질 못해 스스로 자제하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자제심이 무색하게도 어제 거하게 달린 것 같다며 하은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회식이라고 좀 마셨나. 애들 있다고 2차 가서 마시자고 쫄래쫄래…… 응? 2차?'

이상했다. 자신은 분명 어제 회식에서 1차로 빠진 다음에…….

"아!"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2차로 찬혁 일행의 집에 왔던 것, 안효민의 부탁으로 하는 수 없이 하룻밤 머물고 가기로 한 것, 그리고 몇 년 만에 다른 이와 같이 잠드는 상황이 어색하여…….

"…… 내가 미쳤지."

그 야밤에 애들이 있는 집에서 술을 깠던 것까지.

이상하게 흐릿한 끝부분을 제외한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린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통이 지끈거리는 것을 보아 조금 마신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잠자리는 잘 찾아 들어간 것 같은데…….'

간신히 여유를 되찾은 그녀가 정신을 다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연한 남색 벽지. 사람 산 흔적이 안 보이는 살풍경한 방이었지만, 방문 근처에 놓인 캐리어가 눈에 띄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로 다가간 그녀는, 손잡이에 매달린 이름표를 보고는 이번에야말로 깊은 좌절감이 서린 목소리로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자살하고 싶다……."

류찬혁.

반쯤 띠동갑인 남자애가 자던 침대를 멋대로 차지하고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

"거의 다 됐네. 슬슬 깨울까."

안 그래도 다들 기상이 늦는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 이상이다.

시계는 벌써 7시 반을 넘었는데 일어나는 기척조차 느낄 수 없다니. 취해서 잠든 백하은 쿡이야 그렇다 치지만, 두 남매는 정말 몸에 남아 있던 체력을 모두 소모한 것 같다.

"거 참, 어쩐지 곧 죽을 사람처럼 놀더라."

하는 수 없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비밀병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이거 한 번만 들으면 잠은 절대 못 잔다……!"

한 손에 양은 냄비, 반대쪽 손에는 국자.

이 가공한 음파병기에 대항할 수 있는 고막은 이 세상천지 어디를 뒤져봐도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거야……!

남들이 보았다간 악랄하다 손가락질할 웃음을 지은 내가 그것들을 챙겨 주방을 나서려고 할 때, 어디선가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꼭 문 열기가 버거운 듯 천천히 울리는 소리에 그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이윽고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 아."

"…… 어."

내 방. 정확히는 어제까지 내가 지내던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조심조심.

꼭 도둑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발소리까지 죽이고 방을 나서던 백하은 쿡과 거실 중앙에 있던 내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던 눈이 끝내 바닥으로 향했다.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 어, 응. 안녕. 좋은 아침."

"식사 준비, 거의 끝났어요. 백하은 쿡 몫까지."

"그, 그래? 고마워. 안 준비해 줘도 됐는데……."

어색했다. 죽도록 어색했다.

설마, 혹시라도 어젯밤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부끄러울 것 같은데.

"저기, 그…… 혹시 내가 어제……."

꿀꺽.

바라지 않는 질문이 날아오는 거 아닌가 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뭐 실수하진 않았…… 지? 기억이 잘 안 나서……."

"전혀요!"

"으, 응?!"

"전혀 안 하셨어요! 부엌에 물 마시러 나왔다가 소파에 앉아서 주무시고 계신 거 보고 방으로 옮겨드린 거예요!"

"그러니……?"

됐다!

필름이 끊긴 듯, 어젯밤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식은땀을 흘리는 백하은 쿡의 모습을 보고 안도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정작 본인은 그런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고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온 힘을 다해 끌어내리며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아무튼, 애들 일어나기 전에 먼저 씻으세요. 식사 준비 마저 해 놓을게요."

"응. 고마워."

고개를 푹 수그리고 씻으러 가는 백하은 쿡을 배웅하며, 나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굳게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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