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오는 요리가 고우면 가는 말이 곱다.-2-
"살다 보니 홀에서 호출을 다 당해보네."
"백하은 쿡도 처음이세요?"
"아무렴. 주방장님이 직접 가시는 거면 모를까 내가 나가보긴 처음이야."
주방에서 홀로 나가는 복도.
나란히 서서 그 중심을 가로지르던 나를 비롯한 네 사람은 좀처럼 겪기 힘든 사건에 대한 의견을 토로했다.
'하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드라마나 만화, 영화 등을 보면 종종 그런 장면이 나오곤 한다. 요리를 만족스럽게 먹은 인물이 요리를 만든 요리사를 그 자리에서 불러내어 감사히 먹었다는 말을 전달하는 모습이 말이다.
물론 그게 서브컬쳐 적 과장과 MSG가 듬뿍 들어간 연출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현직 요리사의 시선에서 볼 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무슨 중세 귀족의 전속 요리사 같은 거면 모를까,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진짜 웃기지도 않지.'
일선에서 물러나 적당히 여유가 있는 총괄셰프도 아니고, 단 일분일초조차 함부로 낭비하지 못하는 주방 업무에 매진하는 쿡을 호출해 달라? 미친 소리 말라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그나마 지금은 브레이크 타임이라 호기심을 충족할 여유라도 있으니 이렇게 가는 거지, 만약 일을 하던 도중이었다면 아예 주방에 이런 소리가 들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손님 대응이라면 주방장님 혼자 충분하실 텐데 우릴 부른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긴 한 것 같은데, 혹시 아는 거 있는 사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요."
백하은 쿡의 의구심 어린 시선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두 남매는 저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방금 웨이터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 중에 대충 감이 잡히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아까 홀에서 말하는 걸 듣자니, 저흴 만나고 싶다 한 손님이 잡지사 직원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먼슬리 푸드 트립 아시죠? 거기서 왔다고 하던데."
"정말로?"
"예."
먼슬리 푸드 트립은 그 이름처럼 월간 발매되는 푸드 매거진이다. 나도 년 단위로 구독을 끊어서 볼 만큼 업계에서는 제법 공신력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이름을 들은 일행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아 다들 그 이름을 아는 눈치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럴 때였구나. 어쩐지."
"? 그럴 때라뇨?"
의미심장한 낱말 나열에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백하은 쿡을 대신하여 효민 선배가 답했다.
"해마다 특별 메뉴가 나오는 날이면 꼭 서너 곳 정도에서 취재하러 오거든. 올해는 거기서 처음으로 왔나 보네."
아하. 그런 거였나.
하긴, 안가람 정도의 이름값이라면 반대로 취재하고 싶어 안달 난 곳이 많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납득하던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어, 잠깐만.'
"저기 선배, 그럼 혹시 저희 지금 잡지 취재 때문에 가는 겁니까?"
"그렇지? 원래는 아빠 혼자 하시던 걸 우리까지 따로 부른 거 보면 인터뷰라도 하는 거 아닐까?"
오호라. 아무래도 쉬는 시간을 뺏겼다고 한탄할 필요는 이제 없어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땡잡았다.'
이거, 돈 한 푼 안 쓰고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몸값을 올릴 시간이 됐다.
***
"허어어……."
처음 메뉴판에서 쇠고기완자녹두점미계탕이라는 정체불명의 메뉴를 발견했을 때, 탁영훈은 내심 그 음식에 별다른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메뉴에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그가 오늘 안가람에 온 목적은 약 8할 정도가 안상필의 18번 메뉴인 초교탕이오, 나머지 2할은 그것과 같이 나올 다른 특별 메뉴였으니까.
그리고 메뉴판에서 초교탕이라는 이름을 아무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마치 나락에 빠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하필 왜 내가 온 날에……?'
그의 정보가 맞다면, 이전에 이었던 초복과 중복 때에는 분명 안상필의 초교탕이 메뉴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그것을 주제로 앞서 칼럼을 썼던 잡지사도 몇 군데 있었으니 확실한 정보일 터였다.
'아니야, 다시 잘 생각해보자. 이건 반대로 기회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좌절감에 빠져 있기도 잠시, 이내 마음을 고쳐먹은 탁영훈은 그가 가진 지식을 토대로 이 상황에서 그가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을 방법이 무엇일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안가람의 특별 메뉴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말 그대로 문외한이었으나, 적어도 초교탕이라는 메뉴가 1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왕좌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별다른 공지도 없이 바꿨다 이거지?'
안상필은 현명한 사람이다.
안가람의 주방장을 맡고 있지만, 그는 주방장임과 동시에 사장의 역할을 맡은 사업가. 가게의 매출에 악영향을 끼칠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않으리라고 탁영훈은 믿었다.
'그렇다면, 아마 이…… 녹두점미계탕? 이 메뉴에 그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혹시 직접 개발한 신메뉴를 이번 기회에 깜짝 등장시킨 건가?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정답과 오답을 번갈아 가며 찍고 있기는 했지만, 탁영훈은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점점 진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래,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특종이다. 10년 동안 만든 초교탕을 내려놓고 나오는 신메뉴? 그리고 그걸 처음 기사로 쓰는 게 나라고? 이건 못 참지.'
…… 묘하게 어긋난 방향을 향해 풀악셀을 밟는 행복회로였으나, 본인이 만족한다면 좋은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탁영훈과는 반대로, 누군가의 불행에 행운이 겹쳐 이 자리에 오게 된 김수지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큰 고민 없이, 그저 곧 준비될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어찌나 신이 났는지 한 차례 혼이 나고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김수지. 그나마 이곳에 들어오기 전 탁영훈에게 지적받은 것을 마음에 잘 새긴 듯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죽였다는 것이 최소한의 위안이었다.
'헤헤, 빨리 먹고 싶다.'
화제성, 희귀성, 그 외 여러 가지 사항을 놓고 벌써 기사를 재단하기 시작한 탁영훈과는 달리 김수지의 욕망은 조금 더 순수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었다.
맛있게 먹고, 재밌게 쓴다.
푸드 칼럼니스트가 되었을 때부터 그녀의 모토였던 문구. 타인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이 느낀 즐거움을 공감하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글귀. 김수지는 그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동상이몽의 꿈을 안고 제자리에서 시간을 죽이기도 잠시, 드디어 그들이 앉은 넓은 사각 테이블 위로 음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역시 이쪽으로 한 게 정답이었어."
코스도 메뉴 하나하나에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좋지만, 역시 한식은 푸짐한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는 이유로 선택한 한상차림은 눈으로만 보아도 예술 그 자체였다.
"와아……."
"히야, 살아 있네."
하나둘 자리를 채워나가는 형형색색의 요리가 마치 캔버스 위로 칠해지는 물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광경을 넋이 빠져라 바라보던 두 사람. 이내 모든 세팅이 끝나고 웨이터가 고개를 숙이며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를 할 때가 돼서야 그들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김수지는 퍼뜩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탁영훈을 닦달했다.
"서, 선배! 사진! 사진! 식기 전에 얼른요!"
"어, 어!"
평소 같았으면 네가 하늘 같은 선배에게 사진을 찍으라 재촉하느냐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을 탁영훈이었으나, 불타는 눈빛으로 '사진 찍느라 요리가 식으면 네 몸도 같이 식게 만들어주마.'라고 말하는 것 같은 김수지의 기세에 압도당한 그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한 채 카메라를 들었다.
다행히 그가 준비한 카메라는 제값에 맞는 성능을 톡톡히 해냈다.
사실, 요리의 모양새가 너무 좋아 어딜 어떻게 찍어도 AAA급 컷이 나온 덕분이기도 했지만.
"저, 저 이제 먹어도 되죠? 그쵸?"
"그…… 아니, 그래. 먹자. 먹어."
결국 성화에 이기지 못한 탁영훈에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들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혼내는 것이야 식사와 취재를 끝난 뒤에 해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과만을 말하자면. 탁영훈은 끝내 김수지에게 한마디 해주겠다는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
***
이 감정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식사를 마친 탁영훈은 저도 모르게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오감 전부를 도취시키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미식의 향연.
특히, 이 한 상의 중심에 있던 그것. 쇠고기완자녹두점미계탕.
그 음식의 맛은 감히 말하건대 푸드 칼럼니스트로 십수 년을 활동하며 전국팔도의 온갖 먹거리를 탐방해온 그조차 그 어디서도 먹어본 적 없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맛으로 그의 혀를 농락했다.
황홀경. 그야말로 오감의 황홀경이었다.
"흐, 흐힛……! 큼! 흐에에……!"
"야, 울든가 웃든가 하나만 해라."
"그게,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크흥, 없어서……."
개인 식사였던 호박죽을 세 번씩이나 리필 해가며 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두 명이 먹기에는 상당히 과했던 양을 꿋꿋하게 해치운 김수지는 잔뜩 홍조가 핀 얼굴로 눈물마저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그럴 만도 하지.'
사실 그도 안가람의 식사대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나, 과연. 이런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얼마든 값을 지불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확신이 아닌 것은, 이것이 월급쟁이로서 그가 낼 수 있던 최고의 허세였기 때문이다.
탁영훈이 들뜬 마음을 추스르고, 김수지가 눈물을 닦아내고 있을 때, 누군가 닫혀 있던 미닫이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업원인가? 후식은 방금 받았는데?'
살짝 묘한 타이밍에 찾아온 방문객이긴 했지만, 계속 바깥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탁영훈이 문 바깥에 선 인물에게 기별했다.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함부로 손님이 있는 방에 출입하지 않는 자세에 직원 교육이 잘 되어 있다고 감탄하기도 잠시, 탁영훈이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그의 예상을 깨고 문을 열어젖히며 등장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식사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아, 아, 안상필 대가?!"
안가람의 사장이자 주방장. 안상필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안상필이 굳이 매체에 아첨하지 않는 인물이라지만, 그렇다고 찾아온 손님을 허물로 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리사이자 사업가로서, 그의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굳이 찾아가며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특히 오늘 찾아온 두 기자는 공손한 태도로 취재를 요청해온 사람들이었다.
여태껏 언론인이라거나 공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불손한 무리를 대해 본 경험이 있는 안상필로서 그런 그들의 태도는 굉장히 좋게 받아들여졌고, 이렇게 한창 인터뷰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보이는 탁영훈과 김수지의 공손하고도 순수한 모습은 그런 호감에 박차를 가했다.
"오늘 취재에 이렇게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안상필 대가. 덕분에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저야말로 저희 안가람을 이토록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대접에 누를 끼친 부분은 없었나 걱정이 앞서네요."
"아뇨, 전혀요! 저기, 그러니까…… 가게도 예쁘고요! 밥도 엄청, 엄청 맛있었어요!"
"야, 좀! 죄송합니다. 저희 신입이 마음만 앞서는 녀석이라."
"아닙니다. 아니에요. 손님께서 맛있게 드셨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만큼 저희에게 힘이 되는 말도 없답니다."
"부족함을 너그러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자하게 미소 짓는 안상필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는 김수지의 순수한 열정이 안상필에게는 퍽 기껍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그중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분명…….
"하하. 하늘을 나는 새도 둥지에서 떨어지며 배우고, 달리는 말도 처음에는 다리를 떠는 법이지요. 배움을 시작한 이라면 무릇 누구든 그런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말을 끊은 안상필은 이내 그들이 깔끔하게 비운 검은 질냄비를 바라보며 작게 인상을 썼다.
"어느 건방진 녀석은 벌써 아가리를 벌리고 저를 삼키려 드는데, 참 부럽습니다."
이때, 그런 안상필의 눈빛을 본 탁영훈의 뇌리에 번개가 스쳤다. 기자의 감? 특종을 찾는 본능? 무엇이라고도 말하기 힘들었지만, 분명 그는 지금 무언가를 느꼈다.
'있다. 이거 뭔가 있어.'
그 낌새를 놓치지 않은 탁영훈이 재빨리 그 말에 끼어들었다.
"건방지다?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궁금하네요."
탁영훈에 질문에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안상필이었으나, 이내 그 얼굴에는 흥미로운 듯한, 어떻게 보자면 꼭 누굴 골탕 먹이고 싶은 심술쟁이 같은 표정이 자리를 차지했다.
작게 쓴웃음을 지은 그가 탁영훈의 질문에 답했다.
"이번에 제 부친께서 교장을 역임 중이신 성심조리고등학교에서 실습을 나온 신참이 한 명 있습니다만, 그 녀석이 여길 오자마자 제 친구 놈들이랑 절 밀어내고 특별 메뉴 메인 자리를 떡하니 차지해 버리지 뭡니까."
'젊음이란 게 참 무섭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떠는 안상필의 말을 들은 탁영훈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특종, 특종이다!'
찬혁 일행이 호출되기 10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