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85화 (85/403)

85. 메뉴 시연회.-1-

메뉴 시연을 위해 모인 인원들이 본격적인 조리를 시작하기 전, 참가자 전원을 한곳에 나란히 세운 주방장님이 시연에 앞서 가볍게 전달사항을 하달했다.

"앞서 제출한 레시피와 일치한다면, 어떤 재료를 쓰든, 어떤 조리법을 사용하든 참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탈락시킬만한 레시피는 처음부터 통과시키지도 않았다며 살짝 인상을 쓴 주방장님이 우리에게 검지를 세워 내보인다.

"너희가 지켜야 하는 조건은 딱 하나다. 조리시간 30분. 설마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것도 못 지킬 멍청이는 없으리라 믿는다."

'생각보다 빡빡한데.'

어찌 보면 널널한 조건이지만, 실체를 파고들면 이게 또 그렇지만은 않다.

다른 팀들이야 어떤 메뉴를 들고나올지 몰라도, 우리 팀의 메뉴는 메인. 닭을 이용한 메뉴가 반쯤 강제되는 메뉴다.

'아마 압력솥을 써도 닭이 다 익는 데 15분은 걸리겠지.'

그 외에 기타 잡다한 과정을 거치는 데에 또 10분 정도는 걸릴 것이고, 플레이팅을 위시한 마지막 마무리에도 5분은 필요하다.

'연습을 미리 해둬서 다행이지, 안 그럼 시간 배분하느라 골치 좀 썩였겠네.'

하지만 우리도 이럴 거라고 예상을 못 한 건 아니다. 메뉴 시연회 유경험자인 백하은 쿡도 있었으니 시간제한 정도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내가 해야 할 작업들을 순번대로 나열하기 시작할 때쯤, 그 짧은 내용이 전달사항의 전부였다는 듯 말을 끊은 주방장님이 자리에 모인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각 팀의 팀장들부터 시작하여 그 아래의 팀원들까지.

그렇게 좌에서 우로 시선을 쭈욱 옮기던 주방장님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 쯧."

"?"

저거, 지금 혀 차신 건가?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점점 가늘어지는 눈가를 보면 마냥 착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나를 그리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본 것처럼 얼굴을 찌푸릴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불퉁스런 표정이 절로 얼굴 위로 튀어나오려는 손바닥으로 비비며 간신히 막고 있을 때, 그런 내 어깨를 터치하는, 아니 아예 숫제 매만지며 주물럭거리는 한 쌍의 손아귀가 주는 감촉에 흠칫 몸을 떨었다.

"깜짝이야. 뭐하시는 겁니까?"

"미안, 놀랐엉? 우리 동생 어깨가 많이 뭉쳐 있는 것 같아서 풀어주려고 그랬지! 자자, 누나가 조물조물 잘 주물러줄 테니까 긴장 풀어."

"아, 됐습니다. 가서 창민이한테나 해주시지 그러세요."

"해 주려고 해봤는데 도망치잖아."

선배가 눈을 힐끔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끔직한 표정으로 제 누이를 바라보는 창민이가 보였다. 아마 주방장님도 선배가 장난을 시도하려는 모습을 본 것이겠지.

무슨 문어가 다리를 꿈틀대는 모양새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선배의 손을 잡아 저 멀리 치워내자 선배가 아쉽다는 듯 칭얼대기 시작했다.

"이쯤 하시고 그만 준비하러 갑시다. 조금 있으면 시작하잖아요."

"예이, 알겠습니다."

아무리 선배라도 집중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마냥 장난만 칠 수는 없었는지 웬일로 순순히 내 말에 따라 움직였다.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뱉을 때, 언제 온 것인지 내 옆에 서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백하은 쿡이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힘들어 보이네."

"조금…… 아니, 솔직히 꽤 힘드네요. 제가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 아닌지라."

"하하하."

시작하기 전부터 사람 진을 빼놓는 선배를 향해 원망스러운 시선을 던지자 백하은 쿡이 어설픈 웃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효민이가 좀 쉽게 달라붙는 타입이긴 하지. 그래도 너무 나쁘게만 여기지는 마. 쟤도 다른 애들이었으면 친구랑 만나서 놀 시간에 주방에만 있다 보니 저러는 거야."

"뭐,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요……."

좋은 사람인 것도 맞고, 존경할 부분도 있지만, 저 특유의 거리감을 좁혀오는 태도가 선천적 아싸인 나로서는 살짝 불편하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것이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백하은 쿡은 다시 한번 웃음을 흘리며 가벼운 격려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열심히 해보자. 잘 해줄 수 있지?"

"물론이죠."

상쾌한 눈웃음을 마지막으로 조리대를 향해 발을 옮기는 쿡의 뒷모습을 마냥 바라보기도 잠시, 나 또한 서둘러 복장을 가다듬고 내 자리로 향했다.

***

"그럼 지금부터, 조리 시작!"

─땡!

누가 친 것인지 모를 경쾌한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우리는 본격적으로 조리를 시작했다.

"다들 자기 파트는 다 외웠지?"

"예!"

"좋아, 서두르자!"

백하은 쿡의 선창을 시작으로 서로의 구역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백하은 쿡은 소고기 완자.

효민 선배는 양념.

창민이는 고명.

그리고 나는, 요리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심 식재료인 닭을 맡았다.

"어디 해보자."

중심 식재료를 도맡는 일은 보통 그 팀의 리더가 하기 마련이다. 메인 식재료가 늦을수록 팀 전체의 속도가 늦춰지는 만큼,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가장 서둘러야 하면서도. 너무 빠르게 나와 재료 간의 규정이 깨지지 않게끔 신경 쓰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는 백하은 쿡이 맡아야 할 자리였으나, 백하은 쿡은 이 레시피에 대한 이해도는 내가 가장 높을 것이라며 이 자리를 내게 넘겨주었다.

'부담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그런 부담스러움을 뛰어넘는 고양감이 오히려 더더욱 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압력솥으로 닭부터 삶는다.'

우리 크루는 새벽에 도축되어 들어온 노계와 영계 중 노계를 골라 요리에 사용하기로 했다.

'영계 쪽이 살코기가 더 부드럽긴 하지만, 우리가 만들 레시피는 노계의 단점을 최대한 보완하고 장점을 살린 요리니까.'

늙은 닭, 노계는 나이가 들어 살이 질기고 퍽퍽하지만, 그 대신 노계로 뽑은 육수는 영계가 따라가지 못할 깊은 풍미를 가득 담고 있다.

꼬랑지 부분의 지방과 갈비뼈 사이 콩팥을 제거한 뒤 흐르는 물로 안팎을 꼼꼼하게 닦아 여분의 핏물 등을 깔끔히 제거한다. 비린내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그 다음에는 압력솥에 마늘, 대파, 인삼, 말린 밤 등의 재료를 닭과 함께 넣은 뒤 뚜껑을 꽉 닫고 끓인다.

"후우. 일단 첫 번째 할 일은 완료."

이쯤에서 한숨 돌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물이 끓어올라 압력솥 뚜껑의 종이 울리기 전까지 끝내놓아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남는 시간을 십분 활용하여 이후에 사용할 재료들을 한쪽에 미리 정리한 뒤, 다음 과정을 실행할 차례…… 이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 와서 정말 이걸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마음을 찔렀다.

아니, 불안감이란 말보다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 하는 수 없지. 한번 해보자고. 내 멋대로 한식."

결심을 굳힌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조리도구 속에서 전동 거품기를 꺼내 들었다.

***

"오, 다들 제법 하는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강진과 최동식. 두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해 조리에 몰두하고 있는 쿡들을 살피며 크게 뜬 눈으로 감탄을 표했다. 각각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어도 그 두 눈에서 흐르는 경탄은 차마 숨길 수 없이 쿡들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조리를 시작한 지 고작 5분.

누군가에게는 고작 컵라면 한 그릇 끓일 시간에 불과할지 몰라도, 이 자리에 모인 쿡들에게는 부여받은 제한시간 중 6분의 1에 달하는 시간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300초 동안, 자신의 시간을 단 1초라도 헛되게 낭비하는 쿡은 저들 중 그 누구도 없었다.

"보자, 용석이 놈이 키운다던 애도 꽤 하는 것 같고…… 오, 준우 녀석도 제법인데?"

"아, 그러게 저희도 몇 명만 꼽아서 내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잖아요. 가오 없게 진짜."

"너는 인마 한식 전문 요리사라는 놈이 무슨 가오 타령을 하고 있어?"

뒤에 서서 되도 않는 소리 말라며 최동식의 관자놀이 부근에 딱밤을 날린 강진이 다시 팔장을 꼈다.

"뭐, 우리도 막내 나갔으니까 된 거 아니냐."

"아니 걔가 말이 막내지 그냥 프리랜서라니까요? 안가람 프리랜서?"

"그럼 마지막 고용주가 우리니까 아직 우리 직원이네."

"하……."

자신에게 지지 않는 괴변을 쏟아내는 강진을 한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본 최동식이 한숨을 흘렸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언제 이 사람한테 이렇게 물들었나 한스러운 까닭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잡생각을 털어낸 최동식은 말이 나온 겸 그들의 막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눈을 돌렸다. 최연소 그린 스카프 백하은, 효민과 창민 남매, 마지막으로 자신이 본 학생 중에선 아마 최소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실력을 가진 찬혁까지.

'말 그대로 다크호스 팀이구만.'

전부 출중한 재능을 갖춘 젊은이들의 모임에 내심 새어 나오던 부러움을 감춘 최동식이 고개를 돌리던 순간, 시끄러운 기계음이 그의 귀를 강타했다.

─위이이이이잉!

"뭐야, 어느 팀이 기계를 써?"

주방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일이야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안가람에서는 보통 대량 조리를 할 때나 사용하는 기계 소리가 왜 지금 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고 고개를 돌린 최동식은, 이내 시선을 향한 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 어라? 찬혁이? 저거 그거 아닌가? 어?"

최동식이 시선을 향한 곳, 울려 퍼지는 기계소리의 근원지에는 다름 아닌 그가 찾던 찬혁이 있었다.

한 손에는 볼, 한 손에는 거품기를 든 찬혁. 주방에서는 일상적인 모습이기에 처음 보았을 때는 별다른 생각 없이 빤히 지켜만 보고 있던 최동식이었으나, 이내 볼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하얀색 거품을 보고는 눈을 까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머랭이잖아?!"

머랭. 계란 흰자를 거품기로 쉴 새 없이 저어 만드는 흰자 거품.

양식 주방에서야 어디에든 폭넓게 쓰이는 것이지만, 이곳은 머랭을 쓸 일도, 만들 일도 별로 없는 전통 한식 주방. 그 중심에서 등장한 그 뜬금없는 머랭의 훌륭한 자태에 최동식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 머랭?"

"누가 머랭을 만들어?"

"저기 있네. 저거 찬혁이 아냐?"

그런 최동식의 목소리를 듣고 직원들의 시선이 하나둘 찬혁을 향해 쏠리기 시작했다. 고작 신참 한 명에게 가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주목도였으나, 그런 상황이 된 것에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찬혁 본인은 잘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출근 첫날부터 보여준 파격적일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업무 처리 솜씨 덕에 찬혁의 이름은 안가람의 쿡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출근 5일 째가 된 지금에 와서는 모르는 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니까.

"머랭? 머랭이 여기서 왜 나와?"

점점 번지기 시작한 직원들의 웅성거림에 강진이 반응했을 때(쯤. 찬혁은 이미 머랭을 전부 만든 뒤 다음 과정에 들어간 뒤였다.

충분히 끓은 압력솥을 싱크대로 옮긴 뒤 그 위로 찬물을 붓는 찬혁.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에 의해 김이 폭발하듯 압력솥에서 뿜어져 나왔지만, 견고하게 만들어진 압력솥은 다행히도 제 속에 가득 찬 김을 전부 배출할 때까지 멀쩡히 버텨주었다.

속에 있던 육수용 재료와 육수를 따로 분리한 찬혁은 뒤이어 냄비에 걸러낸 육수를 따로 담아 채친 향신채 등을 넣고 그것을 다시 불에 올렸다.

그 과정에서 안가람의 쿡들은 또다시 놀란 목소리를 냈다.

향신채를 넣은 육수를 불에 올린 찬혁이, 그 위에 방금 만든 머랭을 그대로 쏟아 넣고야 말았으니까!

"허, 저거 콩소메 만드는 방법이지 않나?"

"콩소메요?"

"뭐야, 넌 요리사가 돼서 콩소메도 모르냐?"

"아니, 당연히 알죠! 근데 그게 왜 여기서 나오냐고요!"

콩소메.

그것은 머랭을 이용해 끓인 프랑스식 스프의 이름이다.

간신히 대류현상만 일어날 정도의 온도로 끓이는 육수에 머랭을 넣고 끓이는 스프.

대류 현상으로 육수 속에서 움직이는 불순물을 머랭의 접착력을 이용해 여과하여 만드는 그 스프는, 세상 그 어떤 스프보다 투명하면서도 육수 속 재료의 맛이 한 곳에 어우러지는 맛을 자랑한다.

호텔 등을 목표로 하는 요리사라면 누구나 알 유명한 스프를 최동식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 양식 스프가 지금 나오는 이유를 모를 뿐이다.

하지만 정작 그보다 더 전통을 고수하는 조리로 이름 높은 강진은 크게 놀란 표정도 없이 빤히 찬혁의 조리를 지켜볼 뿐이었다.

"진정해. 저것도 그냥 조리법에 불과하다. 뭣보다 주방장님이 직접 레시피를 검토한 다음 통과시킨 걸 텐데,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 시끄럽게 떠들면서 쟤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보기나 해."

"아, 예. 알겠습니다."

강진의 합리적인 설명에 그제야 침착함을 되찾은 최동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이름 높은 안가람에서 벌어진 사상 초유의 사태에 깜짝 놀란 가슴은 아직도 크게 두근거리고 있었지만.

직급이 가장 높은 강진이 침착함을 보이자, 그제야 주변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점차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일류 중의 일류 요리사들이다. 찬혁의 파격적인 모습에 놀랐을 뿐, 참신할 것도 없는 조리법에 더 이상 놀랄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찬혁의 조리는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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