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안가람에서의 마지막 휴일.-2-
"다녀왔습니다~!"
"…… 아무도 없는데, 의미 없지 않습니까?"
"이런 건 기분이야 기분. 이 말을 해야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드는걸."
"뭐, 그게 좋으시다면야."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남기며 문지방을 넘어서는 선배의 등을 향하던 시선을 거뒀다. 사람마다 가진 애착이라는 게 다른 법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선배를 이어 창민이를 들여보낸 뒤, 열린 문이 닫히지 않게 잡고 물러나 있던 백하은 쿡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들어가시죠."
"고마워."
한 손에 든 내용물이 꽉 찬 비닐봉투를 으쓱이며 웃은 백하은 쿡이 앞서 집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내가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회식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좋은 일인가?"
"피곤하진 않으니 좋은 거 아닐까요. 다른 분들도 술 못 드셔서 불만이 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니까 차라리 빨리 갈라지는 게 나았겠죠."
"나는 술을 엄청 즐겨 마시진 않는 편이라, 그런 건 잘 모르겠더라."
"동감입니다."
백하은 쿡을 비롯한 우리 학생 일행은 보다시피 다함께 집으로 돌아온 참이다.
못해도 열시 조금 안 돼서 끝나리라 짐작했던 회식도 생각보다 굉장히 이르게 끝났다. 직원들 대부분이 처음 시킨 것만 다 먹고 자리를 떴으니, 얼마나 빨리 끝났는지 짐작이 가리라.
'소고기보다 술이 우선인 건가…….'
2차는 감자탕 집이나 가자며 옹기종기 모이던 직원들의 모습을 도리질치며 머리에서 털어내고, 적당히 평소 하던 대로 거실 테이블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 살 때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체 뭘 이렇게 많이 사셨습니까."
내가 앉기도 전에 벌써 착착 준비되어가는 식탁 위 풍경에 나는 살짝 질린 눈빛을 보냈다.
치킨, 피자, 떡순튀 세트를 비롯한 패스트푸드가 몇 종.
좋게 말하면 다양했고, 나쁘게 말하면 근본이 없는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일행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개인 접시에 수저, 음료까지 서로가 서로의 수족이 된 것 마냥 딱딱 호흡이 맞는 일행에 모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식사 안 하셨어요?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조금밖에 안 먹었는걸. 창민이는 거의 손도 안 댔어."
사람을 먹보로 만들지 말라는 듯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 선배에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게 밥 안 드시고 뭐 하셨습니까. 어휴."
"그치만 소고기는 이제 좀 질린단 말이야…… 그치?"
"어. 느끼해서 잘 안 넘어가. 하은이 누나도 그렇죠?"
"음…… 조금 그렇긴 하지?"
"…… 예?"
잠시 두 남매와 백하은 쿡이 나눈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질려? 소고기가? 그 가게, 숙성도 그렇고 절대 만만한 가게가 아니던데.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게 이런 건가.'
누구는 식탁에 소불고기만 차려져 있어도 무슨 기념일이냐고 묻는 판에, 여기는 투쁠 꽃등심을 질린다고 마다하다니, 젠장. 나도 돈 좀 잘 벌어야지.
"……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왜 하필 사와도 이렇게 패스트푸드만…… 건강에 안 좋아요."
"집에서는 절대 못 먹게 하거든. 더 좋고 맛있는 게 이렇게 많은데 왜 그런 걸 먹냐면서."
이건 또 나름 이해가 간다. 패스트푸드가 편하고 맛있긴 해도 건강에 좋은 건 아닌데다가, 소고기를 질릴 만큼 먹는 집이라면 집밥 수준부터가 다를 테니……
다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도 가슴은 통 받아들이질 못했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한쪽 눈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게 클라스라는 건가.
'후우…… 그래, 아무렴 어때.'
살다 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닌가. 나도 언젠가 라면 끓일 때 부스러기를 안 털어 넣고, 요플레 뚜껑에 미련을 갖지 않는 날이 오겠지. 아니, 오게 만들 거다.
"식겠다. 얼른 먹자."
"사진! 그 전에 사진부터 찍고!"
"아무도 안 가져가니까 천천히 해."
……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을 보면 되든 말든 똑같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남몰래 입을 비집고 나오는 한숨을 자유롭게 풀어준 뒤, 일행이 벌이는 소란 속에 기꺼이 발을 들였다. 예쁜 각도를 찾겠다며 테이블 주변을 눈밭에 내놓은 강아지처럼 방방 뛰어다니는 선배를 도와주지 않으면 이러다 영영 못 먹는 거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 나도 치킨, 피자, 떡순튀는 굉장히 좋아하니까.
***
미성년자들의 2차라는 면목 아래 열렸던 단출한 파티는 나름 성공적으로 끝났다.
또 언제 산 것인지 모를 조그마한 케잌으로 축하연까지 대신했으니,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봐야겠지.
"어우, 속이야."
마지막에 꺼낸 케잌이 미니 사이즈라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큰 거였다면 분명 다 못 먹었을 것이다.
'그래도 젊은 게 대단하긴 하네…….'
케잌은 차치하고서라도 다른 것들도 다 못 먹을 줄 알았는데, 한창 성장기인 청소년 세 명의 힘은 대단했다. 백하은 쿡이야 중간부터 굉장히 힘에 겨워 보이긴 했지만, 다 큰 성인이니 자기 한계에 맞게 알아서 조절했으리라 믿는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선배랑 백하은 쿡은 뭐하고 있으려나."
살짝 뜬금없는 의문이었으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단찮은 이유기는 하다. 그냥 백하은 쿡이 오늘 하룻밤만 여기서 묵고 갈 뿐인 일이니까.
'…… 아니, 대단한 게 맞나?'
나 참, 요즘 들어 선배한테 물드는 느낌이 종종 드는 것 같다. 뭐라고 할까, 사람을 끌고 다니는 기질? 선천적으로 사람을 휘두르는 선배 특유의 성향에 덤덤해진 느낌이다.
휴일엔 집에만 있을 예정이라는 백하은 쿡에게 여기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니 제발 하루만 함께 있어 달라 사정사정하던 선배와 그걸 마지못해 승낙하는 백하은 쿡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걸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아니, 아무리 자기가 있다지만 외간 남자만 두 명이 있는 집에서 재우겠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회반 때부터 시작해서 이번 방학과제까지, 문득 생각해보면 휘둘리기만 한 것 같아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 모르겠다."
알아서 어떻게든 될 테니까.
희망적 관측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사실이 그런 거지.
'분명 회귀 전에는 딱히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
회귀 전 안효민이라는 인물은 생각보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단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안상필 대가를 이어 최초로 안가람의 여성 주방장이 된 인물이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주방은 보통 힘든 곳이 아니다. 어지간한 남자들도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언제 훅 가도 이상하지 않은 게 주방 일인데, 그런 주방을 도맡는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사람한테는 힘겨운 일이다. 더군다나 안가람 같은 초일류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다만 회귀 전, 안창민이라는 스타셰프에게 향하는 스포트라이트에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졌기에, 일반인들 사이에선 안효민보다는 안창민이 더 많이 알려졌을 뿐이다. 어찌 보면 지금과 딱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본인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대외활동을 거의 안 한 탓도 있겠지만.'
대중의 기억은 그렇게 오래 이어지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본인이 그걸 바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여론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의외로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본 효민 선배는 지금 같은 인상이라기보다는…… '
조금 시니컬한?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처럼 맨날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선배와 비교하면 거의 다른 사람 같았다.
"끄윽. 어우, 속이 더부룩하니까 별 잡생각이 다 나네."
잠이 안 오니 점점 생각만 깊어진다. 내일 돌아가기 전에 깔끔하게 대청소도 해야 해서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수 없지. 결국 그대로 잠드는 것을 포기한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미리 챙겨둔 짐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게 분명…… 아, 여깄네.'
짐가방 안에서 챙긴 것은 다름 아닌 소화제였다. 어머니가 챙겨주실 때엔 고작 일주일 있다 오는데 무슨 약까지 챙겨주시나 했지만, 일정 마지막 날에 와서 이걸 정말로 쓰게 될 줄이야. 세상 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른다는 말이 틀린 소리가 아니다.
'소화제도 챙겼으니 이제 물만 있으면 되는데…… '
박스를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선 나는 주방을 향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방음이 잘 되어 있는 집이긴 하지만, 혹시 시끄럽게 굴다가 누굴 깨우는 것 보다야 나 하나 조심하는 게 낫다.
고양이가 된 기분으로 걷는 소리까지 숨겨가며 나온 그때, 내 시선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어라?"
주방에 불이 켜져 있다. 평소에도 잘못해서 어디 박지 않게끔 무드등 정도는 켜두지만, 지금 새어 나오고 있는 불빛은 무드등 노란빛이 아닌 하얀 형광등 빛이었다. 그걸 인식하자 부엌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확실히 들리고 있다.
'누가 있나?'
혹시 누가 나왔다가 실수로 조명을 야간용으로 바꾸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뭐, 가보면 알겠지.'
설마 도둑이 들었을 리도 없고. 저렇게 불을 환히 켜두고 다니는 도둑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불을 켜두고 간 거거나, 누가 주방에 잠깐 들린 거거나.
마침 물을 마시러 나왔을 때 마주치다니, 꽤 공교로운 타이밍이라 생각하며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거실과 방문을 가리는 벽을 지나 주방으로 다가가니, 그제야 주방에 있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백하은 쿡? 안 주무셨어요?"
"읍!"
주방 선반에 허리를 기댄 채 거실을 등지고 있던 그녀가 깜짝 놀라 허리를 앞으로 수그렸다. 뭘 마시고 있었던 것일까? 숨을 죽이고 콜록거리는 것이 딱 봐도 사레가 들린 모양새라 잽싸게 다가가 등을 툭툭 쳐주니, 그녀가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다.
"괜찮으세요?"
"흐, 하. 어. 괜찮아, 괜찮아."
너무 깜짝 놀라니까 반대로 나까지 놀라 버렸다. 다행히 좀 나아진 것 같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니, 백하은 쿡이 주방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맥주 캔 몇 개와 접시에 깔린 믹스넛,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에 들린 컵까지. 그것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허탈해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뭐야. 쿡, 술 드시고 계셨던 거예요?"
"하, 하하……."
살짝 취기가 올라 발그레해진 뺨을 긁적이며, 그녀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
"술, 잘 따르네."
"그런가요?"
"응. 혹시 술 마셔본 적 있니?"
"…… 없어요. 되게 약해서."
"마셔본 적도 없는데 그건 어떻게 알아?"
"느낌이 그래요."
"흐응…… 아무튼, 술은 어른이 되고 나서 마시렴."
"말씀 안 하셔도 그럴 거예요."
정말이냐는 듯 미심쩍은 눈빛을 향하는 그녀의 말을 술을 마저 따르는 것으로 돌린다.
'그냥 들어가기도 뭐하고…….'
남몰래 주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백하은 쿡을 방해하고 물만 챙겨서 쏙 들어가기에는 양심에 조금 걸려서 말 상대라도 해줄 요량으로 남았는데,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선배는 어쩌고 혼자 나와 계세요?"
"효민이? 나 씻고 나오니까 세상모르게 자고 있던데? 오늘 무슨 일 있었니? 너무 곤히 자서 깨울 엄두도 안 나더라."
"…… 예, 뭐."
있었지. 이거저거 많이.
맥주를 홀짝이며 묻는 백하은 쿡에게 대충 아침부터 회식장소에 갈 때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 주자, 그녀는 소리죽여 웃었다.
"대단하네. 어려서 그런가? 다들 체력이 좋아."
"말도 마세요. 한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논 것 같더라고요."
"그랬겠지. 아마 정말로 그게 맞을 거야."
"예?"
"중학생 때부터 학교랑 가게가 인생의 전부였던 애니까. 창민이도 그렇고. 아마 이제까지 놀지 못한 한을 단번에 풀 생각이지 않았을까?"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태어나서 놀 기회가 지금뿐인 것도 아닐 텐데 뭘 그렇게 죽을 작정으로 노는 걸까.
"다음에 놀자고 하면 될 텐데."
"…… 부럽네."
"뭐가요?"
"친구 말이야. 부르면 나오겠다고 해주는 너 같은 친구. 나는 없었거든."
어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핀잔을 흘렸다.
"그야 뭐, 나이도 안 맞으셨을 테니까요. 저라도 조금 부담됐을 걸요."
"하하, 그렇지?"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백하은 쿡의 과거사를 생각하며, 나는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인생을 무슨 올튜브 배속 돌리듯 살아서 성공까지 일궈낸 이 사람이 만약 친구였다면 제법 난감했을 것이다. 서로의 격차가 감정의 골짜기가 되었을 테니까.
"왜 그렇게 서두르신 거예요? 진학이든, 취업이든.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괜찮았을 텐데."
"글쎄, 왜 그랬을까."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말하는 것 치곤 꽤나 확신하는 구석이 있는 말투였다.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의 심부는 멋대로 들여다봐선 안 된다. 나이를 먹으며 배운 것 중 하나다.
다만, 오늘의 백하은 쿡은 취기 탓인지, 아니면 새벽 감성 탓인지. 본인의 심부를 그리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잠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그녀가, 이내 빈 술잔을 선반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같이 2차 오자고 한 이유가 있었어.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잠깐 괜찮을까?"
"저한테요? …… 괜찮아요. 말씀하시죠."
"고마워. 그, 혹시…… 예은이, 잘 지내니?"
"…… 예, 뭐. 어젯밤에 전화할 때 보니까 잘 있는 것 같던데요."
가족인데 직접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아마 본인이 아니라 남을 통해서 안부를 물을 정도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
"어머? 너네 그런 사이니? 밤에 서로 연락하는?"
"그냥 일 끝나고 안부 인사 돌리는 겸 전화한 겁니다."
"정말~?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히 얘기해 봐."
"취하셨네요. 그만 드시고 들어가시죠."
"참, 철벽 치는 솜씨가 요리 실력 수준이야."
능글맞게 어깨를 쿡쿡 찌르던 손길을 거두며 그녀가 입술을 비죽 내민다. 묘한 기시감이 든다. 자매가 쌍으로 왜 이렇게 얄밉지.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하은 쿡은 빈 컵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술을 더 꺼내오지도 않는 걸 보아 다행히 맥주는 방금 게 마지막이었나 보다.
"예은이는, 대단한 애야. 뭐든지 잘하고, 예쁘고, 나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같은 스타트라인에서는 절대 못 이길 텐데, 그나마 난 조금 더 일찍 시작한 게 다행이지. 아니, 다행일까? 매번 언제 뒤처질까 고민할 바에, 그냥……."
취기가 점점 몸을 돌기 시작했는지, 이젠 말의 앞뒤 순서도 잘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대충 이해하겠지만, 이걸 멈출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더더욱 길게 말을 뽑아냈다.
"언니라는 게 뭔지, 괜히 항상 동생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고, 한 번은 너무 힘들어서, 정말 힘들어서, 집에 있는 게 싫어져서 이렇게 자취도 하고 있는데, 곧 돌아가면 예은이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하나 싶기도 해. 그냥…… 모르겠네. 잘하고 있는 걸까? 언니가 너무 못나서, 동생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
"저기, 너는 알 것 같니? 예은이 마음. 나는 못나서, 너나 예은이처럼 잘난 애들 마음을 잘 모르겠어.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데, 혹시 우습게 보이진 않을까?"
씁, 아까부터 내가 이 소릴 왜 듣고 있어야 하나 정말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말은 그냥 못 넘기겠다.
"저기요 백하은 쿡."
"응?"
"저도 그렇게 엄청 잘난 놈은 아니에요. 절 얼마나 대단하게 보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사실은 조금 달라요."
나도 모르게 회한이 섞인 말이 탁류가 흘러내리듯 그녀에게 쏟아졌다. 그 반응이 뜻밖이었던 걸까, 몽롱하게 풀려 있던 그녀의 시선이 잠시나마 선명하게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 녀석이야 뭐, 천재가 맞긴 합니다만. 적어도 저는 아니에요. 그나마 아는 지식으로 매일매일 그 잘난 녀석들 떼어놓느라 제정신일 때가 없다고요. 지금이야 괜찮지만, 1년 후, 5년 후, 10년 후는 어떻게 될지, 그런 거 걱정할 틈도 없어요. 그런 제가 보면, 백하은 쿡이야말로 정말 잘난 사람이에요."
"……."
"저는 그냥, 그냥……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1년 후의 나한테 부끄럽지 않게. 5년 후의 내가 나를 탓하지 않게. 10년 후의 내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게. 그냥 그렇게. 백하은 쿡은 다릅니까?"
"나는……."
백하은 쿡의 두 눈이 미세하게 떨린다. 아마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연습장에 남은 기록, 손에 남은 흉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지 못한다.
"백예은이 저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언니는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이라고요. 그렇다면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그렇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요. 저는 그러고 싶어요. 그래서 하고 있어요."
"…… 힘들지는 않니?"
당연한 말을 한다. 내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백하은 쿡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그야 힘들지만, 가장 체면 세우고 싶은 사람한테 구김살 보여주는 것 보다야 낫죠. 그리고 뭐, 평생 체면 차리고 살 필요는 없잖아요. 가끔씩 같이 구겨줄 사람이 몇 명 정도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쿡은 없나요?"
"나는, 글쎄…… 아직 없는 것 같네."
"없으면 잘 찾아봐요. 저도 이제야 하나둘 찾았으니까, 아마 언젠간 찾아지겠죠."
나 같은 사람도 찾았으니까, 아마 백하은 쿡처럼 능력 있고 인물 좋은 사람이면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내 응원이 전해졌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취기 오른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답했다.
"찾아볼게."
흐리멍덩한 시선이 아닌, 밝은 빛을 되찾은 눈빛을 반짝이며 웃던 그녀의 눈시울이 천천히,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
……
"백하은 쿡?"
뭐야 이거, 왜 이러나 싶기도 잠시.
머리를 푹 수그린 채 고른 숨소리를 내는 그녀를 나는 한참 동안이나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 꼴았다. 그것도 제법 심하게.
'내가 옮겨야겠네.'
선배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기에, 결국 백하은 쿡을 눕힌 곳은 내 방이었다, 물론 나는 거실로 다시 튀어나왔다. 소파가 있으니 잠은 잘 수 있겠지.
자기 전에 주방이나 정리해두자는 생각으로 주방에 들어간 나는, 이내 싱크대에서 굴러다니던 텅텅 빈 소주병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 거 참, 어쩐지 맥주 몇 캔 갖고 너무 심하게 뻗는다 했다.
"그나저나, 어쩌지 이거."
사장님이 예전부터 취객이랑은 말 붙이는 거 아니랬는데, 취한 사람한테 괜한 말을 한 거 아닌가 싶어 머리를 부여잡았다. 쯧, 부디 몇 마디 기억 못하길 비는 수밖에.
음주의 흔적으로 남은 쓰레기들을 적당히 눈에 안보이게끔 치워버린 나는 이내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진심을 누군가에게 보인 건 오랜만이라, 슬금슬금 몰려오는 피로를 견디기 버거웠으니까.
…… 힘든 하루였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