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오는 요리가 고우면 가는 말이 곱다.-1-
안가람의 계절 특별 메뉴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매년 가장 핫한 주제로 손꼽힌다.
해마다 특정한 날에만 서비스되는 특별한 음식. 늘 조회수에 목말라 하는 평론가들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의미, 정신적인 의미를 가리지 않고 이보다 군침 도는 소재는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그런 만큼 오늘처럼 안가람에서 특별 메뉴가 나오는 날에는 어떻게든 예약을 잡아보려는 평론가나 기자, 방송국 등에서 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업계에서는 이름값이 제법 상당하다는 평가를 받는 잡지사, 먼슬리 푸드 트립의 칼럼니스트인 탁영훈과 견습 기자인 김수지는 그 난관을 뚫고 오늘 안가람에 점심 예약을 성사시킨 재수 좋은 인물들이었다.
"너는 진짜 매번 볼 때마다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난 것 같아. 평론가로서 대성할 재능이야 아주."
"아하하, 과찬이세요. 사실 제 별명이 수지맞은 애거든요! 김수지니까!"
"아, 그러냐. 딱히 칭찬은 아니었는데…… 뭐, 아무려면 어때. 밀린 녀석이 불쌍하지."
자기 몸처럼 아끼는 초광각렌즈를 장비한 근접촬영용 카메라가 든 크로스백을 추스르며 땀이 밴 어깨를 살짝 식힌 탁영훈이 한숨을 뱉었다.
재미도 없는 아재개그를 가볍게 넘겨 버린 건 덤이었다. 나름 재밌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별 반응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풀이 죽은 김수지였으나, 그가 알 바는 아니다.
원래는 오늘 자신과 함께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후배 녀석은 재수가 얼마나 옴 붙었으면 하필 오늘 같은 날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편집장은 그런 후배의 자리를 대신하여 아직 첫 기사조차 떼지 못한 신입을 그의 조수로 붙인 것이다.
'애당초 이 예약도 그 녀석이 딴 거였는데. 하여튼 그놈이 재수가 없는 건지, 이 녀석이 운이 타고난 건지.'
지금쯤 보양식은커녕 팔뚝에 꽂은 링거로 수액이나 주사 받고 있을 후배를 생각하며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 탁영훈이 신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김수지에게 핀잔을 날렸다.
"이 녀석아, 너는 네 선배가 병원 신세 져서 좋은 밥 먹는 게 그렇게 좋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가람이잖아요. 그 안가람!"
음식을 주제로 한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살아생전 한 번은 꼭 가봐야 한다고 소문이 자자한 전통 한식 요리점.
정재계의 인물들 사이에서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거래가 있다면 안가람에서 대접하라.'는 말까지 도는 곳이니만큼, 탁영훈도 그런 김수지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난 건 알겠는데, 회사 생활 순탄하게 하고 싶으면 걔 앞에서까지 그러진 마라. 오늘은 잘 먹고 기사거리만 잘 뽑되 들어가선 최대한 쥐 죽은 듯이 있으란 말이다. 응? 미안한 표정도 좀 짓고, 커피도 좀 사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넹!"
"……하아."
밝고 명량하다 못해 발랄한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방방 뛰어다닐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을 본 탁영훈이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충고는 해주었으니, 받아먹는 건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잠시 후, 일 년 중 가장 더운 날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말복의 햇살에 시달려 배어 나오기 시작한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낸 탁영훈은 바글바글하게 사람이 오가는 안가람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뛰어들어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고픈 심정이었지만, 혹시라도 뭘 모르는 신입이 사고라도 칠까 하는 마음에 주의해야 할 사항을 빨리 짚고 넘어갈 요량이었다.
"잘 들어, 김 기자."
"와, 저 이제 기자예요? 신난다!"
"됐으니까 들어! 원래 입사할 때부터 견습에 신입 딱지를 달아도 기자는 기자야! 하여튼 이놈은 후배 교육을…… 쯧."
혀를 차며 손수건을 집어넣은 그가 말을 이었다.
"먼저 말해두겠는데, 어디서든 그래야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예의를 잘 지켜라."
"예?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있단 말이지, 기사 써서 광고해 주는 건 우리라면서 지들이 잘난 줄 알고 당연한 걸 못하는 놈들이. 어쨌든 우리는 기사를 써달라고 해서 온 게 아니다. 기사를 쓰게 해달라고 빌고 사정해서 온 거야. 그러니 부디 예의 잘 차려라. 필요한 거 주문할 때도 항상 존댓말 유지하고, 종업원들 부를 때도 이모님, 저기요. 이런 거 말고 실례하겠습니다. 로 통일해."
"네!"
"해도 되는 건가 싶을 때는?"
"하지 않는다!"
"좋아. 예의랑 주의만 잘 지켜도 이 바닥에서 반은 먹고 가는 거야."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연달아 끄덕이는 김수지를 보며 탁영훈이 시간을 체크했다.
'이쯤이면 됐겠지.'
입사 후 첫 외근이니 사람인 이상 한 번쯤은 실수를 하겠지만, 자신이 붙어 있으면 커버는 칠 수 있을 것이다. 회사 선배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니까.
"시간 됐다. 가자."
"옙!"
예약시간 10분 전. 준비를 단단히 마친 두 사람이 안가람의 문지방을 넘어섰다.
***
"우와…… 여기가 안가람이구나…… "
"어때, 엄청나지?"
보무도 당당히 안가람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고풍스런 붉은 색으로 칠해진 나무 기둥이 마치 가로수처럼 늘어선 실내, 좌석 사이를 가린 가림막과 여기저기 천수실이 드리운 공간은 그야말로 조선의 궁궐을 떠오르게 했다.
안가람의 컨셉이 무엇인지 시각적으로 때려 박아 알려주는 것 같은 놀라운 모습에 입을 쩍 벌리는 김수지를 보며 탁영훈은 마치 자랑거리라도 보여주는 듯 당당한 웃음을 지었다.
"바깥은 강남인데, 여긴 전혀 달라요. 꼭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 같네요!"
정말로 그 평가가 딱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쉽게도 파란 공중전화 박스나 조선의 궁궐에 당도한 낯선 이를 환영하는 어진 누군가는 없었지만.
되도 않는 헛소리를 가슴에 묻은 탁영훈이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며 추억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그들 앞으로 다가온 종업원이 정신없이 실내 여기저기를 촬영하던 김수지의 앞에 섰다.
"안가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실례지만 예약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먼슬리 푸드 트립에서 나온 탁영훈 기자입니다."
탁영훈이 품에서 꺼낸 명함을 건네받은 종업원이 그것을 확인한 뒤, 깊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확인 감사드립니다. 2시 30분. 2인으로 예약하신 탁영훈 고객님 확인되었습니다.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공손하지만 절도 있는 자세로 등을 돌려 앞서 걸어나가는 종업원의 뒤를 두 사람이 쫓는다. 김수지는 그 태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지 시종일관 놀란 표정을 얼굴에서 떼어놓을 줄을 몰랐다.
"와, 여기는 종업원도 되게 분위기 있네요."
"당연하지. 규모 좀 된다 하는 매장에서 서버 교육을 얼마나 빡세게 시키는데."
소곤거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감탄을 표하며 뒤를 따르기도 잠시. 두 사람 몫의 식기가 세팅되어있는 자리에 도착한 그들이 빈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종업원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김수지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떡해요. 팀장님. 저 벌써 엄청 기대돼요!"
"가만히 좀 있어. 무슨 난생처음 상경한 촌사람도 아니고 내가 다 부끄럽다."
빈축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저와 비슷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오른 탁영훈 또한 마냥 인상을 쓰진 못했다.
"그래도요! 헤헤, 여기 되게 비싸겠죠?"
"비싸지. 엄청 비싸. 두 사람이면 네 월급 반은 쓸 각오로 와야 돼."
"예? 그 정도였어요?!"
"…… 너는 한국에서 가장 고급 한식당을 대체 뭐라고 생각한 거냐. 심지어 강남에 있는 곳을."
지금은 한 끼 먹는 값만을 중요시하는 김수지였으나, 언젠가는 그녀도 당장 쓰는 돈보다 그만한 돈이 필요한 가게에 이토록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는 날이 오리라 믿으며 탁영훈이 웃었다.
"걱정 마라. 어차피 회삿돈이야."
"아, 그러네요! 그럼 걱정 말고 마음껏 먹어야지!"
"…… 먹을 생각보다 먼저 쓴 돈을 기사로 충당할 생각을 해라…… "
믿어도 되는 걸까. 김수지와 같이 회사를 나선 순간부터 한숨이 끊이질 않는 그였다.
"'먹는 걸 즐겨야 좋은 칼럼을 쓸 수 있다!' 팀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넌 그게 대체 언제적 기사……! 하아,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아무튼 음식 나오기 전에 기사 소재 체크 먼저 하자."
과거에 쓴 칼럼을 보며 배우는 것도 좋은 공부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부하의 모습에 한숨 섞인 감탄을 토해낸 그가 수첩을 꺼내 들자 김수지는 핸드폰을 켜고 s펜을 쥐었다. 그 모습에 가볍게 세대 차이를 느낀 탁영훈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여기 밥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 기사를 쓰러 왔으니, 당연히 기사거리를 뭘로 할 것인지 확실하게 기준을 잡아야 한다."
"네."
"그럼 여기서 문제. 우리가 지금 주목해야 할 사항이 뭘까?"
"어…… 그러니까…… 요리죠?"
"…… 식당에 요리말고 더 볼 게 얼마나 있을 것 같냐. 그거 말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음…… 아! 특별 메뉴요!"
"그래. 맞아."
결론을 도출하는 데까지 너무 시간이 드는 거 아니냐며 핀잔을 날린 탁영훈이 식기 옆으로 세워져 있던 메뉴판을 펜으로 툭툭 쳤다.
옻칠과 자개 장식이 돋보이는 여닫는 것이 가능한 나무판. 그 속에 끼인 한지에는 멋들어진 필체로 곧 상에 올라올 메뉴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고맙게도 특별 메뉴는 따로 표시가 되어 있거든. 먹기 전에 잘 체크하고, 사진 찍기 전에는 절대 손대지 말고."
"옙!"
"부디 대답만큼 잘 기억하길 바란다. 혹시라도 나온 걸 헤쳤다간 진짜 가만 안 놔둘 줄 알아."
우려 섞인 시선과 함께 말을 끝맺은 탁영훈은 이내 자신의 자리에 세워져 있던 메뉴판을 가져와 펼쳤다.
사실, 김수지에게는 뭉뚱그려 특별 메뉴만을 주목하라고 말했으나, 그가 제일 기대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안상필 대가가 직접 만든 초교탕. 이게 진짜지.'
여름철 안가람에서 나오는 메뉴 중 최고라 부르기에 어색함이 없는 요리!
365일 중 삼복. 딱 3일만 판매한다는 말도 안 되는 한정성 탓에 탁영훈 또한 여태껏 그 명성을 들어만 봤지, 실제로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잡지에서 나온 거 보면 말도 안 되게 맛있다던데…….'
꿀꺽.
어느새 입에 잔뜩 고인 군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상상하기만 해도 이토록 기다려지는데, 과연 실제로 요리를 보고 난 뒤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응? 팀장님. 처음 보는 요리가 있는데, 뭔지 아세요?"
"뭐라고?"
탁영훈이 상상 속에서 안상필의 초교탕을 물고 뜯고 맛보던 그때, 앞서 메뉴판을 들고 기삿거리를 찾아 체크리스트를 채우던 김수지가 그렇게 말하자, 잠시 정신을 팔고 있던 탁영훈도 흠칫 제정신을 찾았다.
김수지가 살짝 얼빵한 면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나름 조리과 출신이다. 어지간한 새내기들 보다 요리에 대한 지식이 깊은 그녀도 이름조차 모르는 요리?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뭔데?"
"그, 중간에 메인 자리에 들어간 메뉴요."
"뭐? 메인? 메인은 안상필 대가가 만든 초교탕 자리잖아?"
깜짝 놀란 탁영훈은 손에 든 메뉴판을 활짝 펼쳤다.
한지 위로 빼곡하게 적힌 메뉴들 사이, 여타 메뉴보다 살짝 커다란 글씨가 그의 이목을 끌었다.
"……뭐야 이게."
쇠고기 완자 녹두점미계탕.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의 요리가, 그의 환상을 와장창 때려 부쉈다.
***
주방 업무는 언제나 전쟁이다.
주방이라는 전장에서, 요리사는 칼과 냄비를 무기로 화마와 마주하며 주문이라는 이름의 적군을 쉴 틈 없이 상대해야 한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끔찍했다.
매서운 더위 속에서 육수를 끓이느라 에어컨도 좀처럼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주방은 그야말로 불지옥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런 전장에서 다시금 반나절을 살아남았다.
"하아, 죽겠네 진짜."
끊임없는 주문 세례 속에서 간신히 찾아온 마지막 주문.
간신히 그것을 마무리 짓고서야 찾아온 브레이크 타임에 길게 한숨을 내쉰다.
'참 정말, 왜 이러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편하게 살려고 맘먹으면 얼마든 두 발 쭉 뻗고 평생을 빈둥빈둥 뒹굴며 살아도 괜찮을 계획이 있는데, 정작 몸은 아무리 고생을 해도 그 계획에 따를 생각을 하질 않는다.
어찌 보면 이런 걸 업이라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요리사의 업. 참, 하필 이런 거란 말이지.
"고생했어. 홀에서도 반응 되게 좋았어. 순서도 하나도 안 밀렸고, 새 메뉴도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다 드시고 가시더라."
"아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오늘 딱 하루 메인을 맡으며 적게나마 친분이 생긴 홀 팀장님의 말씀에 고개를 숙였다. 반응이 그렇게 좋다면 굉장히 기쁜 일이다.
'요리사 일이라는 게 남이 먹어줘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 나는 의미가 충만한 업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이라는 건 언제든 기분 좋은 법이고.
몸에 쌓인 피로를 한숨에 덜어 어떻게든 몸에서 내보낸 나는 손과 얼굴을 대충이나마 씻었다. 땀이 말라서 소금이 되어 버릴 지경이라 너무 찝찝했다.
홀 팀장님이 그런 나를 보며 다시 한번 고생했다며 칭찬해 주시던 그때, 갑자기 홀에서 온 웨이터 한 분이 홀 팀장님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뭔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나도 모르게 따라서 표정이 굳었다.
'뭐지?'
보통 홀에서 주방을 찾아오는 데에는 보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컴플레인. 고객의 불만을 주방에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하나는─
"저기, 팀장님. 주방장님이 홀에서 메인 만든 팀원들을 찾으시는데요?"
"응? 왜?"
"아무래도 손님이 만든 요리사를 뵙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모신 분들인데, 잡지사에서 나온 기자들이에요."
과하게 만족한 손님이 기쁨을 나눌 상대를 찾을 때.
"어라."
이번 경우에는,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