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안가람에서의 마지막 휴일.─1─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들이니? 잘 있지?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한다니?
"아, 예. 잘 지냈죠. 일 끝나고 와서 전화 드린 거예요."
─문제는 없고? 일은 잘 끝났어?
"그럼요. 물론이죠."
─그럼 다행이구나. 그래, 내일 오는 거 맞지?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원래 내일 집에 가기로 했잖아요? 근데 아무래도 모레 돌아가게 될 것 같아서요."
─내일 모레? 왜, 무슨 일 있니?
"아뇨. 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내일 저녁에 가게 회식에 참석하지 않겠냐고 해서요."
─그런 거구나. 나야 괜찮다만, 혹시 고생했다고 한 잔 주셔도 마시면 안 된다?
"에이, 제가 뭐 술을 마셔요. 요즘은 술자리에 미성년 끼기만 해도 불법이에요. 가도 10시 되면 빠질걸요. 알아서 잘 하고 갈게요. 걱정 마세요. 아, 뭐 필요하신 건 없고요?"
─엄마는 너만 잘 오면 돼. 주아나 해주렴.
"주아요? 걘 알아서 하겠죠. 아무튼 알겠어요. 예. 쉬세요."
─딸깍
"후우, 연락은 이쯤 해두면 충분하겠지."
침대에 앉아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적당히 베개가 놓인 머리맡 어딘가로 던지고 그대로 몸을 뉘었다.
토요일 밤. 평소에는 새벽 늦게까지 주방에서 땀을 흘리던 우리였으나,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른 저녁부터 온 집안이 조용했다. 아마 다들 자기 방에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다들 날고 긴다 해도 일주일 내내 해야 할 게 너무 많았지…….'
주방일은 그거대로 힘들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마땅히 쉴 틈도 없이 말복 특선 메뉴 개발을 위해 거의 일주일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끈기만 갖고 버티기에는 꽤나 가혹한 일정이었다.
'그래도 뭐, 개고생은 아니었으니까.'
가족을 비롯한 친구 녀석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전에 보았던 은행 앱에 뜬 입금 알림 문구를 떠올리니 절로 흥이 돋았다.
'돈보다 더 중요한 걸 얻기도 했고.'
사실, 회귀 전 학생 시절에나 돈이 궁했지 내 나름대로 살길 찾아 일을 시작한 뒤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버는 것도 나름 벌었고, 뭣보다 취미라고 할 게 그다지 없어서 돈이 빠져나가는 곳이라고는 집세와 식비, 그리고 요리책값 정도였으니까.
몸에 붙은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지 남는 돈을 쓸 생각도 못 하고 저축만 꾸준히 했었다.
'그럼 뭐해, 합의금으로 그때까지 모은 거에서 반을 넘게 날렸는데.'
그 후로 남은 건 적당히 지방에 있던 월세방 정도일까. 지금에 와서는 그마저도 죄다 없어졌지만, 그 대신 돈 주고도 못 얻을 엄청나게 귀한 것을 얻었으니 이제는 우스운 술안주에 불과했다.
'어차피 술도 못 마시지만 말이야.'
괜히 튀어나오는 웃음을 뒤로하고,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쳐 누워 앞으로 있을 일을 대강 정리했다.
'회식이라…….'
방학 과제였던 실제 현장 견학도 오늘부로 끝나고, 드디어 내일이면 집에서 쉬겠다 싶었던 찰나에 갑자기 들어온 선배의 제안.
어차피 미성년자 데리고 유흥주점을 갈리도 없고, 끽해야 다른 식당에서 1차 정도만 하고 빠지겠지. 그렇다면 못 갈 것도 없다.
'회식보단 선배한테 맞춰주는 게 더 힘들 것 같은데.'
모처럼 주말에 쉬는 거 아니냐며 아침 일찍 놀러 가자던 선배의 말에 철벽을 치지 못한 자신이 저주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젊으면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젊어서 놀아야 후회가 없다는 말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공감하는 바가 있다.
"그다음은 한 1주일쯤 쉬다가…… 상하이 엑스포네. 젠장."
역시, 지금은 생각이 한쪽으로 쏠린다.
젊어서 놀고 싶다. 그냥 편하게 에어컨 빵빵하게 튼 집에서 새벽 다섯 시까지 핸드폰이나 두들기며 자고 저녁 먹을 때 돼서 일어나고 싶다.
'…… 그건 다음으로 미룰까.'
오늘 그랬다간 돌아올 후환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결코. 그냥, 내일 쓸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오늘은 얌전히 자기로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인의 혹사에 지친 몸뚱이 덕에 그날은 뒤척임 한번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
다음 날. 나와 창민이, 그리고 효민 선배는 홍대 거리를 마치 제집처럼 오가며 온갖 것들을 즐겼다.
'…… 아니, 이걸 즐겼다고 하는 게 맞나?'
정확히 말하자면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건 선배뿐인 것 같지만. 그래도 재미가 없진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정신과 몸이 재미를 대가로 피폐해졌다는 것이겠지.
"죽겠다……."
"그러게."
"솔직히,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 같아."
"…… 그 정도야?"
카페 테이블에 앉아 죽을 것 같다며 신음을 흘리는 창민이 녀석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회식에 앞서 우리는 가지 못하는 2차, 3차를 미리 달려두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뭐, 재미있긴 하잖아?"
"재미…… 라고? 이 상황의 어디서 재미를 느끼는 거냐……?"
피자 뷔페에서 점심을 먹고 나와 소화 겸 볼링장을 갔다가, 군것질을 하며 홍대 거리 어딜 가든 있는 잡화상 따위를 구경하다 들어간 코인 노래방에서 목이 쉬어라 악을 지른 뒤 영화관에서 새로 개봉한 공포영화를 관람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서 좀 쉬자는 말을 듣고 따라간 곳이 지금 우리가 있는 양궁카페라는 것만 빼면 정말로 재미있는 하루였다.
"그 정도면 거의 대부분…… 아니, 그냥 오늘을 통째로 빼 버려야겠는데."
이어진 내 말을 들은 창민이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 허망한 눈빛을 보냈지만, 적당히 너스레를 떨며 그 시선을 흘렸다.
"반어법이야, 반어법."
뺀다는 쪽인지 재미라는 쪽인지는 수수께끼로 남겨두자.
재미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노래와 비명을 지르느라 목이 쉬고 난생처음 당겨본 시위 탓에 손가락이 아파오긴 하지만, 이 모든 게 공짜라면 제법 진심으로 즐겨줄 수 있었다.
"이거 봐봐 이거! 이번엔 10점에만 세 발이다? 너희는 몇 점이야?"
자신의 사로에서 주어진 화살을 전부 소모하고 온 선배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점수표를 팔랑팔랑 휘두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방금 그걸로 화살 잔량도 동났으니, 드디어 이 지겨…… 아니, 즐거웠던 양궁 내기도 끝낼 때가 됐네.'
"난 3차 시기 전부 합쳐서 173점."
"정말? 그럼 내가 이겼네! 난 198점!"
다행이구만. 이번에도 제법 진심으로 즐거워질 수 있는 결판이 났다.
"아쉽게 됐습니다. 제가 211점이네요."
"뭐야, 이번엔 내 차례야? 쯧……."
창민이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차긴 했지만, 순순히 지갑을 열어 계산을 마쳤다. 불쌍해도 내기는 내기다.
잠시 후, 장비를 반납하고 양궁카페를 나오는 길. 선배와 창민이가 입을 모아 불만을 토로했다.
"이번에는 또 나였네. 찬혁이 너 계산한 적 없지 않아?"
"맞아. 나랑 창민이만 낸 것 같은데?"
"그야 뭐, 적어도 꼴등은 계속 면했으니까요. 왜, 중간만 해도 반은 간다잖아요."
불만을 넘어서 거의 서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두 남매의 모습에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잘 하면 되는걸.
"으으…… 얄미워!"
"대신 가자는 곳은 다 가드렸잖습니까. 퉁 칩시다, 저희."
"너 다음에 한 판 더해."
"실력 좀 나아지시면요. 오늘 아낀 돈 좋은 데 쓰겠습니다."
"이익!"
이를 악물고 손을 부들부들 떠는 선배를 향해 지갑을 툭툭 치며 대꾸하자 이번엔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대체 얼마나 분했으면…… 쯧쯧.
"……."
"야야, 저 혹시 진지해진 거 아니지? 내기는 펀하고 쿨하게 해야지."
의외로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창민이도 상황은 딱히 다르지 않았다. 말만 없다뿐이지 두 눈빛은 이글거리는 것이 만졌다간 데일 것 같을 정도였으니까.
피는 못 속인다는 걸까. 승부욕이 대단한 남매다. 이러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스케줄도 어떻게 버틴 것 아닐까. 나한테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그만뒀으면 하지만.
그렇게 부들부들 떠는 두 사람을 보며 웃기도 잠시, 이번에는 선배가 역공을 시작했다.
"와, 근데 나 영화 볼 때 깜짝 놀랐어."
"윽."
"공포영화 보면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사람 진짜 처음 봤다니까? 내 친구 중에서 가장 겁 많은 애도 그 정도는 아닌데."
"생긴 건 귀신도 때려잡게 생겼으면서."
"뭐?"
"왜? 다음에 한 편 더 보러 갈까? 아주 호러 전집을 보내줘? 매일 밤마다 톡으로 공포짤 세 개씩 출근시켜줄까?"
"…… 하지 마라."
거기까지 가면 이미 괴롭힘 아니냐.
이들의 말대로, 나는 공포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다. 어두운 길도 곧장 다니고 방에 혼자 있다고 으스스한 느낌을 받지도 않는다. 그냥, 공포영화…… 라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너무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어릴 때는 가계사정 때문에, 커서는 내 살길 찾아 일하고 공부하기 바빠서 영화 같은 건 거의 안 봤으니까. 특히 영화관은 거의 몇 년에 한 번꼴로 가본 게 다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놀림감을 찾았다는 듯, 눈을 빛내는 선배와 창민이의 시선을 피한 나는 어느덧 눈앞까지 다가온 회식 장소를 가리키며 두 사람을 닦달했다.
"저기야?"
"이번 회식은 큰 곳이네. 다른 때는 감자탕 집만 가더니. 마침 슬슬 질리던 참이긴 했는데."
"감자탕은 나트륨만 빼면 완전식품이잖아. 맛도 있고. 합리적이지 않아?"
"아빠랑 똑같은 소리 하네."
다행히 두 사람의 관심은 금세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내심 약속 장소와 가까이 있던 홍대로 놀러 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나. 어차피 우리 늦게 나와 봤자 10시도 안 됐을 텐데, 끝나고 심야로 영화나 한 편 더 볼까?"
"좋네. 아까 나올 때 보니까 마침 재밌을 것 같은 거 있었는데. 같이 가자, 찬혁아. 누나가 내줄게."
"…… 미안하니까 봐주세요, 좀."
젠장. 이러니까 사람이 함부로 약점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건가.
공짜면 뭐든 즐길 수 있다는 신조는 당분간 접어놔야 할 것 같다.
***
"다들 이번 주도 고생 많았다. 말복에 공휴일까지 껴서 평소보다 많이 바빴을 텐데 아무 말썽 없이 잘 해내 줘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맛있게 먹고, 재밌게 놀되 말썽만 피우지 말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 아, 미성년자들 있으니까 술은 시키지 말고, 혹시 시키더라도 오늘은 주지 말라고 사장님한테 미리 말해두긴 했다만, 혹시 몰래 갖다 마시다가 걸리면 가만 안 둔다."
"예!"
저녁 8시. 주방장님의 건배사 아닌 건배사가 떨어짐과 동시에 안가람의 직원들이 화끈한 열기를 뿜어내는 불판 위로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어차피 잔에 든 것이라고 해봐야 콜라나 사이다 같은 음료수일 텐데, 흥겨워하는 직원들의 텐션만 보면 정말로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죄송스럽네요. 저희 때문에 모처럼 회식하러 오셔서 술도 못 마시니……."
"신경 쓰지 마. 마실 사람들은 어차피 2차 가서 잔뜩 마실 거고, 술 싫어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너네 핑계로 술 안 마셔도 돼서 땡잡은 기분일걸?"
"그런가요?"
그런 군중의 중심에 얌전히 앉아 있던 나는 근무 첫날 내 사수를 맡았던 김지성 쿡이 구워주는 소고기를 받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맛은 안정적이야. 자리와 상황은 조금 불편하지만.
"그야 뭐…… 얻어먹는 소고기에 소주 한 잔 못 걸치는 건 괴롭지만, 그래도 법은 법이니까."
요식업 종사자가 남의 업장에서 문제를 만들 수는 없지 않겠냐며 호탕하게 웃는 김지성 쿡에게 쓴웃음을 돌려주었다. 사실, 고기도 내가 구워드리고 싶었지만, 학생한테 그런 것까지 시킬 순 없다며 완강한 태도로 집게를 사수한 김지성 쿡의 행동에 나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도 조금 부담스러운데…….'
지금 내가 있던 자리는 2열로 쭉 늘어선 테이블에서 중심에 있는 곳이었다. 마음 같아선 가장 끝자리에 주목받지 않는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나를 어떻게든 가운데에 앉히려는 다른 쿡들에 의해 내 꿈은 미련만을 남기고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 꿈을 좌절시킨 쿡들이 대체 어떠한 이유로 그랬느냐 하면─
"창민이랑 동갑이라고 했지? 그럼 1학년일 텐데. 혹시 집에서 가게 하니?"
"아뇨. 그냥 평범한……."
"어머, 정말? 근데 어쩜 그렇게 주방일에 적응을 빨리하니?"
"이 전에 일했던 곳은 있지?"
"어…… 예."
"봐봐! 내가 그럴 것 같다고 했지? 어디? 하는 거 보면 되게 잘하는 곳에서 배운 것 같던데. 한식당이야?"
"아뇨. 반년 정도 동네 정식집에서 알바 좀 해봤어요."
"엉? 뭐야, 그럼 규모 큰 곳은 아예 처음이야?"
"학교 실습으로 상천 호텔에서 하루 정도 일하긴 했죠."
"진짜로? 고작 그게 다야? 와, 난 네 나이 때 접시만 깨고 다녔는데."
"저번에 효민이 말하는 거 듣기론 대회에서 우승했다며. 수상은 얼마나 해봤어?"
"그게 처음이었어요. 대회도 이번에 처음 나가봤거든요."
"처음? 그런데 메인으로 주방장님을 밀어낸 거야? 와, 대단하네."
'…… 밥 좀 먹자.'
귀중한 소고기가 원하지 않게 웰던으로 익어가는 광경을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심정이 얼마나 참담한지 이 사람들이 알까.
내 주변으로 앉은 쿡들은 온갖 궁금증을 담아, 특히 특별 메뉴를 어떻게 개발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섞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내 입의 기능을 한 가지로 제한시키고 있었다.
입에는 소통 말고도 영양분을 섭취하는 기능이 있는데, 어째서 난 지금 인체의 카탈로그 스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적당히 하세요, 참. 애가 밥도 못 먹겠네."
그걸 지켜보던 누군가는 그 관심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내 주변으로 쏠린 인파를 말로 쫓아내고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방파제가 되어줄 셈인 것일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제법 낯익은 인물이 앉아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백하은 쿡?"
"안녕. 고생 많네."
"덕분에요."
특별 메뉴 같은 것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다름 아닌 이 사람 때문이니, 덕분이란 말이 틀린 것은 아니겠지. 백하은 쿡도 그 말뜻을 이해한 듯 쓴웃음을 짓는다.
"어쩐지 사람들이 쉽게 비킨다 했네요. 너무 겁주시는 거 아니에요?"
"겁주기는 무슨. 내가 첫인상만 그렇지 보다 보면 되게 순한 인상이야."
"…… 그렇게 믿고 싶으시다면야, 뭐."
"이 녀석이."
턱밑을 손가락으로 받치며 끼를 부리는 모습에 피로가 가셨다. 대신 소름이 끼쳤지만.
워낙 살벌해야지.
앞서 말한 이유 말고는 별다른 뜻 없이 그냥 자리를 옮긴 것인지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이는 백하은 쿡. 덕분에 나도 부담 없이 식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아, 말도 안 하고 있었네. 고마워요, 지성 씨. 고기 잘 구우시네요."
"아, 아, 아닙니다. 예."
…… 손 떨고 계시는데, 김지성 쿡. 대체 평소에 주방에서 이미지가 어떻기에…….
잠깐 있었던 해프닝 후 각자의 자리에서 숯의 열기가 시들어갈 무렵,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가볍게 정리한 백하은 쿡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게 던졌다.
"얘, 2차 안 갈래?"
"…… 2차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미짜를 데리고 어딜 가겠다고.
의미를 모르겠다는 시선을 그녀에게 향하자, 백하은 쿡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고생했잖니, 적당히 집에서 뒷이야기나 풀어보자."
그녀의 두 눈이 힐끔거리며 살짝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효민 선배와 창민이를 곁눈질한다. 뭐야, 그런 뜻이었나.
대충 이해했단 기색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가늘게 뜬 눈빛을 내게 향하며 놀리는 톤으로 말했다.
"혹시 기대했어?"
"술 드셨어요?"
"…… 너, 철벽 좀 칠 줄 아는구나?"
이래저래 배운 게 있어서.
그런 뒷말을 삼키며, 나는 백하은 쿡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